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1)]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YS,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완성자”
[民山되짚기(1)]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YS,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완성자”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1.05.19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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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 야당 탄압 목도…85년 3월 민산 스스로 찾아가동가숙 서가식 형편…YS와 함께한 민주화 운동에 자부심전두환, 민산 탄압 일삼아…“민산은 민주화의 처음과 끝”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최신형 기자)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가장 큰 정치적 결사체로서 역할을 담당한 민주산악회. 1981년 6월9일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시작을 알린 민주산악회는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군정을 종식시키며 첫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그 당시 회원수는 200만명. 민주산악회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고난의 사도였다. 이념·빈부·세대·남북간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된 한반도에 민주산악회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발자취를 추적해봤다. <편집자 주>
 

▲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

‘YS와 민주산악회(이하 민산)’는 어느덧 과거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혹자는 YS를 군부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 민산을 민주화 운동의 요람으로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외환위기를 떠올리며 YS에 대해 척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어떨까. 불현듯 역사학자 카(E. H. Carr)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카가 역사의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 것처럼 ‘YS-민산’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되짚어보고 싶었다. 또 궁금했다.

그래서 민산의 역사가 그대로 계승된 민주동지회 회원들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한국 민주화의 과정을 복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다. ‘YS-민산’에 대한 뿌리를 찾는 인터뷰는 지난 20일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사)김영삼 민주센터에서 그렇게 시작됐다.

 

-민산 가입은 언제 하셨습니까.

“1985년 3월 14일입니다. 민산 가입 4개월 전인 84년 12월,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뒤 내발로 민산에 들어갔죠. 난 이미 그 전부터 야당 성향이었고, 신문 등 매스컴을 통해 박정희 유신정권의 민주주의 탄압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79년 박정희 유신정권은 YH사건 때  YS를 강제로 정치권 밖으로 몰아내지 않았습니까. 정치폭력이 시정의 폭력배와 다름없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통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성향이 자연스럽게 나와 민산의 연결고리로 작용했어요. 반민주 독재정치로 인해 어둠과 고통이 깔려있던 그 시절, 민산을 통해 민주화 대열에 선 셈이죠.”

-당시 민산의 주요 회원은 누구였습니까. 초기 회원 수는 어느 정도였나요.

“민산 회장을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가 맡았고 고문에 YS를 시작으로, 최형우 김동영 김덕룡 김무성 홍인길 김기수 박종웅 이성헌 등이 민산 회원이었습니다. 당시 정규 회원은 184명으로, 그 사람들이 진짜 민산 회원인 셈이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민산은 전두환 정권이 야당 해산 등을 통해 장기 집권 음모를 꾀하자 1980년 10월 27일 대구경북 민산(경민 산악회)을 시작으로, YS 이민우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인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이어 81년 6월 9일 첫 공식모임을 발족시킨 민산은 82년 11월 고문에 YS, 회장에 이민우, 부회장에 김동영 최형우 함기환, 운영위원에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을 선임하며 각 시도지부 및 지회 결성을 하는 등 전국 적인 조직망을 구축해 나갔다.

“YS 첫인상, 순수하고 부드러웠다”

-민산에서 YS와의 첫 만남을 회고하신다면.

“1985년 3월 14일 목요일 오전 10시, 90여명의 민산 동지들이 산행을 하기 위해 수유리 4·19 탑 앞에서 모였습니다. 나는 오전 9시 50분에 도착해 고(故) 이우태 산행 대장의 안내로 YS와 첫 대면을 하게 됐습니다. YS의 처음 봤을 때 참 순수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른 봄이었지만 엷은 안개가 낀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YS가 털실로 짠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산행초입부터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산을 오르는 YS를 연신 찍어대기 시작했고 난 즉흥적으로 내가 쓰고 있던 밤색모 등산모(모택동 모자형)를 이우태 대장을 통해 YS에게 건네 드렸습니다. 당시 5월호 <신동아>에 YS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밤색모 등산모를 착용한 YS는 매우 핸섬하고 멋진 모습이었죠.(웃음)”

-전두환 5공 시절에 민산에 가업했는데, 당시 정치상황은 어땠습니까.

“YS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정권의 탄압은 나날이 더해갔습니다. YS가 1985년 3월 6일, 6년 만에 정치일선에 복귀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86년에 접어들면서 야당과 재야세력에 본격적인 탄압의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의 대학에서는 연일 대학생들이 반미-반독재를 외치는 가운데, 분신자살을 하는 등 참극이 벌어졌고 그해 7월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는 등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렸습니다.”

-민산에 대한 탄압도 심했을 것 같습니다.

