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민노-진보신당, 합당 통해 반MB전선 이뤄야”
김준기 “민노-진보신당, 합당 통해 반MB전선 이뤄야”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1.03.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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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4-H 회장
고교 때부터 농민운동에 투신…‘한국 4-H운동’의 효시
관주도에서 민간운동으로 탈바꿈…청소년 육성이 목표
한국 농민, ‘늙은 창녀’의 신세…원인은 무분별한 개방

농업이 위기다. 한때 국가의 기간산업 역할을 했던 농업은 현재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분명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다. 농업은 유신정권 직후부터 도시경쟁력 강화, 중공업 정책 등으로 인해 도농격차가 심화됐다. 그 격차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87년 체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심화됐다.

YS정권 때는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개방체제의 시작을 알렸고 DJ-노무현-MB정권 등은 워싱턴 합의에 기초한 미국식 개방체제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것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외국자본에 대한 제한 철폐, 시장 개방에 찬성하는 신자유주의는 약자에게 구조적 폭력을 가한다. 또 정의에 대한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결국 이념적 차이를 넘어 약자의 인권보호라는 윤리적 가치문제를 뒤흔든다. 이성이 비관된 현실에 의지로 낙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야 할까. 그래서 지난 8일 김준기 한국 4-H본부 회장을 찾아갔다. 평생을 농민운동에 투신한 김 회장에게 한미 FTA 재협상부터 농협법 개정안, 한국식 대안적 모델 제시에 실패한 진보진영의 현실까지 물었다.

그의 답변은 솔직했고 거침없었다. 때로는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에 우리를 초대했고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농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 양당에 대해서는 매서운 비판을 가했다.

민노 분당, 진보신당 책임 크다…“NL-PD 논쟁 접어야”
진보양당,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야…진보 외연 확대 필요

▲ 김준기 한국 4-H 운동본부 회장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합당을 통해 반 MB 전선을 이뤄야 한다고 밝혔다 ⓒ권희정 사진기자
-1962년 4-H 연구회 회장직을 맡은 이후 평생을 농민운동에 투신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농업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 등에 큰 감명을 받은 게 결정적인 이유가 됐죠.  당시 도시와의 빈부격차 등 농촌이 안고 있던 현실로 인해 농촌 계몽주의에 심취하게 됐습니다. 그 영향으로 1958년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농업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농대에 갈 생각을 안했을 겁니다. 지금 ‘자기주도학습’이라는 말이 유행이잖아요. 내가 당시 그랬거든요. 농고에서 미적분 등을 혼자 공부하면서 대학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면서 4-H연구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고 전역 후 할아버님께서 소 한 마리를 팔면서 ‘이것 외에는 내가 줄 것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대학에 더 다닐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농촌, 농민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다시 학교에 복귀했죠.”

한국 4-H운동은 1952년 12월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 4-H구락부 운동을 정부 시책으로 채택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1962년 농촌진흥청 발족을 시작으로, 63년 4-H소식지 발간, 71년 제9차 아시아 4-H지도자 세미나 개최, 87년 한국4-H운동 40년사 발행, 90년 한국4-H회관 건립, 01년 한국4-H후원회를 ‘한국4-H본부’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4-H운동은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건강(HEALTH)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들었고 각각 지(智)·덕(德)·노(勞)·체(體)의 기본이념의 실천을 통한 농촌청소년 육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 결국 4-H운동은 청소년의 민주시민 의식 고취를 위한 사회교육운동인 셈이다.

-서울대 농대로 진학할 당시 4-H연구회 등 당시 농민운동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1962년 전국 대학생 4-H운동 연합회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11개 대학으로 시작해 차츰 50여개로 확대됐고 그 다음에 만든 게 가톨릭 농민회였죠. 보통 1940∼50년대를 농촌계몽기, 60년대를 농촌운동기로 봅니다. 70년대부터 농민운동기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고 80년대 이후 본격적인 농민운동기 시기가 도래한 거죠.”

