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회관] YS와 DJ, ‘명승부’ 펼쳐진 그 곳
스크롤 이동 상태바
[서울시민회관] YS와 DJ, ‘명승부’ 펼쳐진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12.05 17: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크고 작은 문화행사 열렸던 서울시민회관…화재로 전소된 후 세종문화회관 세워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화재로 전소되기 전 서울시민회관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와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는 초조하게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신민당 소속으로 나설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날이었다.

표정에 좀 더 여유가 있는 쪽은 YS였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바람을 일으킨 그는, 당수(黨首)였던 유진산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경선에 나선 상태였다. 여기에 ‘유진산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이철승계도 YS에게 표를 던지기로 돼있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유진산 당수는 중앙상위에서 71년 선거에 내세울 동당(同黨)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 씨를 추천, 거당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따라 29일 지명대회에서의 후보 경쟁 양상은 40대 후보 중의 한 사람인 김대중 씨가 독자적으로 출마를 계속 고집하는 한 그와 김영삼 씨와의 표 대결로 압축되나, 별다른 정세 변동이 없는 한 김영삼 씨의 지명 획득이 확실시되고 있다. (중략) 이날 유 당수의 추천에서 탈락된 이철승 씨는 그가 이미 유 당수에게 서면으로 서약한 대로 추천된 김영삼 씨를 지지할 것을 명백히 했다.
1970년 9월 28일자 〈동아일보〉 ‘신민후보에 김영삼 씨 추천’』

대의원 40%를 확보하고 있던 범(汎)유진산계와 제2계파였던 이재형계, 심지어 경쟁자였던 이철승계로부터도 지원을 약속받은 YS는 미리 후보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전당대회 분위기는 YS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상황을 낙관하던 YS와 달리, 전날 밤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표를 모은 DJ의 노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1차 투표 결과, 총 투표자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기타 4표입니다. 김영삼 후보가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수가 되지 않아 결선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 서울시민회관은 1972년 12월 2일 대형 화재사고로 불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역사박물관

YS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상대로라면, 1차 투표에서 승부가 결정돼야 했다. YS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YS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대의원들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하는 것뿐이었다.

반면 DJ는 ‘아무리 잘해도 결선 투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짧은 시간과는 관계없이 다음 계획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었다. DJ는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발 빠르게 이철승과 접촉, 이번에 자신을 도와주면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다.

“2차 투표 결과, 총 투표자 884표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기타 16표로 김대중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됐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역전극이었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YS조차도 충격을 감출 수 없는 결과였다. 그도 그럴 것이, YS의 패배는 이재형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과 이철승의 배신이 합쳐진 것이라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실제로 이재형은 나중에 YS와 만나 “박정희 정권이 세무조사 등 협박을 해 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 서울시민회관 자리에는 현재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 있다. ⓒ시사오늘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에 22표 모자랐다. 2차 투표에 들어갔는데, 이철승 표가 몽땅 DJ에게 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가 났을 때, 김동영과 나는 단상에 다리가 붙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YS는 곧바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단상으로 올라가 당원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입니다. 나는 김대중 씨를 위해 거제도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회자(膾炙)되는 역사적인 명승부는 이렇게 끝났다. YS의 압도적 우세, DJ의 전략과 노력이 낳은 대역전극,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정도의 충격적인 패배에도 ‘쿨’하게 승복하고 DJ의 당선을 위해 전력을 다한 YS의 신의(信義)가 합쳐진 명장면이었다.

한편, 이 명승부가 펼쳐졌던 서울시민회관은 1961년에 준공돼 각종 공연과 정부 행사의 단골 개최 장소로 기능해 왔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 취임식이 열렸던 곳도 이곳이었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이미자·패티 김·윤복희·조영남·남진·나훈아 등의 공연도 개최됐으며, 1969년에는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공연도 서울시민회관에서 이뤄졌다. 

▲ 현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 벽면 곳곳에는 박쥐 문양의 장식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더 이상 불이 나지 말라는 기원의 의미라고 한다. ⓒ세종문화회관 공식 블로그

그러나 1972년 12월 2일,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나면서 서울시민회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이 끝난 후, 52명이 숨지고 76명이 다치는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2일 밤 8시27분경 서울 종로구 세종로 81 서울시민회관에서 쇼를 본 관객이 공연이 끝나 밖으로 나오고 있을 무렵 불이 나 연건평 3432평(지하1층 지상10층) 중 소강당을 제외한 3000여 평을 모두 태우고 2시간 만에 진화, 미처 탈출해 나오지 못한 52명이 질식 또는 소사하고 76명이 상처를 입는 참사를 빚었다.
서울계엄사무소는 시민회관 화재사건의 화인을 무대조명장식의 불비로 인한 전기 과열로 합선이 돼 일어난 것이라고 발표했다. (후략)
1972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시민회관 전소 52명 사망 76명 부상’』

이 사고로 서울시민회관은 전소(全燒)됐고, 1978년 4월 이 자리에 다시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현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 벽면 곳곳에는 박쥐 문양의 장식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더 이상 불이 나지 말라는 기원의 의미다. 세종문화회관 홍보팀에 따르면, 한국 고전에 박쥐는 복을 주고 화재를 막아주는 영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