“말도 못하죠.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산행할 때도 형사 3∼4명이 따라붙고…나는 조마조마한데, 윗분들은 아주 느긋했어요.(웃음)”

“민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처음과 끝”

-민산 소속으로 민주화 운동을 했을 당시 비화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985년 3월 민산에 가입했을 당시부터 독신녀였던 나는 오로지 독재정권의 부당함과 불의에 대한 반감에 분노했습니다. 내 인생에 내일이 없다는 각오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셈이죠. 다만 그 당시 주거와 식생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말 그대로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하는 형편에 놓여있었어요. 86년 6월 내 살림살이를 경기도 신장(현 하남시)에 있는 어느 허술한 주인집 처마 밑에 쌓아놓았고 밤에는 <청운독서실>에 등을 붙이며 잠을 청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도록 먹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죠. 그러나 나는 오직 민주화를 이뤄야한다는 신념으로, 가는 곳곳마다 ‘반독재타도-민주헌법쟁취’를 외치면서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습니다.”

-민산 이외의 제도권 정당 활동은 따로 안 하셨습니까.

“민산 활동만 했습니다. 그 당시엔 민산은 제도권 정당하고 동일시할 정도로 파워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활동하셨습니까. 문민정부 수립 이후 YS가 민산 해체 명령을 내렸을 때는 어땠습니까.

“YS가 민산 해체 명령을 내렸던 1993년까지 민산에서 활동했고 그 이후엔 각 지역별 민산 친목모임 등에 계속 참여했죠. 물론 지금은 민산의 정신을 계승한 민주동지회 운영이사로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YS가 민산 해체 명령을 내렸을 때 너무 슬펐습니다. 민산을 해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공의를 위해서 사적이익을 버리는 YS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YS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YS의 민산 해체 결정은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YS도 어느 사적인 자리에서 민산 해체와 관련해 ‘내가 잘못했던 것 같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민산 해체보다는 다른 대안을 마련해 조직을 살렸어야 했는데…그 부분은 참 아쉽죠.”

-민산의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산은 독재로부터 항거해오던 민주화 운동의 처음과 끝이자, 권위주의적인 군부통치를 종식시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YS와 함께 다시 정치를 할 생각이 있습니까.

“당연하죠. 다시 YS와 정치를 할 것입니다. YS는 술수를 쓰는 정치인이 아니라 정직과 진실의 양심적인 성품을 지닌 정치인, 그리고 험악한 정치판에서 한 가닥 순수성을 지닌 정치인입니다.”

 

▲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


“YS가 이룬 업적 재평가돼야”

 

-YS의 정치철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YS는 의회주의자면서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있는 정치인입니다. YS는 20대부터 정치에 몸담아 오면서 온갖 정치풍상을 겪었고 30여년 넘게 오로지 야당이라는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정적들은 YS를 협박, 미행, 도청, 감금, 의원직 박탈 등으로 위협했지만 YS는 죽음을 각오한 단식으로 이에 저항했습니다. YS가 숱한 고난 속에서도 일관된 행보를 걸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자신을 연단했기 때문이죠. 그를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다 압니다.”

-문민정부에 대한 평가를 내리신다면.

“문민정부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일들이 많잖아요.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부정비리를 청산했고 박정희 정권 때부터 뿌리 깊은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청산한 것, 또 역사바로세우기 기치 아래 전두환-노태우의 실형과 비자금 회수, 정경유착 근절, 일제의 상징적 잔재인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을 허문 것 등등 YS의 업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역사난 국민들의 평가는 이와는 반대로 저평가 돼 있습니다.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교육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학교 교육부터 역사를 너무 편협하게 가르치고, 전교조 등이 그렇게 하잖아요. 박정희가 산업발달을 이뤘다고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시대흐름을 타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게 돼 있습니다. 남들이 못한 것을 박정희가 했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죠. 아니, 부동산 투기, 정경유착, 지역주의 등 전부 박정희 정권의 뿌리 아닙니까. 참 안타깝습니다. 역사는 100년 정도가 흘러야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옵니다.”

-민주동지회가 좀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서 지금의 판을 바꾸는 역할을 해야되지 않을까요.

“민주동지회 회원들과 만나면 그 얘기를 자주해요. 우리가 나서야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없어요, 안타깝습니다.”

-YS의 퇴임이후의 행보와 마지막으로 YS는 이런 사람이라고 독자들에게 한 말씀부탁드립니다.

“YS는 의지가 대단히 강합니다. 23일간 단식하는 거 보세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그 반면에 YS는 사심이 없습니다. YS가 가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인간이 백년을 살 수 없는데 권력과 물욕에 욕심을 사람은 어리석고 불쌍하다’고. YS는 전 시대는 물론 현 시대에도 통틀어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정치인이자 정치원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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