김준기 4-H본부 회장은 1938년 경북 포항 출신으로, 포항청하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신구대학 교수, 한국농업전문학교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또 고교시절부터 4-H운동을 한 김 회장은 2006년 2월 28일 한국 4-H본부 정기총회 경선을 통해 회장에 선출, 4-H출신으로 첫 한국 4-H본부 회장에 취임한 최초의 4-H인이 됐고 2009년 2월 재선에 성공했다. 김 회장은 2011년 현재 비상근·명예직으로 4-H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김 회장은 그간 관 주도의 한국 4-H운동을 민간주도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류는 하나, 공동생명체가 새 패러다임”

-농업의 위기가 현존하고 있는 이 때, 한국 4-H운동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향후 20∼30년 후 지구촌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농업입니다. 청년 농업인들의 낮은 교육수준이나 낙후된 농업기술의 해결이 핵심인 셈이죠.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1세기의 새 주인인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입니다. 청소년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농촌에 대한 애착을 통해 진짜 영농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동안 관 주도로 이뤄졌던 4-H운동이 민간운동으로 전환한지 6년째가 됩니다. 아직 과도기 단계지만 점차 정착 단계에 들어갔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패러다임을 통해 과도기에서 정착기로 들어선 셈이죠.”

-현재 회원수는 어느 정도입니까. 청소년들의 공감대 등 반응은 어떤가요.

“현재 청소년만 7만5000명 정도가 회원으로 가입돼 있고 선생님 등 지도자까지 합하면 그 이상입니다. 청소년들의 공감대가 상당히 넓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농업단체가 축소된 데 반해, 한국 4-H운동은 점차 확산되고 있죠.”

-4-H운동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는데, 현재 한국의 네트워크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국 등 선진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도 한국의 4-H운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에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국 4-H운동이 미국 중심의 철학이념에서 벗어나 한국식 교육운동의 철학을 가지고 세계로 확대하고 있는 셈이죠. 지난 2월 22∼28일에는 아시아 미국 유럽 중남미 북미 아프리카 등 각 대륙 대표들이 모여서 지구촌의 문제들, 식량문제, 기아, 빈곤의 양극화 등에 대한 국제 워크숍을 열었습니다.  각 대륙 대표들이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국 4-H운동 철학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간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 한국식 4-H운동으로 정착돼 가고 있는 거죠.”

-한국식 4H운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미 FTA 놓고 진보진영이 반FTA를 펼치는 것은 잘하는 것이라고 김 회장은 말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류는 하나’라는 공동체 번영입니다. 미국 등 외국의 4-H운동 관계자들에게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이자 교육이념인 ‘홍익인간’에 대해 자주 얘기합니다.

세계화는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것이고 교육도 사람 농사를 짓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핵심은 공동체 의식이 돼야 한다는 거죠. 이 말을 하면 다들 놀래더라고요.

‘4-H운동이 글로벌화 되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라는 게 미국 측의 주장입니다. 미국의 철학은 거기서 부딪치는 거죠. 통상적으로 선진국이 후진국을 ‘지원’한다고 하는데, Helper라는 개념으로 보면,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기잖아요.

지원한다는 개념을 버리고 ‘함께’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결국 공동생명체, 생활공동체 철학을 널리 전파하는 거죠.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헤어질 때 포옹을 하며 ‘공동생명체’에 대해 공감을 표시합니다.(웃음)”

-올해 안으로 한국 4-H운동이 가장 중점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올해 안으로 아시아 지역만이라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싶습니다. 오는 3월 말까지 각 나라의 의견을 수렴하고 5월에는 국제 네트워크를 위한 태스크포스를 만들 예정입니다.”

-농촌에 대한 청소년들의 인식은 부정적입니다. 실제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은 농대가 아닌 다른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참 큰일입니다. 농업을 둘러싸고 있는 내외적인 환경 때문인데요. 부모들도 아이들이 농사짓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물론 학생들도 의지를 가지고 온 경우가 드물어요. 농업에 대한 뜻이 있어서 온 경우가 5%도 안 됩니다. 그 비율을 늘리고 그 청소년들을 어떻게 하면 농업인으로 키우느냐, 그게 교육입니다. 선생님들도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게 참된 교육이죠.”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은 대다수 4-H운동본부 회원입니까. 어떤 활동을 합니까.

“농고 학생 회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 동아리 형태로 돼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고 있습니다. 올해는 군 단위로 ‘4H 구락부 연구회’를 만들 예정입니다. 농업경영, 유통, 마케팅 등의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 리더로 키우려고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 생명체에 대한 사랑, 즉 자연과 하나되는 마음을 수양하는 거죠.”

