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열 “昌은 사고가 단조로워, 자기가 대통령 자리 걷어찼지”
유한열 “昌은 사고가 단조로워, 자기가 대통령 자리 걷어찼지”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1.06.02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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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열 한나라전의원
진산, ‘야권분열’우려로 40대에 후보 양보…‘사쿠라’이미지는 박정희 작품
선명성 앞세운 YS 노선 걸으며 국회입성…제1야당 사무총장 맡으며 정치력 확대
이민우 파동의 원죄는 홍사덕 김대중 책임…이회창 대권도전 실패는 ‘자기책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유한열 전 의원은 한국정치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유 전 의원은 1970년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부친이었던 고(故) 유진산의 대선 출마를 돕기 위해 귀국한 이래 50여년 간 정치판을 떠나지 않았다. 1노3김이 맞붙은 1987년 대선에서는 ‘이민우 대선 후보’추대를 위해 뛰었고, 1992년에는 김영삼 편에 섰다.

1997년과 2002년에는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나섰으나 실패했다. 5선 관록의 정치인이었던 유 전 의원은 2007년에도 고건 캠프에 합류할 만큼 노익장을 과시했다. 유 전 의원은 최근 ‘격동의 시대, 내가 아는 진실’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유 전 의원이 지내온 정치현장을 담고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이, 그가 지내온 격동의 세월이 알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달 28일 <시사오늘>에서 유 전 의원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김대중과 이철승은 유신헌법 개정 사전에 알고 도망쳐"

▲ 유한열 전 의원은 진산은 장기로 치면 10수 이상은 앞을 내다보고 정치를 했다고 주장했ㄷ ⓒ시사오늘 권희정

-1970년 당시 신민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유진산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 의원을 서울로 불러들이며 ‘대권 도전’의욕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40대 기수론에 밀려 중도 포기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민당은 4개 정당으로 분열해 있던 야당을 통합한 정당입니다. 아버님(진산)은 ‘야당을 하나로 묶는데 온갖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야당이 분열한다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 내가 대선후보에 나오면 아무래도 국민당도 후보를 낼 게 뻔하다’며 고민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나오면 윤보선 씨도 출마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대선전이 공화당 대 신민당의 싸움이 아니라, 신민당과 국민당(윤보선) 간의 이전투구의 장이 될 것을 염려해 출마를 포기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진산은‘40대 기수론’에 밀려 중도하차한 게 아닌가요.

“박정희는 엘리트를 뽑아다가 중앙정보부에 앉혀놨어요. 그런데 중앙정보부 사람들도 ‘유진산 머리는 못 따라간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당시 선친이 대통령후보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박정희를 잡기 위해서는 내가 포기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니까, 당을 ‘김대중 체제’로 만들어 준 겁니다. 그래서 5백 만표가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진산은 장기로 치면 열 수 이상을 앞서 간 겁니다.”

-그렇다면 당시 40대 기수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솔직히 40대 기수라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될 준비도 안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명전 도전은 야당 2세대 선두다툼이었습니다.”

-진산은 일반인들에게 아직까지 ‘사쿠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야당 당수를 하면서 ‘선명성’이 좀 부족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진산이 ‘반 박정희’를 외쳐도 박정희 시대에는 기사가 다 검열이 돼서 나갑니다. 솔직히 선친의 이미지는 박정희가 만든 겁니다. 박정희가 사쿠라 이미지를 만들고 싶으면 사쿠라가 되는 거고…, 박정희 독재시절 유진산이 야당 자리를 꿋꿋이 지켜왔다는 게 대단한 겁니다. 모든 게 10월 유신을 전후에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10월 유신을 전후에 드러나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정부와 밀착해 있다고 비난받던 유진산은 10월 유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선명야당을 표방하던 40대 기수들 중 김영삼을 제외하고는 김대중과 이철승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도망쳤습니다. 유신을 하루 전에 안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김종필 총리도 몇시간 전에 통보받았을 정도입니다. 야당의 두 사람은 어떤 채널을 갖고 밀통하고 있었기에 유신철퇴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진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젊은 후배들도 많이 키우고 긴 안목으로 정치를 할 줄 아는 정치인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진산이 그 같은 정치를 한 겁니다. 진산 같은 정치인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진산을 다시 평가할 것으로 봅니다.”

