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피아노와 이빨’ 윤효간, “젊은 날의 방황·가출이 1800회 공연 밑거름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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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피아노와 이빨’ 윤효간, “젊은 날의 방황·가출이 1800회 공연 밑거름 됐죠”
  • 김기범 기자
  • 승인 2018.12.24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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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부산 ‘UN성냥’ 회사 운영… 7살 때부터 피아노 쳐
“틀에 박힌 인생 살기 싫다”… 중학생 시절 가출 밥먹듯
“공연 중간 이빨 푸는 건 ‘정답없는 인생’ 전하고 싶어서”
역사·피규어 결합한 새로운 공연 도전해 보고 싶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기범 기자) 

▲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윤효간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네, 제가 윤효간입니다.”

매서운 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2월 중순 어느 아침에 만난 그의 모습은 솔직히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서울 서촌 통인시장 골목을 나오자마자 마주친 가게 셔터 문을 올리는 평범한 중년 남자 모습이었다

윤효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공식 직함이지만 그의 지인들에겐 공연기획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아니 그보단 ‘나눔의 피아니스트’, ‘음악혁명가’, ‘피아노와 이빨’로 설명된다. 지금은 ‘히스토리&'이라는 기획사 대표직까지 얹혀졌다. 평범치 않은 이들이 모인다는 예술계에서도 이단아 인생을 살았음이 쉬이 짐작됐다.

궁금증이 밀려왔다. 왜 이리 사는지 그리고 대체 누구인지.

오전 10시가 지난 시각, 이제 막 문을 연 2평 남짓 점방에서 그렇게 인터뷰는 시작됐다.

가게라기 보단 조그만 공간이었다. 한 가운데 놓여진 작은 탁자와 건반 주변엔 피규어(figure)들이 촘촘히 쌓여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크고 작은 캐릭터 모형들. 족히 천 점은 넘어 보였다.

“어릴 때부터 30년 넘게 모아온 피규어들이에요. 팔기도 하지만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매개로 쓰려구요.”

윤 대표는 내년부터 캄보디아·라오스에서 피규어 전시회를 연다고 했다. 현지 저소득층 난민을 위해 기존 포스터 전시회에 피규어를 융합한 개념이다. 어릴 때부터 역사와 문화를 좋아했던 그가 히스토리&을 통해 기업과 지자체의 포스터전을 기획하고 실행한지는 5년이 지났다. 지난 11월 세종대왕 즉위 600년을 기념해 600개 포스터를 광화문 광장에서 전시한 ‘세종대왕 600 포스터전’은 그 절정이었다. 

“문화소외 지역에서 공연하다 우리 역사를 함께 전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디자인 그룹과 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쉽게 알리는 데엔 포스터가 제격입니다. 내년부턴 전국 투어와 해외 투어까지 할 계획이에요.” 

▲ 윤효간은 삶을 거친 오르막길을 오르는 여정에 비유했다. 정상에 가면 꽃밭이 보일 거라 생각하지만 정작 올라가면 또 다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고 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일개 음악인에게 포스터와 피규어 전시회는 분명 색다른 모습이다. 삶의 궤적이 더욱 궁금해졌다.

윤 대표 선친은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부산 ‘UN성냥’ 사장이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에게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그 아들은 자신이 좋아했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엔 피아노가 있었다. 전형적인 유복한 집안 ‘막내 도련님’의 삶이었다. 다만, 방황이 너무 일찍 시작됐다.

“7살 때 피아노를 배우던 한 소년이 10살 때 비틀즈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피아노를 무조건 악보대로 쳐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피아노만 치던 소년에게 팝과 락 음악은 클래식에서 못 느낀 자유를 선사했다. 이후 누가 정해준 방법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모님 일생을 바라보게 됐어요. 내 생각엔 그다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은 아니었죠. 부모님이 제시한 미래가 내게 맞을지도 모르는 거고. 내 스타일대로 가자고 결심했어요.”

결국 중학교 때 시작된 가출은 17살 상경으로 이어졌다. 나이트클럽 피아노 악사 생활이 시작됐다. 나만의 생각과 의지가 있으면 언젠간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대신 아버지와의 불화가 지속됐다.

“집안 가세는 기울고 아버지와는 왕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당신이 바라는 코스대로 살지 않아 늘 아쉬워 하셨죠. 5년 전 아버지가 ‘아들이지만 수고했고 존경스럽다’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어요. 그게 아버지와의 화해였어요.”

물론 어린 나이에 가발을 쓰고 시작한 밤무대 연주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달픈 삶 속에서 오히려 음악 내공은 더 깊어졌다. 틈틈이 작곡 공부까지 병행했다. 장르와 영역을 아울러 실력이 쌓여갔다.

