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미완의 개혁가 정조와 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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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미완의 개혁가 정조와 YS
  • 윤명철 논설위원
  • 승인 2018.11.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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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라 조선과 新한국을 꿈꾸던 두 개혁가의 삶.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윤명철 논설위원)  

▲ 새나라 조선을 꿈꾸던 정조와 新한국을 꿈꾸던 YS의 미완의 개혁은 역사에 있어 늘 아쉬움을 낳는다. ⓒ시사오늘 그래픽=김승종

정조는 미완의 개혁가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했다. 국난을 정쟁의 무대로 삼은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데 몰두했다. 

동인과 서인은 임진왜란을 예측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정쟁으로 놓쳐 온 국토를 피로 물들게 했다. 또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 내쫓고 급변하는 명·청 교체기의 국제정세를 고리타분한 대의명분과 의리론으로 대응해 삼전도의 치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과 남인은 예송논쟁과 환국을 거치며 처참한 정치보복을 주고받았다. 게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면서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정치 희생양으로 비명횡사했다. 

정조의 세손 시절은 언제나 불안했다. 집권층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그 옛날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하겠다며 펼친 갑자사화의 악몽을 재현할까봐 두려워했다. 정조는 잦은 암살시도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집권 이후의 조선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자신이 집권할 때까지 반대세력을 안심시키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물론 영조의 적극적인 후원도 있었지만 정조는 자신의 시대를 기다렸다. 

드디어 정조가 집권했다. 제일 먼저 자신을 위협하던 외척과 환관세력을 전광석화처럼 척결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하지만 정조의 조치는 정치보복의 차원을 뛰어넘는 탕평의 전형이다. 

조선은 인재가 필요했다. 정조는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었다. 노론, 소론 일부와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됐던 남인 등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다. 한 마디로 인사 혁신을 통한 정치 개혁에 나선 것이다. 

인재가 모였으니 이들의 능력을 펼칠 무대가 필요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신설해 정책 자문 기구로 삼았다.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도 인재를 발굴했다. 특히 유득공과 같은 서얼 출신들도 능력만 있다면 신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용했다. 신분제의 완화로 조선의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군 개혁도 착수했다. 자신의 왕권을 보호해줄 장용영을 설치해 강군 양성에 나섰다. 언제나 반정부세력은 군사 행동을 통해 정변을 일으킨다는 교훈에서 나온 조치다. 

정조는 개혁 정치의 중심지로 화성(현재의 수원)을 선택했다. 조선의 아리스토텔레스인 정약용을 전격 기용해 화성 건설의 중책을 맡겼다. 정약용은 정조의 기대에 부응해 거중기를 활용해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화성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창출했다. 

정조는 시전상인의 경제력 독점도 혁파했다. 이른바 ‘신해통공’을 통해 시전상인의 특권을 없애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조선 상공업의 부흥이 시작됐다. 

하지만 정조는 급사했다. 그가 꿈꾸던 조선의 개혁 시계도 멈췄다. 후일 역사는 정조가 펼친 탕평정치에 대해서 붕당 간의 대립을 완화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또 정치권력의 독점을 피하려 했지만 정조와 일부 측근에 집중돼, 정조 사후 조선의 망국을 이끈 적폐정치인 세도 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각오로 신구(新舊) 군부세력의 결합체인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에 참여해 민자당을 창당했다. 

YS는 5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권력을 독점한 군부세력이 득실거리는 민자당내에서 소수파 민주계를 이끌고 평생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했다. YS는 특유의 정면 돌파를 통해 갖은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정계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 집권에 성공한다. 

구(舊) 민정계와 신군부는 YS와의 타협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줄 알았다. 하지만 YS는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신군부의 상징인 ‘하나회’를 단숨에 척결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광석화와 같은 인사조치였다. 또 기득권 세력의 돈줄을 차단하고 금융계의 혁신을 위한 ‘금융실명제’를 단행했다. 대한민국 금융의 투명성이 생명력을 얻었다. 

YS는 정치 신인 발굴에도 총력을 다했다. 지난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은 보수 정치권 정치신인들의 등용문이 됐다. 과거 좌파 운동권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김문수, 이재오와 같은 인물들이 합류했다. 또 현재 보수 정치권의 거물이 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이때 영입했다. 

15대 총선은 YS의 동물적인 정치감각이 이끈 선거의 백미로 손꼽인다. 자신을 반대하던 인물들을 전격 등용해 보수 여당 사상 최초로 서울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YS가 꿈꾸던 개혁은 거기까지였다. 지역주의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서서히 지지율이 무너져 내렸다. 권력을 독점한 상도동계와 잦은 갈등을 빚던 JP가 당을 뛰쳐나가 유신잔재세력과 군부세력을 규합한 후, 자민련을 창당하자 충청권을 잃었다. 보수정치권의 균열이 발생했다. 또 정권 말기에는 급변하는 국제 경제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 사상 초유의 IMF체제를 초래했다. 

하지만 YS는 하나회 척결로 군부 엘리트의 정치 개입을 원천 차단해 제도적 민주주의를 마련했고, 금융실명제 실시로 글로벌 금융체계 확립의 토대를 구축했다. 현재 보수권이 지리멸렬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거의 YS에 의해 양성된 정치인들이다. 

새나라 조선을 꿈꾸던 정조와 新한국을 꿈꾸던 YS의 미완의 개혁은 역사에 있어 늘 아쉬움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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