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기수론 6人②] 김영춘, 독수리 오형제의 ´비상´
[50대 기수론 6人②] 김영춘, 독수리 오형제의 ´비상´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8.08.20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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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춘이 택한 정치실험 넷
독수리 오형제에서 홀로서기行…
광야에서 돌아와 지역주의 ´타파´
文정부 탄생 기여, 50대 기수 ´주목´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공자(孔子)는 50대의 나이를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하늘의 뜻을 안다’ 는 뜻처럼 자신이 어디에 서있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확고히 정립할 수 있는 나이 때라 전해진다.

얼마 전부터 정치권에는 50대 기수론이 다시금 뜨고 있다. 조용하지만 중량감 있게, ‘안정적인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음이다. 그런 점에서 6인이 부각되고 있고, ‘왜 눈에 띄나’ 살펴봤다. 6인은 ‘김영춘’(57), ‘원희룡’(56), ‘송영길’(56), ‘김용태’(51), ‘하태경’(51), ‘김관영’(50)이다. 이번②는 김영춘 해수부장관.

▲ 정치실험을 거듭해 온 김영춘 해수부장관은 50대 기수론으로 주목받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정치실험가가 택한 도전의 순간들
기득권 안주보다 실험 거듭한 이유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보여준 정치인


지구 정복 악당들과 싸우는 <독수리 오형제>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추억의 일본 만화로 1980년대 한국 TV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다. 

정치권에서도 독수리 오형제가 있었다. 정확히는 독수리 오형제로 불리는 정치 개혁파들이었다. 김영춘(57, 이하 김영춘)해양수산부장관도 독수리 오형제의 일원이었다. 나머지 독수리 오형제로는 이부영·이우재·김부겸·안영근 전 의원이 속한다. 김영춘 포함 이들 개혁파 다섯 명은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타파, 국민통합을 기치로 지난 2003년 7월 7일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광야로 나왔다. 당시 다섯 명 모두 거대 야당의 촉망받는 의원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 정치의 전면적인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지역주의 타파와 국민통합, 정책정당 건설에 온몸을 던지겠다”는 탈당 선언과 함께 새정치를 담을 신당 창당의 깃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여야 막론하고 자신들의 대의에 동의하는 정치인들과 양심세력이 있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함께 신당 창당의 배에 오를 것을 촉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2003년 11월 11일 새로운 정치, 따뜻한 사회, 잘사는 나라, 한반도 평화를 강령으로 창당된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이었다. 한나라당 출신인 독수리 오형제의 신당 추진이 도화선이 돼 민주당 개혁파와 화학적 결합을 이룬 것이다. 한편으로는 한나라당 출신의 개혁파가 현 민주당의 주요 뿌리 중 하나인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주축 멤버라는 점에서 정치적 묘함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됐든 창당을 주도한 김영춘은 서울특별시당 위원장, 원내수석부대표 등 당내 굵직한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2007년 참여정부의 인기 추락과 함께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흡수됐고, 이 같은 정치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아쉬움을 남겼다.

김영춘은 이후 열린우리당 실패의 책임을 지고 18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함과 동시에 이번에도 제2의 정치실험에 나서게 된다. 거대 양당의 기득권과 선 긋는 제3의 물결을 기치로 2007년 17대 대선에 출마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기 또한 제3의 정당에서 대통령이 당선되는 사례는 없던 때였다. 김영춘 또한 이미 16대 대선에서 ‘무소속 정몽준 후보’편에 섰다가 실패한 ‘김민석 학습효과’가 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지만, 거대 당에 속하는 무난한 길 대신 실패 가능성이 높을지라도 홀로서기를 택했던 것이다.

김영춘은 지난 2012년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그와 관련 다음과 같이 소회한 바 있다.

“(2007년 대선) 당시는 이명박 후보 당선이 유력시 될 때였는데, 국회의원 두 번하면서 좌절감을 많이 느꼈다. ‘왜 이렇게 점점 살기 힘들어져가는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하고 좌절감이 컸다. 열린우리당도 잘못하고 있었고 이명박과 박근혜 후보가 말하는 성장우선주의 감세정책 등으로는 국민이 행복해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진보적 접근으로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발전적 중도가 중요한데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로는 도탄에 빠진 국민을 위할 수 없다고 생각해 문국현 후보에게 갔다. 문 후보가 사람중심 사회를 강조했다. 사람중심 세상이 위기에 빠진 국민에게 복음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러나 문국현 후보는 4위 득표율로 패했고, 김영춘이 동참한 제3의 실험적 모색도 실패로 끝나게 된다.

