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공원] ‘박정희 영구집권 음모’ 폭로했던 그 곳
[장충단공원] ‘박정희 영구집권 음모’ 폭로했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1.09 17: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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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vs. 김대중 맞대결 펼쳐진 1971년 대선…수십만 명 청중 운집했던 장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을 펼쳤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現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가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를 꺾고 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 후보로 지명됐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거둔 DJ는, 그 여세를 몰아 대선을 뜨겁게 달궜다. (관련기사 - [서울시민회관] YS와 DJ, ‘명승부’ 펼쳐진 그 곳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061)

‘10년세도 썩은정치 못참겠다 갈아치자!’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온 DJ는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어찌나 가는 곳마다 구름 인파를 몰고 다녔는지, 유세에 몰린 인파가 보도되지 않도록 중앙정보부가 언론을 통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똑똑하고 말 잘하는’ DJ에 대한 입소문은 날이 갈수록 세간의 화젯거리가 됐고,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야당 추산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이는 기염을 토했다.

여담이지만, 이때 장충단공원 유세에 모인 청중 수는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됐던 것 같다. 장충단공원 유세 다음날인 1971년 4월 19일 <동아일보>는 ‘인산의 청중 실수와 허수 – 본사 유세 보도와 산출근거’라는 기사를 통해 주최 측이 주장한 100만 명이 아니라 30만여 명이 실제 청중 수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 <동아일보>는 정확한 청중 수를 산출하기 위해 측량사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전략) 18일 장충공원에서의 신민당 김대중 후보 유세 청중 수를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산출해내기 위해서 본사에서는 유세 하루 전 17일 공인측량사 2명을 고용하여 현지를 답사, 유세장 주변 연사의 목소리를 마이크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가청지역면적을 실측케 했다. 실측결과 별첨 약도에 명시된 바와 같이 ABCDE 등 14개 지역으로 구분, 각 지역별 면적을 3000분의 1 축도 작성, 각 지역을 구분해서 연단을 중심하여 청중이 모이는 상황을 세분 측정케 했다. 실측 결과 장충공원용지 총면적은 22만평이나 강연장 주변 청중 수용가능면적은 5만8000평으로 추산됐다.
각 지역별로 2, 3명의 기자를 분담케 하여 강연 전후, 그리고 청중이 가장 많이 모였던 시간 오후 3시경을 정점으로 하여 본사에서 오래 전에 실측에 의해 산출된 평당 청중 수를 적용, 실수를 산출키로 했다.
이날의 경우 지역 연단이 있는 회장 중심부는 총 2만3250평인데 그 중 C, B지역에 인접한 부분에 청중이 들어차 있지 않은 점을 계산에 넣어 A지역은 5분의 4가 청중이 찬 것으로 보고 평당 8명으로 계산하여 8만4800명으로 산출하고 C지역은 5분의 4가 찬 것으로 보아 평당 7명으로 계산, 4만3288명, D지역은 평당 7명으로 계산하여 1만1340명, 이렇게 하여 별표와 같은 내용으로 각 지역을 산출하여 결국 33만4028명이란 총계가 나온 것이다. (후략)
1971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인산의 청중 실수와 허수 – 본사 유세 보도와 산출근거’』

▲ 1967년 4월 27일에 찍힌 장충단공원의 전경. 멀리 장충체육관의 모습도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어쨌든 수십만 명의 청중이 모인 이 자리에서 DJ는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며 “공화당은 지난 개헌 때 이미 박정희 씨를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대통령을 시키려고 했으나, 그 당시는 아직 자기 공화당 내부나 야당이나 국민이나 거기까지는 할 수 없어서 못했던 것”이라고 공세를 펼쳤다.

그러면서 “나는 공화당이 그런 계획을 했다는 사실과 이번에 박정희 씨가 승리 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시대가 온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며 자신이 선거에서 승리해야 영구 집권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 선거를 끝으로 다시는 입후보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선거 이틀 전인 1971년 4월 25일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여러분들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십시오’ 하는 이야기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면서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표를 많이 모아서 우리 공화당과 이 사람을 한 번 더 지지하여 일할 수 있는 뒷받침을 해 주시면, 앞으로 4년 동안 여러분들을 위해서 있는 정력을 다 해서 한 번 멋있는 수도 서울을 만들어 보겠다”고 선언한다.

『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24일 부산과 25일 서울 유세에서 “이번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는 마지막 기회”임을 밝혀 75년 선거에는 다시 출마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하고 “다음 임기 중에 부정부패를 기어이 뿌리뽑고 물러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박 후보는 “야당은 총통제 운운해서 내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언제까지나 집권할 것 같이 허위선전을 일삼고 있으나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 한 번만 더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허락한 것이지 몇 번이고 해도 좋다고 지지한 것은 아닐 것이며 여러분이 나를 다시 뽑아주면 이 기회가 나의 마지막 정치 연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후략)
1971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박후보 서울 유세 “이번이 마지막 출마…임기 중 부정부패 근절”’』

상반됐던 두 사람의 주장 중 진실이 가려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634만2828표(득표율 53.2%)를 받아 539만5900표(득표율 45.2%)를 얻은 DJ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대선 다음 해인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 일체를 중단시켜버린다. 결국 대한민국은 1979년 10·26이 터지기 전까지 완벽한 1인 독재 체제로 ‘정치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한편 DJ가 30만 명의 군중 앞에서 ‘총통시대’를 예견했던 장소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지막 출마’임을 선언했던 장소인 장충단공원은 지금도 서울시민들의 휴식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본디 장충단은 고종이 을미사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1900년에 만든 사당인데,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장충단을 없애고 공원을 조성한 것이 현재의 장충단공원이다. 그 뒤 일본인들이 장충단공원에 일본군 동상을 세우는 등 각종 시설물을 설치했으나, 광복 후 모두 철거됐다.

이후 장충단공원 일대에는 장충단비, 수표교, 승정전, 관성묘, 와룡묘 등 문화재를 비롯해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 유관순·이준·김용환 동상 등이 세워져 민족 공원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 현재 장충단공원에는 장충단비, 수표교, 승정전, 관성묘, 와룡묘 등 문화재를 비롯해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 유관순·이준·김용환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시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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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연 2019-01-09 21:28:14
지난해 처음으로 들어가 보게된 장충단 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알게 되어 내심 부끄러운 마음이었는데. 정치면에서 재조명해 주셨군요. 더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