-농민운동, 농업 교육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평생을 농업과 함께 했는지, 궁금합니다.

“흙을 밟고 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행복이죠. 돈을 벌기 위해 농업을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귀농=돈’이라고 유인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 돈 버는 사람도 없고요. 농업을 통해 땅에 대한 기쁨과 행복감 등을 느끼는 게 중요하죠. ‘김준기’도 4-H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마무리 짓고 귀농할 예정입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야죠.”

“한미 FTA 등 개방이 농업 몰락 원인”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농촌에 대한 이중성을 드러냈습니다. 관념 속에 대상이지 거주공간으로는 상당히 싫어하는, 2011년 현재 농촌의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한국 영세 소농들은 거의 몰락한 상태입니다. 실제 농촌의 공동화·고령화가 만연돼 있고요. 그 원인은 고도성장중심의 경제정책을 펴면서 노동자가 희생됐기 때문이죠. 또 한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습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세계화의 그늘 속에 (농업이) 종속되면서 농업뿐 아니라 민중들의 삶이 어려워진 거죠. 그러면서 농민운동도 점차 위축됐고 농촌의 구조적인 문제는 점차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전 <미국 수입 압력>에 대한 토론회에서 내가 그랬어요. ‘한국 농민은 늙은 창녀의 신세’라고. 과거 건강했을 때는 몸을 팔아먹고 살지만 늙어서는 팔아먹을 것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민의 신세는 구제역 사태로 인해 생매장되고 있는 소의 운명과 같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YS정권의 세계화 이후 DJ부터 MB정권까지 신자유주의에 의한 개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해방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 차관 도입 등도 한국 농업 몰락의 원인이지만, 결정적인 것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UR)부터 한미 FTA 등 개방정책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장개방을 확대하고 더 많은 시장을 추구한 것이 농촌에는 위기가 된 셈이죠. 한미, 한-EU FTA를 막지 못하면 한국 농업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를 막아내야 합니다.”

-민주당부터 진보신당까지 범야권은 반(反)한미 FTA 전선을 짜고 있습니다. 이들의 대응은 필수불가결한 건가요.

“한미 FTA 비준을 놓고 진보개혁진영이 반FTA 전선을 펼치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는 재협상 비준은 현실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농업인들이 준비해야 될 부분은 없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 농민들의 주체역량이 부족합니다. 농민들의 대체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하죠. 정부가 나서서 농업을 살려야 하는데 정부차원의 대안이 전혀 없습니다. 장기적은 물론 단기적 대안도 전무합니다. 근데 MB정부는 어떻습니까. 대안이라는 것인 ‘쌀 먹기 운동’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자연과 함께 살 수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에 대한 적신호가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식량 수급도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 지난달 14일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 식량위기 시대의 신(新)식량안보 전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식량 자급률 중 곡물 자급률은 불과 26.7%에 그치며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최근 국회 상임위에서 농협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신경분리를 골자로 하고 있는데, 농민단체는 반발하고 있지만 보수언론과 국민들은 농협을 개혁의 대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농협법 개정안은 개혁인가요, 개악인가요.

“농협법 개정안은 외국 자본에 농협을 예속시키는 ‘농협 해체론’입니다. 농촌문제와 관련해 유일하게 외국 자본에 대한 방어역할을 할 수 있는, 또 금융기관 중 유일한 민족자본은 농협뿐입니다. 정치권에서 농협의 신경분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농협이 신용지주회사가 되면 외국 자본이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외국의 독점 자본이 한국의 은행을 장악할 수밖에 없죠. 농협 개혁을 하려면 농민이 주도해야지, 국가가 하면 안 됩니다.”

지난 4일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는 신용사업(금융)과 경제사업(농축산물 유통 등)의 분리를 골자로 하는 농협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농협법 개정안은 ‘1중앙회-2지주회사’로의 개편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즉각 “농협법 개정안은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잘못된 신경분리는 농협과 농민, 노동자 모두에게 독이 되는 개악”이라고 전국농민회총연맹(이광석 의장)은 “농민의 염원과 요구는 무시한 채 금융지주회사를 만들어 대형투자은행을 만들겠다는 개악안”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민주개혁정권인 DJ-노무현 정권과 보수정권인 MB정권의 농업정책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진보지식들은 낙제점에 가까운 평가를 내렸는데요.