실험의 양 갈래 길은 성공 아니면 실패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실패가 훗날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는 있어도 당장의 실험이 목표치에 어긋나면 엄연히 실패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때문에 실험을 하려는 자의 덕목은 용기와 도전정신이다. 기득권이 갖춘 ‘안주’와는 동떨어진 광야로 나서려면 과감한 결단력과 모험성이 없으면 어려운 이유에서다.

김영춘은 실험이냐, 안주냐. 두 갈림길 중 또 다시 제3의 정치실험을 택하기에 이른다. 광야로 나가 전국을 돌며 야인 생활을 한 것이다. 그의 저서 <대한민국 자전거, 도보여행>에 따르면 김영춘은 열린우리당 창당 시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성찰적 자세로 2008년 한반도 남쪽의 해안을 따라, 전국 12개 광역시도 52개 시군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또 2009년 지리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등을 도보로 다녔다. 아울러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정리한 사람의 정치학 <나라 뒤집기>를 펴냈을 때는 양평 서후리의 산골마을 셋방에서 1년 동안 주말 동안 틀어박혀 글을 썼다. 그렇게 3년 남짓한 김영춘의 야인생활은 2010년 10월 손학규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의 요청으로 민주당에 복당하면서 매듭을 짓게 된다.

다음으로 김영춘이 택한 제4의 정치실험은 지역주의 타파였다. 민주당(당시 민주통합당) 소속이었기에 불리할 것을 알면서도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부산진갑에 출마한 것이다. 결과는 35.8%의 득표율로 낙선했지만 3,500차라는 간발의 차였기에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는 관측이다. 이를 증명하듯 김영춘은 2016년 20대 총선에서 49.6% 득표율로 부산진갑에서 당선됐다. 여기에는 당시 차기 대권으로 유력했던 ‘문재인 바람’의 긍정적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2014년 제6회 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후보 출마, 2015년 더불어민주당 부산광역시당위원장 활동 등 거듭된 도전과 지역 스킨십이 승리의 요인이자, 역으로 민주당 표심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이처럼 정치실험을 거듭해 온 김영춘은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1년 고려대 문과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수재였으며, 대학 시절 5ㆍ18 광주학살의 참상을 알게 되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에는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다. 그해 11월 14일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의 막강 여당이었던 민정당 당사를 기습 점거를 주도,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민정당사 농성사건 배후 조종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난 뒤 김영춘은 YS(김영삼)와 인연이 돼 상도동계 막내로 합류하게 된다. 1987년에는 직선제 개헌 운동을 앞장 선 김영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 비서로 임명되며 또래의 386 운동권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정치권에 입문했다. 이후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16,17대 광진갑 총선에서 내리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이처럼 정치입문 뒤 처음엔 엘리트코스를,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는 정치실험의 정치 역정을 거듭해왔다는 분석이다. 

현재 김영춘은 해양수산부장관 직에 있다. 지난 대선 때 문재인 캠프 중앙선대위에서 농림해양정책위원장을 맡는 한편 부산선대위 상임선대위원장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하기까지 동거동락했고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상임위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인정돼 장관으로 발탁됐다.

지난해 5월 30일 청와대 당시 박수현 대변인은 김영춘 해수부장관 내정 배경에 대해 “위기의 해운 산업을 살리고 갈수록 환경이 악화하는 수산업 보호, 또 이제 다시 시작하는 세월호 진상규명 등 해수부 주요 과제 해결의 최고 적임자”라고 밝힌 바 있다. 

눈길을 끈 것은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될 당시 같은 독수리 오형제에, 지역주의 타파에 애쓴 공통점이 있는 김부겸 행정자치부장관도 문재인 정부 1기 내각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는 점이다.

잇따른 성공 속 정치실험의 여정이 일단락 된 것인지 모르지만, 김영춘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임을 보여준 정치인이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자로 평가받을 듯 보인다. 어떤 약속이냐면 이렇다.

 "이제 더 이상 실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펼쳤던 정치실험은 40대까지 주어졌던 자유라고 생각한다. 나이도 50대 접어들었고 떠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유분방하게 나라를 위한 길, 공공선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실험과 도전의 정치를 했다면 지금부터는 그런 경험 등을 갈무리해야 한다고 본다. 뼈를 묻고 나의 정치를 마무리할 수 있는 곳으로 부산을 선택했다. 당을 바꾸거나 지역을 바꿀 일이 없을 것이다. 정치를 그만두면 뒀지 다른 당에 가서 정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2012년 <시사오늘>인터뷰 중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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