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당권레이스와 ‘피로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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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 당권레이스와 ‘피로스의 승리’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1.2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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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우향우 하는 한국당 당권주자들…‘중도 포섭’ 관건인 대선 내다봐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기원전 3세기경, 북부 그리스 지방의 도시국가 에페이로스에는 피로스(Pyrrhos)라는 왕이 있었다. 피로스는 역사가들이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할 만하다’고 평가하는 전략·전술의 대가(大家)로,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해 두 차례 승리를 거뒀던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승자’가 아닌 ‘패자’로 기억한다. 피로스의 군대는 로마와 치른 첫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의 깃발을 올렸지만, 너무 큰 희생을 치렀다. 오죽하면 승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피로스가 “이런 승리를 한 번 더 거두면 우리는 망하고 만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그 말 그대로, 피로스의 군대는 로마 입성을 앞둔 최후의 전투에서 패퇴했고, 전력 대부분을 소진한 피로스는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를 점령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전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에게 거둔 두 차례 승리가 오히려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처럼 ‘상처뿐인 승리’를 우리는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고 부른다. 

▲ 자유한국당 당권 주자로 거론되는 황교안 전 국무총리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뉴시스

최근 자유한국당 당권 레이스를 지켜보면, 피로스의 승리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얼마 전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공안검사 이름으로 국민의 안전과 공익을 지켜왔다”며 “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기 위해 통합진보당을 해산하자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말했다.

그에 뒤질 수 없다는 듯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도 25일 대구를 찾아 “좌파정권은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미군이 철수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핵을 가진 북한 밑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경제는 망쳐도 정권 바뀌면 살릴 수 있다. 그런데 안보를 망치면 살릴 수가 없다”라며 ‘색깔론’을 폈다.

이러자 ‘중도 보수’로 분류되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마저 최근 한국당 의원모임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저는 핵개발론자는 아니지만 옵션을 넓히는 게 외교안보에 도움이 된다”면서 “전술핵 재배치를 뛰어넘어 핵 개발에 대한 야당의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뜬금없는 ‘핵무장론’을 꺼내들었다. 세 명 모두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철 지난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안보 문제를 당대표 선거 핵심 어젠다(agenda)로 부각시키고 나선 것이다.

황 전 총리와 홍 전 대표, 오 전 시장이 ‘강경 보수’의 입맛에 맞는 안보 문제를 들고 나온 데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지난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51.5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리얼미터>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인용 직전인 2017년 3월 8일 수행해 9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은 20.3%에 그쳤다.

이후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는 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겨우 24.03%를 득표했으며, <리얼미터>가 지난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실시해 2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는 한국당 지지율이 26.0%로 나타났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을 기점으로 한국당 지지율은 20~25% 박스권에 갇힌 모양새다.

이 같은 흐름을 보면, 박 전 대통령 탄핵은 20~25% 전후의 ‘코어(core) 지지층’을 제외한 중도 보수층을 한국당 지지 기반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중도 보수층의 이탈은 한국당 내 ‘강성 보수’의 입지를 확대시켰다. 기존에는 강성 보수층 비율이 전체의 1/3 수준에 불과했다면, 중도 보수층이 떨어져나감에 따라 이제는 강성 보수층이 한국당의 ‘핵심 지지세력’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황 전 총리와 홍 전 대표, 오 전 시장이 ‘철 지난’ 이슈인 안보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은 여기서 연유한다. 알려진 대로, 2·27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쥐는 사람은 2020년 총선 공천 과정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총선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대권 후보로 가는 고속도로에 올라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대권을 노리는 세 사람으로서는 이번 전대에서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전대에서 승리하려면 방법은 단 한 가지, 당심(黨心)을 얻는 것이다. 결국 세 사람 모두 대권으로 가기 위해 현재 당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강성 보수의 입맛에 맞는 이슈를 꺼내들었다는 이야기다. 나무랄 데 없는 논리 구조다.

문제는 확장성이다. 세 사람이 대권을 노리고 있다면, ‘얼마나 중도층에 어필할 수 있느냐’가 목표 달성의 관건이 된다. 하지만 당권 레이스에서 ‘올드한’ 이미지를 갖게 될 경우, 장기적으로는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의 말대로,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인터넷 여러 공간에 기록돼 있고 이를 삭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정치인에게는 ‘잊혀질 권리’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 한 번 형성된 정치인의 이미지를 바꾸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피로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로마 점령이었다. 그러나 로마에 입성하기도 전에 치러진 두 차례 전투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피로스의 군대는 결국 ‘승자의 저주’에 빠져 멸망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한국당 당권 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최종 목표가 대권이라면, 승리 그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잘 이기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눈앞의 승리만 보고 달려가는 한국당 당권 주자들의 ‘뜨거운 질주’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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