그 실력은 KBS 관현악단에 들어가게 된 발판이 됐다. 13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KBS 관현악단엔 명문 음대 출신뿐이었다. 하지만 윤 대표의 고졸 학력은 현장에서 쌓은 실력 앞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외로웠죠. 재능이 있더라도 단체에선 융합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맡은 역할에 충실했고 조직에 인간적으로 녹아들었죠.”

그러나 윤 대표 인생의 유일한 조직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열린 음악회> 등 KBS 간판 프로에서 활동했던 그는 30대 초반의 세션맨과 편곡자로 바뀌었다. 또 다른 변신은 고액 연봉을 버는 안정적 생활을 보장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미술가, 음악가와 교류하는 영적 교감의 시기가 계속됐다.

“패티킴, 이미자, 윤미래 등 당대 최고 가수들과 만났죠. 탑 클래스 세션맨으로 자리를 굳혔던 시절도 이 때였어요.”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할 법 했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많은 돈을 벌던 시기였지만 40대 초반 문득 회의와 갈등이 몰려왔어요.”

그의 인생 내내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일상에서의 탈피’ 욕구였다. 나이 마흔에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이 때 ‘윤효간 밴드’와 기획사도 만들었다.

윤효간을 상징하는 피아노 솔로 콘서트 ‘피아노와 이빨’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2005년이었다.

피아노와 이빨.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소위 ‘이빨 깐다’는 말이 있잖아요? 단순한 피아노 콘서트가 아니라 삶의 주제를 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무대를 꾸몄어요. 게다가 피아노 같은 클래식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있어 문턱을 낮춰야 할 필요가 있었고. 콘서트 제목부터 격을 낮춰야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예술을 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저 지치고 힘든 이들을 위로하고 삶의 대화를 나누고자 기획된 ‘찾아가는 콘서트’ 피아노와 이빨은 그 후 1800회 공연 기록을 세웠다. 소극장에서 시작된 콘서트는 국립극장에서의 1000번째 공연으로 이어졌다. 진짜 격식을 파괴한 셈이다.

“처음엔 100번만 하자고 했죠. 100번 이후엔 많은 일들이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근데 아무 반향이 없더라고요. 결국 1000회를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피아노와 이빨은 비틀즈의 <헤이 쥬드>(Hey Jude)로 시작해 <이매진>(Imagine)으로 끝난다고 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존 레논에 대한 경외심이다.

그리고 또 있다. ‘어머니와 엄마’를 주제로 한 동요와 메시지를 콘서트에 삽입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 윤효간(왼쪽)은 유지유인영 포스터전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오른쪽)과 각종 사업을 기획·시행하고 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꿈과 미래를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지만 그만큼 부모님께 회한이 남아 있습니다. 죄송하죠. 그러나 그때 가출을 안했다면 꿈은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다는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담대하게 받아들였으면 해요. 잃는 게 잃는 게 아니에요.”

피아노와 이빨은 사재는 물론 대기업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버텨왔지만 비용 문제는 늘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럼에도 지속하게 된 힘은 무엇이었을까.

“가끔 11시 방향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있어요. 그때마다 그만둘 수 없는 뭔가가 있더라고요.”

피아노와 이빨은 기업, 학교, 군부대를 비롯해 해외로까지 나아갔다. 소통이 있는 피아노 콘서트는 매회 다른 내용으로 채워졌고 결국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까지 섰다.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공연은 중국 시골 마을에서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중국 쓰촨성에서 구호품을 전달하고 공연을 했을 때 현장의 1000여 명 학생들이 수화로 고마움을 표시하더라고요. 그때가 제일 감동이었습니다.”

결국 윤 대표가 제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들은 이 세상의 미래 세대가 아닐까.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해요. 목표 자체가 대학입시인 주입식의 수동적 체제를 내려놓고 가정은 멀리 볼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유교 사상이 많이 남아 있어 그런지 하던 대로 해야 한다는 관념이 아직도 많아요. 각자 새로운 미래를 열고 싶으면 내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해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악하고 핸디캡을 장점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어쩌면 너무 뻔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성이 묻어났다. 당신이 생각하는 삶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갈무리하고 싶었다.

“살아보니 거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여정 같더라고요. 올라가다 보니 중간 중간 들꽃이 보이고. 그 꽃들을 좇아 정상에 오르면 꽃밭이 보일 거라 생각하는데 정작 올라가면 또 다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죠.”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접어든 통인시장 골목길은 그날따라 스산했다. 대설(大雪)이 지나고 찾아온 매서운 추위 탓이었다.

을씨년스러운 서촌 겨울바람에 옷깃은 여몄지만 그래도 작은 점포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

담당업무 : 에너지,물류,공기업,문화를 담당합니다.
좌우명 : 파천황 (破天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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