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제12대 총선, 신민당 돌풍 진원지였던 그 곳
[서울역사박물관] 제12대 총선, 신민당 돌풍 진원지였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1.22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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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중구 출마한 이민우…옛 서울고등학교 터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서 기선 제압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민주화추진협의회는 1985년 총선 참여 여부를 두고 내부 갈등에 휩싸였으나, 결국 신민당 창당 후 총선에 나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초석을 마련했다 ⓒ 시사오늘DB

1985년 2·12 총선을 앞둔 어느 날, 민주화추진협의회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신당(新黨)을 만들어 총선에 참여해야 한다는 쪽과, 총선 참여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만 인정해주는 꼴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놓고 보면, 양쪽 의견에는 모두 일리가 있었다. 총선 참여에 찬성하는 쪽은 선거에 참여해 국민의 뜻을 확인하고, 민의(民意)를 바탕으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총선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쪽은 중선거구제 하에서 선거를 치르면 완패가 불 보듯 뻔하므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만 높여주고 투쟁의 원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두 의견을 모두 듣고 숙고(熟考)하던 YS(故 김영삼 전 대통령)는 결론을 내렸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일단 선거에 참여하고, 민의를 받아서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민추협은 1984년 12월 11일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2·12 총선 준비에 돌입한다.

『상임운영위와 운영위원 전체회의에서 진로결정을 수임 받았던 민추협의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 권한대행은 11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국민운동기구로서 민추협 조직을 계속 유지·확대·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범국민적 민주화 추진의 일환으로 선거투쟁을 전개키로 했다”고 밝히고 “우리의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 투쟁을 그 핵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84년 12월 11일 〈동아일보〉 ‘창당준비위 곧 구성 재야단체 신당참여 결정’』

선거 참여를 결정했지만, YS라고 해서 상황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YS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중구에서부터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곧장 신민당 초대 총재 자리에 오른 이민우를 만나 서울 종로·중구 출마를 요청했다. 내심 전국구 1번을 염두에 뒀던 이민우는 YS의 제안에 거절의 뜻을 밝혔지만, ‘당력(黨力)을 총동원해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서울 종로·중구 출마를 결정한다.

사실 신민당 입장에서 서울 종로·중구는 말 그대로 험지(險地)였다. 이미 이 지역에는 민정당이 이종찬, 민한당이 정대철을 공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이자 민정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낸 이종찬은 ‘여당 프리미엄’까지 등에 업은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었다. 정대철 역시 원로 정치인 정일형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의 아들로 유명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민정당 이종찬과 민한당 정대철의 당선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민심(民心)이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 민주화를 약속한 신민당에 국민은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특히 2월 6일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열린 서울 종로·중구 합동연설회에는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고목나무에 올라가 연설을 듣는 모습까지 연출됐을 정도였다. 

▲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시사오늘

『경희궁터, 옛 서울고교 자리에서 열린 마지막 합동연설회는 기록적인 7만 여 청중이 운집한 ‘정치의 봄’이었다. 개막 1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인파는 운동장과 스탠드를 가득 메웠고, 일부 청중은 스탠드를 둘러싼 고목나무에까지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리다시피 했다. (중략) 청중들은 마지막 연설회의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였고, ‘시원한 그 한마디’에 아낌없이 박수와 함성을 보냈다.
1985년 2월 7일 〈동아일보〉 ‘구름떼 청중 막판의 열변’』

이날 확인된 뜨거운 지지는 투표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이민우는 8만2687표(득표율 31.63%)를 얻어 8만4258표(득표율 32.23%)를 획득한 이종찬과 함께 서울 종로·중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정대철은 7만859표(득표율 27.11%)로 3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다.

무엇보다도 서울 종로·중구는 신민당 돌풍의 진원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당 총재가 험지에 나서 바람을 불러일으키자, 국민은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신민당에 표를 몰아줬다. 무려 84.6%라는 투표율을 기록한 이 선거에서 신민당은 지역구 50석에 전국구 17석까지 총 67석을 얻으며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제12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87명, 신한민주당 50명, 민한당 26명, 국민당 15명, 신사당 1명, 신민주당 1명, 무소속 4명이 각각 당선됐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지역구 최다의석정당이 배분받게 될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으로 의원정수 276명의 절반인 138석을 넘어 일단 원내안정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3차 해금자 중심으로 선거일 불과 20여일 전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예상을 뒤엎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등 대도시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통해 민한당을 제치고 민정당에 이어 일약 원내 제2당으로 진출, 정계의 태풍의 눈으로 주목을 끌게 됐다.
1985년 2월 13일 동아일보 ‘신민 대도시 압승 제1야당’』

제12대 총선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신민당은 국회 개원 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와 함께 국회 밖에서는 YS와 DJ가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 1987년 6·29 선언의 도화선을 만들어낸다.

한편, 옛 서울고등학교 터는 정치 외적으로도 사연이 많은 곳이다. 일제는 1910년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을 위해 경희궁 동남쪽 부지에 학교를 신축했는데, 여기가 바로 경성중학교다. 경성중학교는 해방 직전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로 기능하다가 광복 후 서울고등학교가 됐다. 하지만 서울고등학교 역시 이 자리에 오래 남아있지는 못했다. 1980년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도심부의 명문고등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울고등학교도 서초구로 위치를 옮기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고등학교가 자리를 비우자,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현대건설에 이 땅을 사라고 권유한다. 결국 현대건설은 당시 기준으로 100억 원이 넘는 이 땅을 구매한 뒤 현대그룹 사옥과 호텔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28층 높이의 현대그룹 사옥을 짓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서울시는 1980년 9월 옛 서울고등학교 터를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현대건설로부터 다시 부지를 사들였다. 대신 현대건설에는 구의지구(강변역 일대) 택지 5만 평이 주어졌다.

그 결과 이 자리에는 복원된 경희궁과 공원, 서울역사박물관 등이 들어서게 됐다. 옛 서울고등학교 터는 치욕적인 식민지 시절과 강남 개발의 역사, 현대 정치사 등이 모두 혼재된 의미 있는 장소인 셈이다.

▲ 공원으로 조성된 옛 서울고등학교 터. ⓒ시사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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