“전두환과 만나 지역구 민원 해결”

-본격적인 정치는‘김영삼계’로 시작하셨습니다.

“솔직히 10대 국회에서 김영삼계는 비주류라 공천받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친분이나 정치철학이 맞아서 김영삼계로 정치를 시작한 겁니다.”

-김영삼과의 친분이 두터웠습니까.

“내가 미국가기 전 선친이 원내총무 할 때였어요. 그때는 우리 집이 종로였는데 김영삼이 자주 왔어요. 선친이 김영삼을 수제자처럼 대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지요.”

유 전 의원은 이 대목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김영삼이 미소년처럼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생긴 건 그런데 투쟁은 늘 선봉에 섰다. 그래서 선친이 좋아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정치철학은 어떤 게 맞았습니까.

 ▲유 전 의원은 김대중과 이철승은 유신정권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당권경쟁에는 이철승 신도환 고흥문 김영삼 등이 나섰는데, 그들 중 가장 선명하게 유신헌법 개정을 목표로 제시한 사람은 김영삼뿐이었습니다.”

1976년 9월 당수 자리에 오른 이철승은 당 요직에 자파세력을 심은 반면 김영삼계 인사들은 변변한 직책을 얻지 못했다. 이뿐아니라 10대 총선 공천에서도 이철승은 철저하게 자기사람심기에 바빴다. 10대 국회에 입성한 유한열은 김동영 이택돈 정재원 김현규 최형우 이기택 등과 ‘자주민주구락부’를 만들어 김영삼 노선을 걸었다.

그리고 1979년 5월 전당대회를 통해 김영삼은 당수에 복귀했다. 김영삼이 당수에 복귀하자 박정희는 ‘김영삼 제거’에 들어갔다. 결국 반박정희 노선을 걸었던 김영삼은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총재직과 의원직을 잃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이 부메랑이 돼 박정희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정치규제’에 묶였습니다. 그렇지만 유 전 의원께서는 11대에 민한당으로 당선됐습니다. 규제에 묶이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1980년 9월 IPU(국제의원연맹) 총회가 동베를린에서 열리게 돼 있었습니다. 한국은 계엄사태에 의해 국회가 기능을 정지당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이때 국회 부재 그리고 광주사태를 이유로 대한민국을 IPU에서 축출하려는 공작에 나섰습니다. 대한민국 국회가 IPU에서 축출되면 UN 업저버 자격도 상실됩니다.

공화당 박준규 의장을 만나 ‘대한민국 국회가 IPU에서 쫓겨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박 의장이 전두환인지 누군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만난 후 IPU에 참가할 수 있다고 나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공화당에서는 박준규 이동원 이종률 등이고 신민당은 나를 포함해 엄영달 조세형 정대철 오세응 의원 등이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당국에선 야당 의원 중 유한열 의원만 갈 수 있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당시 IPU 이사국은 우리나라를 야만국으로 봤습니다. ‘대한민국, 그게 나라냐, 야만인이 사는데 아니냐’고 말 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을 설득해 우리나라가 IPU에서 축출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정치규제에 묶이지 않은 것이지 투쟁성이 약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정치규제로 묶어 정치활동을 막았다. 다만 심사를 통해 1980년 11월 22일 정치활동이 가능한 2백 68명의 구제자 명단을 발표했다. 그 안에 유한열이 끼여 있었다. 

-11대 국회에서 제1야당의 사무총장을 맡았습니다. 사무총장 시절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습니까.

