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살기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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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살기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할 수 없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8.21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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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신민당 5·30 전당대회의 역전 드라마

#1. 1979년 5월30일, 신축한 신민당 마포당사에서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이철승·이기택·신도환 순으로 득표를 해서 2차 투표를 할 때 이기택 씨가 김영삼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사퇴를 하고, 신도환 씨가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를 했다.
 
그래서 김영삼, 이철승 두 분을 놓고 결선투표를 했는데, 김영삼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승리해 2년 만에 당권을 되찾았다. 박정희 정권이 가장 싫어한 김영삼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고흥문 씨는 이때도 이철승 씨를 지지하며 자신은 나서지 않았다. 따라서 고흥문 계보는 비당권파로 떨어지게 되어 나 또한 정치를 하겠다고 이 대열에 끼어든 후 처음으로 중앙당의 당직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12일에 실시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권·타락·부정·불법을 자행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68명이 당선된 반면 신민당에서 61명의 당선자가 나와 의원수 차이가 근소할 뿐 아니라 전국유권자 총 득표수에서도 공화당이 31.2%를 얻은 데 반해 신민당은 32.3%로 공화당보다 1.1%를 더 얻었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불신임을 받았고 신민당은 유신정권의 대체세력으로서 국민의 엄청난 성원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신민당 대의원들은 뜻도 분명치 않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온건한 자세를 취한 이철승 대표의 지도노선을 배척하고, 국민의 여망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하게 정권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앞장선 김영삼 후보를 선택한 것이다.
 
한마디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희망의 종소리였다.
김영삼 총재는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오늘의 결의는 우리 신민당이 곧 여당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며, 수권 준비태세가 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제 민주주의는 개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목을 아무리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최고위원으로 있던 사람들은 막후로 물러나고 이민우, 박영록, 조윤형, 이기택 이 네 사람이 부총재에 지명되었다. 나는 고흥문 의원과 함께 당의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평당원으로서 주로 개인생활에 전념했다.

김영삼 총재의 직무정지 가처분
 
#2. 김영삼 총재는 당권을 장악하고 나서 긴급조치, 비상조치, 위수령 등 온갖 독재적 수법을 총동원해 야당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박정희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국민의 뜻을 따라 정권을 내놓을 준비를 하라고 압박해 들어갔다. 그럴수록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인 발악은 더욱 기승을 부려 이성을 잃고 오직 무력으로만 무리수를 쓰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가 당권을 잡은 지 석 달도 되기 전에 YH사건이 터졌다. 가발공장에서 일하던 YH 여공들은 몇 달치씩 월급도 안 주고 폐업한 회사에 대해 밀린 월급을 달라고 호소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아무런 대답도 못 듣고 강압적으로 농성장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갈 곳을 찾다가 1979년 8월9일 신민당사로 몰려와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신민당 강당인 당사 4층에서 농성을 벌였다.

8월11일, 무장경찰이 당사에 진입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신민당 당직자들과 YH 여공들을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사람씩 개 끌듯 끌어냈다. 그 와중에 급기야 김경숙이라는 여공이 사망함으로써 YH사건은 국내외로 큰 뉴스로 기록되었다.
 
<김영삼 총재의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1979년 8월13일, 신민당 원외 위원장 중 조일환(曺逸煥), 윤완중(尹完重), 유기준(兪琪濬) 세 사람이 5·30 전당대회에 부정 대의원 몇 사람이 섞여 있어 그 대의원들의 투표로 당선된 총재는 당선무효이므로 총재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그 처분이 법원에서 이유 있다고 받아들여지고, 법원은 총재에 냈다. 그 처분이 법원에서 이유 있다고 받아들여지고, 법원은 총재권한대행에 정운갑(鄭運甲) 의원을 선임까지 하여 선고했다.

5·30 전당대회는 이철승 대표 체제 하에서 그들의 주관으로 대의원도 선정하고 전당대회의 모든 절차를 그 당시의 주류에서 맡아 했다. 비주류였던 김영삼 총재는 주류에서 하는 대로 따라 응전만 해서 당당하게 총재로 당선된 것인데, 적반하장으로 김영삼 총재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요 판결이었지만 무소불위의 유신치하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박탈
 
#3. 1979년 10월4일, 박정희 대통령은 총재 직무를 정지시켜 놓았음에도 여전히 극한적이 대여 공세를 멈추지 않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기로 했다. 그래서 신민당 의원들이 단상점거 등 농성을 벌이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공화당 의원 총회실에서 공화당 의원과,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임명한 유정회 국회의원만 참석한 가운데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제명을 결의하여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 이유로 그들은 김영삼 총재가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와 나눈 회견내용을 문제 삼았다. 김영삼 총재는 “나는 지금도 북괴와 대응하는 가장 적절하며 유일한 방법은 언론·집회의 자유, 자유선거를 통해 우리의 정부를 선택할 자유라고 확신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보다 많은 민주주의, 보다 개방적인 제도와 더불어서만 대한민국은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이해와 부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사대주의 발상이라고 구실을 붙여 제명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로 인하여 발생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놓고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영삼 총재를 제명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니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나서 김영삼 총재를 장충단 모처에 있는 정보부 별관으로 모시고는 이렇게 말했다.

“총재님, 박정희 대통령의 감정이 극에 달해 이대로 가면 제명, 구속은 물론 극단적으로 그보다 더한 일도 저지를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도 총재님도 불행해집니다. 이런 일은 막아야 합니다.”

그 말에 김영삼 총재가 대답했다.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요. 김 부장도 조심하시오.”
“내일 아침에 국회에 나갈 때 잠깐만 기자실에 들러 <뉴욕타임스> 기사가 와전되었다고만 한마디 슬쩍 하시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잠시 살기 위해서 영원히 죽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소!”

김영삼 총재가 그렇게 말하고 나올 때 김재규 씨가 “또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는 김 부장을 볼 일이 없을 거요” 하고 나왔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 말이 걸린다고 김영삼 총재는 몹시 안된 표정으로 사석에서 내게 정황을 들려주었다.
 
<부마 민주항쟁의 폭발>
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한 지 12일 만인 1979년 10월16일, 부산과 마산에서 김 총재의 제명에 항거하며 수만 명의 시민들이 궐기해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독재타도, 유신철폐, 언론자유, 김 총재 제명 철회, 부정·부패척결 등의 구호를 연호하며 겁 없이 얻어맞고 다치고 쓰러지는 민주시민의 시위행렬을 긴급조치와 비상조치 하의 강권통치도 막지 못했다. 이 사태를 부마사태 또는 부마항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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