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4)]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YS는 지역주의에 대해 많은 고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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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4)]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YS는 지역주의에 대해 많은 고뇌를 했다”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06.24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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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처음으로 산상기도, 이후 민산 전통…정채권 심의석 돌아가며 기도월계수회 폐해 고려해 문민정부 후 민산 해체…YS 정치사에 아쉬운 대목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YS는 한국 정치사의 거목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YS는 부산·경남(PK)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YS 본인과 한국 정치사에 있어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YS가 이끈 민산은 어떠했을까. 민산은 처음에는 전국 조직으로 출발했다. 이와 관련해 민산 연수원장을 역임한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 회장을 만나 구체적 얘기를 들어봤다. 노병구 전 회장은 박정희와 김대중(DJ)에 대해 쓴 소리를 늘어놨다. 그러면서 지역주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YS의 고뇌도 털어놨다. 인터뷰는 2011년 6월 1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


“민주산악회 중심에는 김영삼(YS)이 있었다”

 

- 민산은 전국 조직으로 출발했습니까.

"당연하지요. 그 때 민산은 전국 단위 조직으로 기초자치단체마다 지부가 있었고 지부장과 지부 간부들은 모두 연수원에서 ‘심의석’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YS와 함께 한 사람들이 호남 각 지부에 많았어요. 그런데 지역감정 때문에 그 사람들이 전라도에서 버텨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민산에서 탈퇴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심의석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DJ와 함께 했으면 지역감정 타고 국회의원도 했을 텐데 그렇게 안했습니다. 신앙적, 정치적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고심했던 사람입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재무부에 있다가 정치를 했는데, 아마 계속 공직에 있었다면 장관까지도 했을 겁니다. 심의석은 민산에서 조직위원도 하고 민산에서 운영하는 연수원 교수도 했던 사람입니다."

노병구 전 회장이 말하는 심의석은 전남 여수출신으로 서울대 법대 졸업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해 재무부에서 근무하다 1964년부터 (주)해동화재 해상보험 사장을 역임한 뒤 11대 때 순천고 동기이자 당시 민한당 조직위원이었던 허경만 전 전남지사의 권유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심의석은 민산에 참여해 ‘여수산악회’를 만드는 등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심의석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심의석은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으로부터 평민당 입당권유를 받았다.

순천고 동기인 허경만 전 지사가 심의석을 DJ 동교동 자택 지하 서재로 끌고 갔다. 김대중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DJ는 ‘공천’ 등을 약속하며 입당권유를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이때 DJ가 허 전 지사에게 “당신은 정치할 자격이 없다. 친구하나도 설득 못하는데 무슨 정치를 하겠소”라고 핀잔을 줬다.

“박정희가 시작한 지역주의, DJ가 활용”

- 지역감정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지역감정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한 후에 조장한 것입니다. 만약 지역감정 조장 없이 정상적으로 선거가 치러졌다면 박정희는 졌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꾀를 낸 것입니다. 7대 대통령 선거 때 영남에서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전단을 뿌려서 영남 사람들의 마음에 지역감정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에 DJ가 정치에 필요하니까 지역감정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DJ가 YS와 단일화했다면 지역감정을 없앨 수 있었는데, DJ는 지역감정의 수혜자가 될 수 있으니까 YS와의 단일화를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뤘습니다."

- DJ 입장에서는 YS와 경선을 치를 경우 패배할 수 있어서 그렇게 한 게 아닐까요.

"만약 경선을 했다면 YS가 후보가 됐을지 DJ가 됐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DJ가 됐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YS는 무척 공정한 사람입니다. 미창당 지구당 36개를 5대5로 나눠서 경선을 치르자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DJ는 '4자 필승론'에 빠져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DJ는 '4자필승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YS가 자기와 함께 나와야 대선에서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결국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순으로 선거 결과가 나왔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당시 통일민주당은 92개 지구당의 경우 미창당 지구당 36개를 제외하고 30대26으로 김영삼계가 우위에 있었다. 이때 동교동측 협상자로 나선 이용희는 미창당 지구당을 동교동 20개 상도동 16개로 나눠 임명하자고 했고, 상도동측 협상자인 고(故)김동영은 “창당지구당 중 30개의 지구당 위원장이 다 우리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며 동수인 18개씩 나누자고 했다.

