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김상현>김상현, “DJ에 헌신…돌아온 건 숙청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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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김상현>김상현, “DJ에 헌신…돌아온 건 숙청 대상”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1.05.19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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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 40대 기수론에서 85년 신민당 돌풍까지 DJ위해 헌신
동교동 “후농이 딴생각 한다”며 냉대로 일관…숙청대상
YS, "후농이 말이 없어졌다”며 안타까움…후농 정치말년 쓸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고(故)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정치인이 ‘후농(後農) 김상현’이다.
오늘날의 DJ를 만든 게 후농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닌 듯싶다.

▲ 김상현 전 의원. ⓒ뉴시스
1969년 YS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며 DJ도 여기에 동참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DJ는 “강력한 유진산 체제와 싸워 승산이 있느냐, 왜 무모한 짓을 하느냐”고 거부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을 바꿔놓은 게 후농이었다.

40대 기수론이 팽팽하던 1969년 말 서울시청 뒤 뉴서울호텔에서 DJ와 만난 후농은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지 않으면 지도자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할 수 있으니 선언에 동참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결과만 본다면, 후농 때문에 DJ는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DJ는 정치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시절인 1984년 김영삼의 단식투쟁 1주년을 기념해 탄생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상도동과 동교동이 하나가 돼 만들어졌다.

미국에 나가있던 DJ는 “동교동만의 독자노선을 만들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후농이 강력히 주장해 만들 수 있었다.

또한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신민당을 창당할 때도 DJ는 반대했다. DJ는 ‘김홍일’을 통해 ‘동교동 신당 참여 불허’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총선을 몇 개월 앞둔 어느 날, 김홍일은 서울 종로 평창동의 한 호텔로 후농을 불러내 “만약 신당에 참여하면 절교”라고 협박했다.

후농은 이에 개의치 않고 YS와 함께 신민당을 만들어 신당돌풍을 일으켰다. 물론 승리의 전가는 모두 DJ에게로 돌렸다.

이처럼 후농은 DJ를 위해 헌신했다. 후농은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했을 때나 80년 전두환의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갖은 악형과 고문을 당하며 'DJ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앞장섰다. 그러나 동교동 측은 “후농이 딴생각을 하고 있다”며 ‘냉대’로 일삼았다.

때문에 후농과 자주 비교되는 정치인이 ‘최형우’다. YS의 가신 1세대인 최형우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내무부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정권 2인자로 부상했다.

반면, 후농은 무엇 때문인지 DJ 정권하에서 변변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후농은 이에 대해 “나는 공산주의로 말하면 숙청당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정치를 하면서 당 대표를 맡은 적도 없고 원내총무나 사무총장을 한 적도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던 후농이 최근 말 수가 줄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그렇게 얘기하기를 좋아했던 후농이 말이 없어졌다. 무슨 일이냐”고 측근들에게 물어봤다고 했을 정도.

80년 감옥에서 만난 고은 시인이 “인생 전반기에는 고생이 많으니 후반에 수확을 많이 하라”며 ‘後農’이란 호를 지었다. 그의 호가 무색하게 그의 정치말년이 쓸쓸한 것 같아 주위로부터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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