[역사로 보는 정치] 사림의 당쟁과 요원한 국회 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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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사림의 당쟁과 요원한 국회 정상화
  • 윤명철 논설위원
  • 승인 2018.07.0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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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꾼들은 한 줌의 시한부 권력을 얻었지만, 백성은 모든 것을 잃었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논설위원)

조선을 망친 붕당의 시초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과 갈등이다. 임진왜란의 참화도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빚어낸 비극이다.

선조가 즉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당시의 적폐세력인 훈구에 대한 처리를 놓고 대립했다. 강경파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동인’으로, 온건파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을 ‘서인’으로 갈라섰다.

하지만 이들은 舊 적폐인 훈구세력 못지않은 ‘권력의 화신’들이었다. 특히 왕권 견제 기관인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3사 관리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는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0년 3월 1일 기사를 보면 성균 진사 조광현·이귀 등이 스승 이이가 무함당한 정상을 논한 상소문을 올린다.

이들은 “옛날 동서로 당파가 나뉘어질 적에 조짐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에게서 일어났으나 실지는 전후배(前後輩)의 사이가 서로 좋지 못한 데에서 연유된 것”이라며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으므로 같은 사류(士類)이면서도 의심과 간격이 일어나 참소와 이간이 행해져서 결국 배척이 유발됐으니, 이것이 동서의 당이 처음으로 나뉘어지게 된 이유”라고 밝혔다.

또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 “두 사람의 친구로서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자가 각각 시비를 다투어 서로 합일되지 못하게 된 뒤에야 같은 동아리끼리 상종하면서 서로 번갈아가며 결점을 헐뜯고 사람마다 편견을 고집해 서로 승부를 다투었다”면서 “을해년 에는 서인이 요로를 담당하고 을해년 이후에는 동인이 용사(用事)해 서로 공격했는데, 계미년에 이르러 괴란(壞亂)이 극도에 달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언급한 계미년 괴란은 박근원(朴謹元)·송응개(宋應漑)·허봉(許葑) 등 동인이 서인의 거두 당시 병조 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북도(北道)로 유배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동인이니 서인이니 주창해 한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고 같은 배에 탄 사람이 적국이 되고 한 집안이 호인(胡人)이나 월인(越人)처럼 남남이 돼, 아래로는 사대부의 뜻을 어지럽게 하고 위로는 명주(明主)에게 근심을 끼쳤다”고 진단했다.

결국 이들의 상소문이 올려진 지 5년 후에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당해 7년 전란의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조선의 백성은 왜군의 총칼에 쓰려졌고, 선조는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자 명나라로의 망명까지 심각하게 고려하는 비겁함을 보여줬다.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장은 공석이다. 20대 후반기 국회 원구성이 여야의 대립으로 지연됐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운영위와 법사위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양당이 합의점을 찾았다는 정가의 소식도 들려오지만 최종 합의 소식은 아직 깜깜 무소식이다.

국회 부의장 1석을 노린 野·野 갈등도 만만치 않다. 바른미래당과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은 서로 국회 부의장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한반도 핵 위기는 아직 해결되지도 않았고, 경제 위기에 대한 심각한 경고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국회의장을 공석으로 만들고, 산적한 민생 현안을 외면하면서 요직 다툼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은 임진왜란을 코앞에 두고도 권력 쟁탈전에 빠져 있던 동인과 서인의 당쟁과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권력 쟁탈전에 몰두한 정치꾼들은 한 줌의 시한부 권력을 얻었지만, 백성은 원치 않은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모든 것을 잃었다는 뼈아픈 교훈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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