“‘김영삼 가택연금을 풀어 달라’고 전두환을 만나러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내가 내선거구인 금산과도 관계되는 민원하나를 얘기했습니다.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문제인데, 원안은 일제 때부터 검토된 노선인데 옥천 출신 박준병 의원이 옥천을 거치도록 압력을 행사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이 얘기를 했더니, 전두환은 그 자리에서 건설부 차관한테 전화를 걸어 원안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지역민원 하나 해결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청와대를 나서려고 하니까, 전두환이 흰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얼마입니까’라고 물으니, 전두환이 ‘1천만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시려면 좀 크게 도와주십시오. 물론 내 개인적으로 받겠다는 게 아닙니다. 당에 후원 좀 해 주십시오’했더니 며칠 뒤 정말로 정당후원금을 보내 준 사실이 있습니다.”

“양김한테 몰려가서 충성경쟁 벌이는 의원 싫어 탈당”

-1985년 12대 총선에서 제1야당이던 민한당은 신민당 돌풍에 무너집니다. 그리고는 신민당에 백기투항 해 들어갔지요.

“12대 총선을 앞두고 민한당 사무총장을 맡았을 때입니다. 김영삼을 만나니까 ‘무조건 탈당해라’고 합디다. 그래서 내가 ‘민한당 사무총장인데 어떻게 탈당을 합니까’라고 하니까,‘ 늦게 오면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선거전 초반에는 신민당 지지가 별로 높지 않았습니다. 후반에 들어서면서 신당 바람이 불었고, 민한당은 선거에 대패를 했습니다. 유치송 조윤형 등 지도부가 거의 낙선했습니다. 지도부 중 살아남은 유일한 당선자가 나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민한당의 수명이 보였습니다.”

-당대 당 통합을 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당시 나는 조윤형과 당 진로를 두고 의논할 작정이었는데, 조윤형이 나를 보고는 대뜸, ‘내가 총재를 맡고 당신은 수석 부총재를 맡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총재는 경쟁을 합시다’고 하고서는 총재 경선에 나섰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김대중의 계략이었습니다. 김대중은 당시 민한당을 김대중 정당으로 존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신민당에서 유 전 의원은 ‘신보수회’를 이끌던 계파 수장이었습니다. 86년 직선제 개헌투쟁이 한창일 때 민중 민주당을 만들어 탈당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반인들은 정부여당의 공작에 유 전 의원이 넘어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국회의원)들은 정치인이 아니야. 밤만 되면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몰려가서는 충성경쟁하기 바빴지. 그러니 내가 하도 꼴 보기 싫어서 동지들 규합해서 양김으로부터 해방되자며 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양김이 나보고 ‘장세동이한테 돈 먹고 정당 만들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이민우 파동 후 양김이 신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만들었을 때 나는 신민당으로 컴백했습니다.”

-이민우 파동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그건 홍사덕이 작품이야. 이민우가 김대중 사면복권, 지방자치제 실시 등 민주화 7개항이 이뤄진다면 개헌협상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한 게 문제가 돼 나중에 분당까지 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거 홍사덕이 만들어 와서 이민우한테 제안한 겁니다. 이민우가 ‘알았다’고 하니까, 홍사덕이 주도한 겁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이민우 총재가 개헌협상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설사 내각제를 받겠다고 말했어도 징계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개헌 논의를 하고 그 과정에서 당론이 내각제를 받자고 하면 받는 것이고, 당내 다수가 받을 수 없다고 하면 그만 두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분당까지 가게 됐나요.

“그건 김대중 계략입니다. 그때 김대중이 김영삼에게 ‘이민우와 김대중 중 하나만 택하라’고 하니까 김영삼이 당에서 이민우를 축출하는 대신 신민당을 떠나 새로운 당을 만든 겁니다.”

1986년 개헌정국에서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선(先)민주화 후(後)내각제 협상용의’라는 발언을 해 파문을 몰고 왔다. 그해 12월 24일 이 총재는 자신의 삼양동 자택에서 “정부여당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내각제를 주장한다면 협상용의가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김대중씨의 사면복권과 지자체 실시 등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당시 신민당의 당론이었던 ‘대통령 직선제’와 정면으로 배치돼, 파문을 몰고 왔고 종국에는 분당으로 치달았다.  이 사건은 이민우 구상 혹은 이민우 파동으로 불리며, 현재까지도 정치사에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홍사덕 의원은 YS와 DJ가 분당해 통일민주당을 만들 때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 양반이 웃긴 사람이야, 자기가 만들어 놓고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나 몰라라’ 한 거지.”

