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기수론②> “빈사상태에 헤매는 민주주의 회생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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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②> “빈사상태에 헤매는 민주주의 회생위해…”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1.05.18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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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박정희의 3선개헌 종지부 찍기 위해 출마결심
박정희, YS 거부…유진산, 구상유취라며 평가절하
DJ 이철승 동참하며 40대 기수론 당내 대세로 자리
중정 개입과 이철승 배신으로 YS 낙마, DJ 최종승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우리 정치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40대 기수론’이 등장한 1969년은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으로 한국정치가 소용돌이 친 시기였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재임에 성공한 뒤 대통령임기를 2년여 앞둔 1969년 새해벽두부터 헌법의 중임조항을 개정해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다.

그해 9월 14일 신민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제3별관에서 3선 개헌안을 단 6분 만에 변칙 처리했다. 개헌안을 막지 못한 신민당은 좌절과 패배감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영삼(YS)은 이를 극복하기위해 일본 훗카이도 한 호텔방에서 당시 최측근이었던 고(故)조윤형 의원과 논의 끝에 71년 대통령후보에 출마키로 결심한다.

▲ 70년대 신민당 제7대 대통령후보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YS는 경선결과에 대해 깨끗이 승복한 후 DJ당선을 위해 전국으로 지원유세를 펼쳤다. 사진은 당시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DJ에게 악수를 건네는 YS.

‘40대 기수론’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때문에 40대 기수론을 일명 ‘훗카이도 구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얼마 뒤인 1969년 11월 8일 오전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김영삼은 “박정희의 3선개헌 강행을 통한 위장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바를 체감한 우리 야당은 빈사상태에 헤매는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키는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앞장서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섰습니다. 나는 짙은 의무감과 굳은 결단, 그리고 벅찬 희생을 각오하면서 71년 대통령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국민여러분에게 밝힙니다”며 출마선언을 했다.

42세의 젊은 나이였던 YS가 당내 노장층이 즐비한 보수정당의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키는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것. YS의 40대 기수론은 당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여당이었던 공화당도 충격이 심했다. 특히 민주정치를 위한 선거를 필요악으로 생각했던 박정희는 40대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시 신민당을 장악하고 있던 유진산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기를 원했다.

당내 최대계파를 이끌었던 유진산도 40대 기수론을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평가절하했다. 민정당 대변인을 거쳐 원내총무를 5회나 역임했던 4선의 YS가 원내의 지지기반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으나 유진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YS는 ‘후보 김영삼-당권 고흥문’ 카드를 들고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고흥문을 끌어들이며 세대교체 바람을 이어갔다. 또한 당의 비주류였던 김대중(DJ)과 재야의 실력자 이철승을 찾아가 ‘40대 기수론’에 동참해 줄 것을 설득했다.

김대중은 “강력한 유진산 체제와 싸워 승산이 없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최측근이었던 김상현이 “40대 기수론에 참여해야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다”며 DJ를 설득했다. 1970년 1월 24일 김대중은 뉴서울호텔에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은 젊은 세대의 진출을 완강히 거부하는 당내 일부 지도층의 자세에 기인한다. 나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같이 최후 승리의 날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싸우다 죽더라도 사술만 논하는 마키아벨리는 되지 않겠다”며 대권도전을 선언했다.

양 김씨가 1969년 말과 1970년 초에 각각 대권후보 경선전에 참여할 것을 선언하자 재야에 있던 이철승도 1970년 1월 22일 신도환 김준섭 등 20여명과 함께 신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입당 20여일이 지난 2월 12일 자신의 고향인 전주에서 대권도전 출마 기자회견을 가졌다.

YS와 DJ에 이어 이철승까지 동참하자 40대 기수론은 신민당의 대세로 자리 잡아갔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진산은 ‘불출마’를 선언하는 대신 YS, DJ, 이철승 중 한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지명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후보출마는 좌절돼도 자신의 손으로 신민당 대선후보를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다.

YS와 이철승은 찬성했고, 자신을 지지해줄리 없다고 판단한 DJ는 이를 거부했다. YS와 이철승은 유진산을 만나, ‘유진산이 추천하는 후보를 밀겠다’고 서약했다. 지명대회를 하루 앞둔 1970년 9월 28일 오후 4시 신민당 중앙당사.

유진산은 “나는 당수로서 YS를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김영삼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눈앞에 와 있었다. 당내 대의원 40% 정도를 확보하고 있는 유진산의 지지와 당내 제2계파인 이재형계의 지지약속, 이철승 측도 ‘서약’에 묶여 있어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개입과 이철승의 배신으로 김대중이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김영삼 캠프는 만약의 경우 이철승이 김대중 쪽으로 간다고 해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진산계와 이재형계의 표만 계산해도 승리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하지만 김영삼과의 승부를 꺼리던 박정희는 중정을 이용, 이재형의 김영삼 지지를 막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재형이 김영삼을 지지할 경우, 대림산업을 세무사찰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상도동 가신 1세대인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은 “캠프 내에서 이철승의 표가 김대중 쪽으로 간다는 계산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표계산을 해보니 우리가 이겼다.

하지만 이재형의 배신으로 김대중이 승리했다. 이를 안 YS가 선거 후에 이재형을 만나 쌍욕을 하다시피했다. 이재형은 아무 말도 못하고 ‘중정의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었다’고 고백했다”고 전했다. 결국 YS로 시작된 40대 기수론의 최종 승자는 DJ였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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