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기수론③> 명분·결단·대중성 필수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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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기수론③> 명분·결단·대중성 필수요건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1.05.20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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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군정타도 민주정권 수립 명분…2011년, 소통 화합 이끌 지도자 필요
유진산, 윤보선과 대립 피하기 위한 결단…이재오 박근혜 이상득 등 결심해야
YS, 3선개헌저지투쟁과 초산테러 등으로 국민적 인기 극…대중성 인기 필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친이와 친박이라는 거대계파 안에서 ‘40대 기수론’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한나라당 내 40대 기수론의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은 나경원 최고위원과 원희룡 사무총장, 남경필 의원 등이다. 70년, 40대 기수론이 등장했던 시기와 비교해 보면서 성공여부를 진단했다.<편집자 주>

▲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과 김영삼 전 대통령.
40대 기수론이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명분이다. 1969년 말, 김영삼(YS)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오자 신민당 내 노장파들은 즉각적인 반발을 보였다. 당권을 쥐고 있던 유진산 부총재는 “누구나 표시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문제”라고 선을 그은 뒤 “하지만 YS의 발언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비난했다.

정일형 부총재도 “당풍쇄신이라는 커다란 과업을 앞두고 있는 이때 당 진로의 방향설정에 혼선을 가져올까 염려된다”고 반감을 표시했다. 이재형 부총재 또한 “시기적으로 보아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고 YS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당내 계파를 거느린 노장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40대 기수론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대의였다. 박정희의 3선 개헌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신민당은 대국민 이미지가 좋지 않은 유진산에게 대통령 후보자리를 내주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 특히 군정을 타도하고 민주정권을 수립하자는 명분이 있어, 40대 기수론이 성공할 수 있었다.

고(故) 고흥문 의원은 “3선개헌을 한 박정희가 정권을 넘겨줄리 없었고, 진산이 나가면 3등을 할 판이었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YS의 40대 기수론 선언에 명분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4?27 재보선 패배 후 한나라당이 직면한 최대 과제는 ‘소통’이다. 또한, 친이와 친박간 계파다툼을 ‘화합’을 통해 통합해야 할 당대표가 절실한 시점이다.

원희룡 나경원 남경필 등 이들이 여기에 적합한 당 대표인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이와 더불어 당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계파 수장의 결단이 필요하다. 당시 유진산이 구상유취라면서도 40대의 후보도전을 받아들이고 후보에서 물러난 것은 지도자의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유진산이 대통령 후보를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자 이민우 유치송 의원 등은 진산의 상도동 자택에서 진을 치다시피 하며 후보추대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정치여건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유진산은 40대 주자들에게 후보를 양보했다.

유진산은 당시 자신이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나설 경우,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윤보선의 국민당도 후보를 낼 게 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제7대 대통령선거는 여야 간 경쟁이전에 신민당과 국민당간 이전투구의 마당이 돼 ‘선거는 하나마나한 게 될 게 분명하다’는 판단에 따라 후보를 양보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금도 여건은 비슷하다. 한나라당 내 최대계파인 ‘이재오-박근혜-이상득’ 등이 결단을 통해 이들 중 한명을 지지해야 한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역학관계가 있어 섣불리 이들을 당대표로 앉히기에는 여러 가지 셈법이 필요하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한나라당 내 한 중진의원은 “원희룡-나경원-남경필 등은 모두 장점을 가진 지도자가 틀림없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경우는 같은 여성의원이란 점에서 나 의원을 지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정두언 의원을 필두로 한 소장파 의원들은 ‘당쇄신’을 무기로 남 의원을 지지하겠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 원 의원의 경우는 친이계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친이계를 대상으로 한 ‘인적쇄신’이 불고 있어 세사람 중 누가 가장 유리하다고 섣불리 얘기하기가 힘들다”고 전했다.

또한 40대 주자들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도 성공여부의 관건이다. 1970년 당시, 김영삼은 ‘선명성’을 무기로 대국민 지지도가 높았다. 특히 3선 개헌저지 투쟁과정에서 초산테러를 당하며 국민적 인기가 극에 달했고, YS가 대중연설에 나서면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원희룡의 경우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차차기 대권주자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나경원은 ‘선거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으며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70년대와 비교해보면 대중적 지지도가 YS나 DJ에 비해 약하다는 게 일반론이다.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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