“DJ-노무현 정권은 농업 철학이 없었습니다. 실효성이나 장기적인 정책이 거의 없었죠. MB정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남한에 쌀이 남아돌고 있는데, 북한에 좀 주면 안 됩니까. 쌀이 남아도니까 기껏 한다는 게 논에 벼 심지 말고 사료작물을 심으라는 소리만 합니다. 그동안 사료작물을 심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사료작물 값 자체도 싸고 외국작물의 수입으로 인해 값이 저가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식량 문제에 대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은 세우지 않고, 참 큰일입니다.”

-농업위기 상황에서 농민들의 정치세력화 문제가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가능할까요.

“아직 어렵습니다. 농촌 내부에도 기업농, 규모농 등 부자농과 소농간 소득 격차가 심합니다. 농민세력 간에 도 분화가 돼 있다는 거죠. 소득불균형으로 인해 농민들의 의식이 자본 논리에 빠져있습니다. 내가 물어봐요. 닭 키우는 사람에게 ‘당신은 양계업자입니까, 앙계 농사꾼입니까’라고. 그러면 대게 양계업자라고 대답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양계업을 한다고 합니다. 근데 원래 농민은 닭하고 함께 사는 겁니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생 공존하는, 농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요.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아파하는지 읽을 줄 모르면서, 말로만 국민들하고 함께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70년대 ‘난민촌 성남’의 해방구 꿈꿨다”

-정치판을 완전히 떠난 겁니까. 농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복귀 의향은 없으신지요.

“사람 농사짓는 일에만 전념해야죠.(웃음) 내가 1980년대부터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었는데, 여전히 농민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농민의 주체 역량이 부족해요. 그래서 진보정당으로 가서 농민세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추후에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정치참여를 할 의향은 없으신가요. 지금은 청소년의 올바른 가치를 위한 참된 농업 교육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2002년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경기지사 후보로 출마한 것도 농민의 정체세력화 연장선상에 있었습니까.

“성남에서 1976년도부터 대학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성남은 난민촌 도시였어요. 성남만이라도 지방 자치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일종의 해방구 같은. 그래서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기존 세력들로는 역량이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결국 청소년이 중심이 된 성남 YMCA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었죠.”

-원래 제도권 정치권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였습니까. 정치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난 원래 제도권 정치권에 들어가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출마해봐야 (당선) 가능성도 없고 가능성만 있다면야 정치인생을 걸었을지 모르죠. 민노당 이전에 민중당이 있었고 민중당 전에 민중의 당이 있었는데, 그 민중의 당 창당시절 공동대표를 맡았습니다. 근데, 단 한 사람도 당선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정치이념이 좋아도 민중의 지지 기반이 없으면 정치세력화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됐죠.

이후 민중당 창당 과정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지만 일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참여했다면 후배인 이재오 특임장관 김문수 경기지사 등과 함께 정치를 했겠죠. 민중당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재오 김문수 등은 모두 한나라당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결국 민노당으로 가서 농민들의 힘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벌써 9년 전일이지만 민노당 배지를 달고 경기지사에 출마한 그때를 회고하신다면, 어떻습니까.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성남에 있는 제자들이 도지사 출마를 계속 권유했어요. 난 계속 거절했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선거공간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중 속으로 들어가서 대중을 깨우치는, 일종의 대중교육화를 생각한 거죠. 또 민노당을 좀 더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근데 아쉬운 점은 지금도 그렇지만 NL(National Liberty)과 PD(People’s Democratic)간 갈등으로 당 통합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어요. 한 달 내로 경기도 내 진보세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진보후보 추대위원회의 창설을 말이죠. 결국 추대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그 때는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선거판 속으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범 진보진영 후보로 출마했지만 결국 기득권 세력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당시 선거구호가 ‘미군기지 없는 경기도를 만들자’였습니다. 미군기지반환운동을 중심으로 선거투쟁에 집중했는데, 사실 선거구호로는 맞지 않았죠. 당시 동두천 포천 파주 등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은 미군기지가 나가면 우리는 뭐 먹고 사느냐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유권자들의 지지기반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죠. 근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내가 여중생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광화문 촛불시위까지 이어지게 됐죠.”