-1987년 대선이 끝나고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습니다. 당시는 강력한 4당체제였는데 당선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내가 공천을 받으려면 김영삼한테 받아야 될 게 아닌가. 그런데 당시 우리 셋째 형님(유동열)이 충청도에서 통일민주당으로 출마한 겁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나온 겁니다. 금산에서 출마했는데 JP(김종필) 바람이 무섭게 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JP한테 전화해서 ‘당신이 금산에 들어오면 내가 할복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아무튼 JP가 금산에서 정식 유세는 하지 않았습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치러진 14대 총선에서는 민자당 간판을 가지고 낙선했습니다.

“민심이 무서운 겁니다. 나야 야당조직인데 여당에 들어가니까, 이들이 ‘잘 먹고 잘살라’며 삐딱하게 구는 겁니다. 여당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이권이나 부탁하고 해서 내가 멀리하니까 이쪽저쪽 모두 표를 잃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거 막판 집사람한테 돈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어차피 당선되는데 돈은 무슨 돈…’, 그래서 그때 ‘내가 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개표를 해보니 80표차로 낙선한 겁니다.”

“이회창, YS 만남 거부로 대선전서 DJ에 패”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캠프에 합류한 것으로 압니다. 이회창의 패배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유 전 의원은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은 김영삼과의 만남을 거부해 낙선했다고 밝혔다
“이회창이 김영삼 대통령과 등을 졌기 때문입니다. 이회창 캠프의 중심멤버들이 공공연히 YS를 헐뜯고 다녔습니다. 대표적인 게 ‘YS가 이인제를 부추겨 출마시켰다’고 욕을 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쯤이지. 대구에서 열린 대회에서 ‘김영삼은 당을 떠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강재섭 등이 주동한 건데, 그때 YS 인형을 만들어 화형식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회창 후보 만나서 ‘YS와 만나 도움을 받으라’는 메시지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회창은 ‘YS와 손잡으면 표가 떨어진다는데요’라고 말합디다.

그래서 내가 표가 절대로 달아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후보가 ‘그럼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해서, 내가 ‘YS와 친한 김윤도 변호사를 통해 다리를 놓겠다’고 하니까, 이회창도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YS와 이회창 후보와의 만남을 주선했지.”

-대선전 YS와 이회창은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내 얘기를 들어봐. 그런 일이 있은 후 내가 이회창 집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이상득 서상목 등이 모여 앉아서 ‘YS가 지지하면 200만표가 달아난다’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틀이 지난 후 김윤도 변호사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회창 후보가 YS 만나는 것,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저쪽(이회창)에서 전갈이 왔습니다’고. 그때 내가 생각했지. 이제 대통령은 김대중이구나.”

-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캠프에 합류해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는데 실패했습니다. 당시에도 유 의원은 JP와의 연합을 주장했는데, 성사가 안됐습니다.

“5년 전 김영삼을 만나지 않아 실패한 것을 상기시키며 무조건 JP를 껴안으라고 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용환이 결사반대에 나선거야. 김용환이 ‘JP를 만나러 가려면 나를 깔아뭉개고 가라’며 길에 누웠습니다. 이회창이 또 흔들렸어, 주위에서는 ‘JP 만나면 200만의 젊은 표가 달아난다’고 펌프질을 해대니…. 아무튼 이회창은 사고가 단조로워, 자기수신이 더 필요한 사람이야.”

-2002년 이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이회창 얼굴 보기도 싫어서, 밖에 있다가 2007년 대선 앞두고 고건, 이 양반 대통령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해 조직을 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이 비판하니까 꽁무니 빼고 출마를 포기한 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2012년 총선에 출마계획이 있습니까.

“아직 모르겠어, 당적은 한나라당 상임고문인데, 충청도에서 한나라당 인기가 없는 것 알잖아. 심대평과 함께 뭐 좀 만들려고 생각 중이지.”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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