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텔링] 1987년, 김대중의 4자 필승론이 없었다면?
스크롤 이동 상태바
[정치텔링] 1987년, 김대중의 4자 필승론이 없었다면?
  • 윤명철 논설위원
  • 승인 2019.02.09 0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역주의 패권론 종식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논설위원)

▲ 평생의 라이벌 YS(좌)와 DJ(우)의 생전 모습. 만약 DJ가 민주화의 분수령인 1987년 대선에서 4자 필승론 대신 야권 후보 단일화를 주창했다면 신군부의 연장인 노태우의 6공 정부는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지역주의 패권론 종식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진제공=뉴시스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4자 필승론을 내세우며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DJ는 TK의 노태우 후보와 PK의 김영삼(YS) 후보가 영남권을 나눠 갖고, 김종필(JP) 후보가 충청권을 가져간다면 수도권과 호남권의 지지를 받는 자신이 반드시 승리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야권 후보 단일화를 외면했다.

하지만 DJ의 4자 필승론은 허구였다. 1987년 대선은 DJ의 주장과 달리 야권의 분열로 신군부의 2인자인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오히려 YS와 DJ의 분열은 노태우 정권 탄생의 명분과 정당성을 제공했고, 군정종식은 5년이나 유예됐다.

만약 DJ가 4자 필승론을 역설하지 않고, 군부 정권이 가장 우려했던 야권 단일화에 전념했다면 1987체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 신군부가 가장 원했던 4자 필승론?

DJ의 4자 필승론이 나오자 여권은 속으로 환호했다. 야권 후보의 분열은 전두환의 5공 정부가 가장 바라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5공 측은 영남이 노태우와 YS로 분열되더라도, 야권이 DJ와 YS로 분열되는 상황이 더 확실한 필승의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이승만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까지 보수 세력은 이 나라의 주류였다. 이들이 수십 년간 구축한 조직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박혔다.

당시 시대정신이 민주화를 염원했더라도 집권세력은 ‘안정’을 더 우선시했다. 야권의 집권으로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변화 또는 현 상태 유지를 더 원했다. 집권세력의 선거 노하우는 정확했다. 즉 집토끼를 잘 관리하고, 양김이 분열한다면 승리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5공이 원하던 상황이 발생했다.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독자 출마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담판에서 YS가 DJ의 요구사황을 전폭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야권단일화가 눈앞에 와 있었다. 그러나 DJ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탈당했다. 야권단일화는 물 건너 갔다.

5공 군부는 양김의 분열을 지켜보며 승리를 예감했다. 반면 DJ는 탈당을 감행해 독자 출마를 고수했고,  끝까지 4자필승론을 앞세워 자신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의 선택은 노태우 후보였다. 36.6%에 불과한 저조한 득표율로 당선됐다. 4자 필승론으로 자신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DJ는 27.1%의 득표율로 평생의 라이벌 YS에게 뒤진 3위에 머물렀다.

문제는 DJ의 4자 필승론이 지역 분할을 전제로 했다는 점이다. DJ 구상의 기본 전제가 4명의 후보가 각자의 지역 기반을 석권하고, 자신이 최대 인구 밀집지역인 수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즉, DJ 본인이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라면서도 자신의 승리를 위한 기본 조건으로 지역분할을 전제로 한 ‘4자 필승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DJ, 4자 필승론 포기하고 야권 후보 단일화에 나서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DJ는 대선 도전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1971년 대선이후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봤다. 대선 패배 이후 일본으로 망명, 중정의 납치, 그리고 기나긴 연금 생활 등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다시 찾아온 민주화의 기회인 ‘서울의 봄’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더 이상 군부 집권을 인정할 수 없었다. 민주화 동지 YS와 유신 본당 JP와의 경쟁을 이겨야 민주화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때도 자신을 포함한 3김은 치열한 대권 경쟁으로 서울의 봄을 만끽하기도 전에 신군부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 결과, 광주 시민들이 희생됐고, 자신은 사형수가 됐다. 결국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떠나게 된 미국 생활 등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인생의 기록이다.

격동의 1987년이 되자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기사회생한 민주화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국민이 원하는 민주화를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군부가 원하는 것이 야권 후보의 분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후보가 되지 않더라도 신군부의 정권 연장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느꼈다.

4자 필승론도 버리기로 했다. 이 이론이 자신의 집권을 위한 최상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순 없었지만, 또 다른 지역주의를 만들 가능성이 더 컸다. 자신과 같은 지역감정의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잊지 않았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동지인 YS와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이번에 찾아온 민주화를 반드시 실현시켜 대한민국 역사 발전에 기여하자고 제안했다. 先민주화 後대권 도전이라는 대원칙을 제시했다. 양김은 군부 종식을 위해 손을 잡기로 했다. 때마침 YS가 자신이 주장한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합리적 추론-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87년 4자 필승론이 없었다면? 이라는 가상 상황을 연출해봤다.

대한민국 정치권의 최대 적폐는 지역주의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최대지지 기반은 TK와 영남이다. 비록 지난 2018년 6·13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TK와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석권했지만, 확실한 지지기반이라고 확신하기엔 부족함이 적지 않다.

만약 DJ가 민주화의 분수령인 1987년 대선에서 4자 필승론 대신 야권 후보 단일화를 주창했다면 신군부의 연장인 노태우의 6공 정부는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지역주의 패권론 종식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담당업무 : 산업1부를 맡고 있습니다.
좌우명 : 人百己千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