“민노-진보신당, NL-PD 싸움 끝내야”

-2002년 당시도 진보진영 내 NL-PD 갈등이 심했다고 했는데, 아직도 양당 진영 내부에서는 갈등의 골이 존재합니다.

“2002년 당시도 NL-PD 갈등이 있었지만 사실 정파 논쟁은 그 이전부터 뿌리가 깊었어요. 내가 제일 고민했던 게 NL-PD 갈등의 종결이었습니다. 비적대적 관계인 NL-PD의 갈등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때 진보진영의 핵심관계자들을 전부 불러서 토론회를 했는데, 그때 내가 그 사람들한테 나는 ‘NLPDR’이라고 습니다. 여기서 R은 Revolution(혁명)의 약자인데 NL과 PD 측에 각각의 논리적인 모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랬더니 NL들은 나보고 PD라고 하고 또 PD는 나보고 NL이라며 비판을 가하더라고요.”

NL(민족자주파)와 PD(민중민주파)는 과거 운동권의 양대 산맥이었다. NL은 대한민국의 모순을 분단체제로, PD는 자본주의 계급가에게 그 원인을 찾는다. 때문에 NL은 주로 통일운동에 주력하고 있는 반면 PD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강조한다.

-그때 민족자주파와 민중민주파에게 어떤 조언을 했습니까.

“마오의 모순론 등을 설파하면서 우리 사회 내부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때로는 계급문제가, 또 때로는 민족문제가 우선시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NL-PD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민족문제, 계급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고도의 전략전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근데 지금까지도 비적대적인 관계인데, 적이 돼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민노당 시절 NL-PD 중 한쪽으로 입장을 대변한 적은 없었습니까.

“(단호하게)NL-PD 중 한 쪽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2002년 경기지사 출마 당시 경기도에는 NL계열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PD에 대한 아쉬운 점은 있었죠. 민노당 소속으로 선거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노조 등 PD계열은 (선거운동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밤마다 노조에 찾아갔어요. 나를 지지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NL-PD 등 정파적 문제를 또 지적한 거죠.”

-당시 민노당 내 농민의 정치세력화 현실은 어땠습니까.

 ▲DJ나 노무현 정권은 농업에 대한 철학이 없었다고 김 회장은 주장했다
“(낙선 뒤) 민노당에서 내가 해야 될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신념대로 민노당에 농민운동 세력을 접목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당에 농촌살리기운동본부를 만들었고 그때 농민세력이 들어왔습니다.

그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입니다. 또 2003∼2004년도에 당기위원회를 맡아 정파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했죠. 근데 회부되는 것을 보니까 전부 NL-PD간 싸움의 갈등선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조정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당에서 할 역할은 당원에 대한 재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연수원장을 맡으려고 했는데, 내부문제로 무산됐죠.

고문으로 있던 당시인 2006년 이렇게 NL-PD 갈등이 심하면 고문들이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서 ‘탈당이냐, 잔류냐’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굳이 논의를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탈당을) 결정을 하자고 했습니다. 내가 탈당하면서 다른 고문들도 다 탈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죠.”

“민노당 분당, 노회찬-심상정 책임 더 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노당은 두 당으로 분당됐습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노회찬-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가 탈당한 것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민노당에서 분파된 진보신당 측에 더 많은 책임이 있죠. NL-PD을 떠나서 노동자, 민중 등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더 강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탈당했잖아요. 그건 잘못이죠.”

-당내 민중민주파가 탈당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종북주의였습니다. 책임론 이전에 진보진영의 종북주의 논쟁은 어떻게 보십니까.

“종북주의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통일문제는 우리들의 절실한 문제 아닙니까. 우리 민족의 문제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통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문에 종북주의라는 논리에 매어있어서는 안됩니다. 민족과 계급문제를 동시에 볼 줄 아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민중 민족 문제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정파 간 싸울 일이 없죠.”