이에 후보단일화 협상이 이 문제로 늦춰지자 김영삼은 1987년 10월 22일 외교구락부에서 김대중과 만나 “당신이 원하는 데로 미창당 지구당 중 20곳의 지구당위원장을 임명하라”고 양보했다. 하지만 DJ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DJ가 거부한 것은 ‘4자필승론’의 논리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노 전 회장이 아마도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 얘기가 나왔으니 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신민당 후보로 DJ가 당선된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요.

"7대 대통령 선거 때 YS가 박정희와 붙었다면 확실하게 이겼을 것입니다. 당시 신민당 유진산계와 이재형계가 YS를 밀기로 했으므로 YS가 대통령 후보가 될 게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박정희가 그것을 겁낸 겁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가 작용을 해서 DJ가 후보가 되도록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재형이 김영삼을 지지할 경우, 대림산업을 세무사찰 하겠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중에 이재형은 YS에게 '중정의 지시를 거부하기 힘들었다'라고 고백했다. 이와 관련 'YS와 붙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박정희가 호남 출신 DJ를 야당 대선 후보로 만든 다음, 영남에서 지역감정을 일으켜 이기려는 전략을 세웠던 게 아닌가'라는 추측도 제기된다. 이재형은 전두환 정권 시작 때인 11대와 12대 두 대에 걸쳐 국회에서 국회의장까지 했다.

- YS는 지역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YS는 지역주의에 대해 고뇌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지역주의는 너무나 견고한 상태였습니다. 1987년 대선 때 YS가 광주로 내려가 연설 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유세 단상 아랫부분은 합판으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불을 지르곤 했습니다. 또, 시내 곳곳 벽에 붙어있는 YS사진은 모두 '박박' 긁어서 없어졌더라구요. 이런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서는 YS와 DJ가 하나가 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DJ는 지역주의를 이용했습니다. DJ는 민주화 보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약었어요. 하지만, YS는 민주화가 최대 목표였습니다."

- YS가 대통령이 된 뒤 지역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한 게 있습니까.

"YS와 우리들 생각은 군사반란세력은 이제 정치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3당 합당에 따라) 그 사람들 표 가지고 당선이 됐으니 YS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민정계 75%를 모두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 박정희·전두환 시절 사람들중에는 영남 사람들이 많아요. 또, YS가 호남 쪽에 아무리 애정을 보여도 호남 민주공화국처럼 돼 버린 상황을(극복하기 어려웠어요.) YS도 한계에 직면한 것이죠. 그래도 YS가 민주계를 가지고 활용을 많이 했어요. 광주를 성지로 만들었어요.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자리매김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5·18 묘역에 적힌 그런 내용의 글도 지워버렸다고 해요. 1987년 DJ가 나서서 YS와 손잡고 지역주의를 해소해야 했는데…."

- YS의 3당 합당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YS가 3당 합당을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당 합당할 때 YS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때 DJ는 야합이라고 했지요. 그 당시 내가 민주당 광명지구당 위원장이었는데 YS가 방으로 저를 불러서 3당 합당 얘기를 했어요. YS가 '도저히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DJ가 지역주의에 매달리는 한 군사주의 패거리에 우롱당할 수밖에 없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그런데 제가 '노태우가 60%, 김종필(JP)이 15%, 이 둘을 합치면 75%, YS가 25%인데 (경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봅니까'라면서 '대선후보에 대한 약속은 받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약속은 안했지만 이길 수 있다'라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그런 합당이라면 안된다'라고 하니까 내 무릎을 잡으면서 '함께 하자'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확답을 안하고 집에 가서 아내와 상의한 후에 YS와 함께 죽기로 결정했지요. 그 때 명화섭 김태룡 등 YS를 안 따라간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솔직히 YS를 안따라가고 야당을 하려면 DJ를 따라가야 하는데 DJ에 대해선 신뢰가 없었어요."

“YS가 1997년 대선 때 중립 지킨 건 사실”

- 최근 1997년 대선 때 YS가 중립을 지켜 DJ가 대통령이 됐다는 얘기가 다시 화제입니다. 정말 YS가 중립을 지켰나요.

"YS가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을 불러놓고 수사를 중단시킨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 것 때문에 YS와 이회창이 갈라진 것 아닙니까. 그 때, DJ가 대통령 못나오면 전라도에서 난리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민주동지회 회장을 할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YS를 모시고 세미나를 했는데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강연을 하다가 'YS가 여기 앉아 계시지만 YS에게 섭섭한 것을 얘기 해야겠다'라며 '왜, DJ가 당선되도록 했습니까. 섭섭합니다'라고 말합디다. 그 걸 봐서도 YS가 중립을 지킨 것은 틀림없습니다."