올해 안 진보대통합을 선언한 민노당과 진보신당 간 정파적 헤게모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북한이 3대 세습을 완성한 이후 <경향신문>이 북에 침묵하는 민노당을 비판하자 이정희 대표가 “북의 3대세습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노당의 판단이다. 법정 안 국보법 논리가 진보언론에 들어왔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자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가 인터넷 매체인 <프레시안>을 통해 ‘北 세습비판은 공안논리이고 오리엔탈리즘인가’라는 공개서한을 보내며 이 대표 논리를 반박하는 등 종북주의 논란이 재점화됐다.

-진보양당 간 정파적 헤게모니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다시 정치권으로 갈 생각은 없으신지요.

“없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 내 진보세력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DJ-노무현 정부 때 진보진영이 조금 성장했다고 하지만, DJ은 신자유주의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 FTA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그건 타협이 아니죠. 다만 문제에 대한 본질의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재야민주세력이 분열돼 결국 MB정부에게 정권을 내준 것이 아니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범 진보진영이 연합해 보수세력에 맞서야 합니다.”

-민노당은 2004년 첫 원내진입으로 돌풍을 일으킨 뒤 한때 13%대의 지지율을 받으며 대안정당으로 자리 잡았지만 결국 2006년, 2007년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단지 보수기득권 세력 때문인가요.

“보수기득권 세력의 벽을 치고 나갈 수 있는, 주체역량이 현재 진보정당에 없습니다. 그것을 넘기 위해서는 대중과 함께 살아야하는데, 대중과 유리돼 있어요. 내가 성남 진보진영 쪽 사람들에게 항상 그런 얘기를 합니다.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고. 근데 대중과 함께 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지 않은 채 말로만 노동자 농민과 함께 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대중적 지지를 못 받는 거죠. 야권공동정부 등 진보개혁진영이 조직을 통해 점차 지지기반을 넓혀야합니다. 근데 얄팍한 전술을 통해서만 뭘 해보려는 태도가 있어요.”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올해 안으로 진보대통합을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합당 당위성에 긍정하십니까.

“진보양당이 (통합을) 한다고 하는데, 그건 물리적 통합에 그칠 공산이 큽니다. 물리적 통합은 언제든지 깨질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화학적 통합을 해야죠.”

-유기적 조직을 위해서 NL-PD 간 정파의 해체가 필요합니까.

“그렇죠. NL-PD들이 서로 상대방의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죠. NL-PD, 양쪽 모두 옳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줘야지 대중들이 신뢰를 할 게 아닙니까.”

-민노당은 민노-진보-민노총을, 진보신당은 사회당 등까지 포함된 범 진보진영의 합당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보대통합의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민노-진보신당에서는 민주당 등을 진보로 안보죠. 근데 그런 논리로 싸우다보면 상호간에 벽이 생기잖아요. 2012년 총·대선은 반MB전선으로 범 진보개혁세력이 하나가 돼야 합니다. 반MB전선을 두고 각 진영이 힘을 합치지 않고 각 정파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면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죠. 진보개혁진영들이 자기 혁신을 해야 합니다. 민족-계급 문제 중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싸우지 말고 전략 전술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우선순위를 세워야합니다.”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는 민노당 시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샛강이고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은 한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민주당 세력과 손을 잡는 게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정치를 하면 안 됩니다. 대중정서에 대한 진정성을 유지해야죠. 지난해 6·2지방선거 결과를 보세요. 노회찬 전 대표는 결국 낙선했잖아요. 또 심상정 전 대표가 당시 유시민 국민참여당 경기지사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니까 당 차원에서 징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경직된 사고는 안 됩니다.”

-진보신당 내 독자파들은 아직도 민노당과의 통합을 ‘도로 민노당’이라며 강한 반발을 하고 있습니다.

“진보신당이 독자노선을 걷는다고 정치적 기반이 확대되는 게 아닙니다.”

-범 진보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했는데, 통합과 선거연대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통합은 어렵고 유기적 관계를 통한 선거연대가 현실적입니다.”

-노회찬 전 대표는 가설정당을 통한 선거연합을 주장했는데 어떻게 생각하깁니까.

“선거가 가까이 오면 선거연대가 가시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에 통합은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진보진영의 과제나 전망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실상 반MB전선을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당면과제죠. 하나로 뭉쳐야합니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4·27 재보선에 야당이 한 번 혼 좀 나봐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지난해 지방선거 결과처럼 야권이 어느 정도 성과를 얻는다면 또다시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반MB전선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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