- YS와의 산행에서 특별히 기억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민산 회원들과 함께 YS가 산을 올랐는데, 갑자기 '기도 합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산상기도'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YS는 산상기도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감옥에 갇혀 있는 학생들과 민주화 인사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 '대한민국에 부정부패가 없어지도록 해달라'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산상기도'는 민산의 전통이 됐습니다. YS와 정채권 목사, 심의석 등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YS가 연금되고 정채권 목사와 심의석 등 기독교인이 산행에 불참했던 어느 날 산행 총무가 '오늘은 산상기도를 생략하겠다'고 말하자 비(非)기독교인인 이민우 총재가 '기도를 하겠다'라고 나섰습니다. 그러더니 '천지신명께 비나이다'라면서 'YS를 연금에서 풀어주시고…'라고 기도를 올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닌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린 거지요."

이 대목에서 필자는 노 전 회장에게 ‘왜 초대 산행대장이었던 정채권 목사가 민주산악회에서 이탈하게 됐냐, 전두환 정권의 회유때문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정 목사는 그게 아니고 신민당 분당사퇴를 겪으면서 ‘이민우’편에 섰기 때문에 탈퇴하게 됐다”고 말했다. 

- YS와 이민우 총재가 헤어진 배경은 무엇입니까.

"이민우와 YS는 정말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이민우 총재가 내각책임제 하기로 전두환과 합의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안그랬다고 합니다. 어떻든 전두환의 공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민우와 YS는 헤어져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 어떻게 YS계에 몸담게 됐습니까.

"원래 유진산계에 속했습니다. 유진산은 대단한 거물입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YS도 유진산계입니다. 그러다가 저는 나중에 고흥문계가 됩니다. 고흥문이 맨날 같이하자고 제게 말했어요. 반면, YS계 김동영은 'YS와 함께 하자'라고 제게 말했었지요. 결국은 고흥문계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활동이 힘들어졌고, 또 제가 보기에 고흥문이 영 못마땅했을 뿐만 아니라 의견도 맞지 않아서 시골에서 돼지 목장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도동 YS 집에 들렀는데 안에 사람들이 없는 겁니다. 장학로 혼자서 YS 수발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YS가 연금에서 풀려난 즈음인데 YS가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줘서 고맙다'라고 했어요. 자기 계보도 아닌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아주 기뻐했어요. 나도 같이 눈물을 흘렸어요. 얼마 후 다시 방문했더니 YS가 '민주광복'이라는 글을 봉투에 넣어 주면서 '내가 요즘 민주산악회 만들어서 산에 다니는데 같이 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몇번 갔는데 처음에는 이민우, 최형우 등 20여명이 있었고 나는 따라다니기만 했지요. 그러나 점점 불어나서 나중에 도봉산을 오르는데 선발대가 산꼭대기에 도착하면 마지막 후발대는 산 밑에서 출발할 정도로 많았어요. 나중에 제 목장에 장학노가 전화해서 '상도동으로 올라오라'라고 해서 다음날 YS를 만나니 나보고 '민산 조직위원장을 맡아라'라고 하는 겁니다."

 


“YS, 다정다감하고 유머러스한 사람”

 

- 당시 정권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 때 경찰이 산에 올라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형사들이 '산에 무엇 하러 다니냐'라고 물어보고는 했어요. 일반 사람들 같으면 겁이 나서 산에 못 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정당 생활을 해본 사람이기에 '산에 다니는 것 가지고 왜 뭐라고 하시오'라며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YS는 산을 아주 잘 탔습니다. 그리고, YS가 굉장히 '유머러스'했습니다. 그 때 산에서 밥을 해먹고는 했는데, 각 조별로 4~5명씩 식사를 했습니다. YS는 밥을 빨리 먹은 뒤 각 조를 돌면서 별 얘기를 다했습니다.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옷차림도 저희들과 똑 같았습니다. 똑같이 배낭 메고 다녔습니다. 제가 YS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건강’입니다.”

-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민산 해체 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산해체는 솔직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당선되고서 닷새 정도 됐는데 최형우가 YS의 뜻을 우리에게 전했어요. 노태우 정권 때 월계수회 폐해를 얘기하면서. 그래서 막 항의하고 했지요. 그래도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칼국수라도 먹으면서 깨끗한 정부를 위해 해체하는 게 어떠한가라고 예의를 갖춰 물으면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민산 때문에 집까지 판 사람들도 있었는데…, YS의 정치사에서 한 가지 흠이라고 생각합니다."

- 평소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이십니다. 계기가 있나요?

"저는 원래부터 정치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27세 때 영등포 교회에서 가난한 애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동네 유지들과 자주 만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5·16이 난 뒤에 형사들이 찾아와서 자신들에 대한 협조를 요구했습니다. 그 때 학교 이름이 고등공민학교였는데 그 때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싫어했습니다. 나는 '협조 못하겠다'라고 했고 그랬더니 점점 옥죄어왔습니다. 제가 반(反)박정희로 돌아서게 된 계기입니다. 제가 공화당 조직 서명을 거부하자 경찰서 사찰계에서 매일 와서 괴롭히는 겁니다. 선생 충원도 안되고 그랬습니다. 그 뒤로 저는 마이크를 잡고 박정희를 비판하게 됩니다."

-YS는 박정희에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

"YS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26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겁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중에 국회의원 그만두고 싶은 사람 없다'라며 '어떤 나라는 몇 백만 깔아 뭉겠는데 탱크로'라고 말하자 김재규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하며 권총으로 사살하고 박정희 머리에도 권총 3발을 쐈는데, 얼굴이 뭉개져서 주치의 데려다가 박정희인지 확인하는데 1시간 걸렸다. 그러면서 YS가 '독재자는 이렇게 죽어야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론조사를 해보면 국민들은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여깁니다. 반면 YS는 낮은 점수를 받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도 지역감정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또 수십 년 동안 '반란과 유신의 버스'에 타고 오다 보니 거기서 덕본 사람들이 많고 덕을 못 본 사람들도 그게 정상적이 세상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란과 유신의 버스'를 오래 타서 관성이 붙은 것 같아요. 그리고 박정희가 쓰러진 건 YS 때문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YS를 싫어할 겁니다.”

-박정희가 고속도로를 놓은 것은 잘한 일 아닙니까.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우리경제가 커졌습니까. 그 걸 누구 돈으로 했습니까. 왜정 때 우리 2~3천만 동포가 피 흘린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입니다. 사람들이 그 걸 박정희가 한 걸로 생각합니다. 그 때 일로 해서 정신대 배상금도 아직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박정희의 한-일 회담은 완전히 망친 겁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이후에 오히려 경제가 더 급성장해서 2만 불~3만 불 바라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없는데 경제는 더 빨리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YS는 돈 문제에서 정말 깨끗했습니까.

"YS는 '10원도 안받겠다'라고 했는데 사실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민주동지회 하는 것을 YS에게 찾아가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YS가 '열심히 하라'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동지회 신년회를 하면 몇 천만 원이 듭니다. 하지만, 민주동지회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제가 회비를 만 이천 원씩 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YS가 '미안해서 어쩌노. 돈 들어가는 거 나도 다 아는데 나도 돈이 없다'라고 말하는 거에요. 정말 그렇습니다. YS는 화환 같은 것도 안보냅니다. 지금 YS는 정부에서 나오는 돈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화한 한 개에 15만 원 정도 하는데 그 걸 보내다 보면 생활이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보내야 하는 경우에만 보냅니다. 다른 동지회원들이 제게 화환 얘기 좀 YS에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이유를 얘기 해줍니다."

-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YS, DJ 세 사람은 여의도에 엄청난 군중을 모았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요.

“그 때 제가 경기도 광명 선거대책위원장 이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당 부녀회원들은 베짱이 두둑해서 상자에 구멍을 뚫어 모금함을 만들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 몇 백 명이 모였습니다. 그 만큼 민주화 요구가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태우는 돈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민정당 광명시 지구당 위원장이었던 윤항렬이 얘기하는데 10만 원짜리 수표로 1억8천만원을 받아서 10만원씩 나눠주며 사람을 모았는데 여의도 유세가 끝난 뒤에도 4천만 원이 남았다고 해요. 완전히 군사정권의 돈 선거였지요. 그러나 YS와 DJ가 사람을 모은 것은 민주화 열망에 힘입은 거라고 생각해요."

-YS가 내년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할까요.

"YS가 누구를 지지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민주화가 완전히 정착되고 실현되기 위해서 누가 돼야할까'라는 것에 근거해서 결정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YS보고 전직 대통령이니 가만히 앉아서 보시기만 하라고 하는데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YS 머리속에는 민주주의, 도덕성, 합법성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었어요. 이를 몸소 실천하려는 정신자세를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교회 장로여서 그런지 성경말씀을 자주 인용했어요. 그런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몸 바친 분이에요. YS는 투명하게 시장경제를 이끌 사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제대로 정착시킬 사람을 바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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