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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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9.1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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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1. 김영삼 총재가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되찾은 후 목숨을 걸고 대여투장을 벌여 박정희 대통령이 서서히 코너에 몰리기 시작하자 박 대통령과 그 주변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가장 신성해야 할 법관들까지도 중앙정보부의 시녀로 전락해 얼토당토않은 구실로 김영삼 총재의 총재직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리고, <뉴욕타임스> 기자와 회견한 내용을 트집 잡아 국회의원직마저 박탈했다.

그로 인하여 부마사태가 일어나자 극도의 불안을 느낀 그들은 핵심들끼리 권력의 암투를 벌였고,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핵심 중 핵심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불행한 일이다.
 
1979년 8월13일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1979년 10월4일 김영삼 의원 국회에서 제명, 의원직 박탈
1979년 10월16일 부마사태 발생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
 
김영삼 총재가 당권을 되찾은 지 5개월, 김영삼 총재의 직무정지 가처분 결정에서부터 2개월, 김영삼 의원의 국회의원직 박탈이 계기가 되어 부마항쟁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대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권력내부의 암투로 김영삼 의원의 의원직 박탈로부터 불과 22일 만에 박정희 대통령은 최후를 맞았다.

권력의 최고정점에 올라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먼저 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본인 또한 부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으니 개인적으로 얼마나 가엾고 불행한 일인가!

4·19 혁명으로 세워진 합헌적 민주정부인 민주당정권을 1년도 못되어 무능하다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고, 반공과 안보가 걱정이라고 내세우며 합법을 위장한 강압수단으로 시상조치 긴급조치를 발동해 국민을 탄압하며 눈만 뜨면 안보, 안보 하다가 결국 자기 자신의 안보도 챙기지 못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대통령을 두 번만 하고 말았다면 비록 5·16은 일으켰다 해도 그동안의 업적은 본인과 국가에 크게 이바지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1979년 12월12일, 부당하게 결정되었던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취하되어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 총재로 원상회복되었다. 참으로 세상일은 모를 일이고, 하나님은 무심치 않았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죽었다
 
#2. 김영삼 총재는 산에 올라가 정상에서 산행식을 하며 자주 말했다.
“산에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지 못하면 등산이 아니다. 따라서 산에 오를 때는 내려갈 때의 안전을 대비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어렵다.”

이것은 단순한 말 같지만 산은 우리에게 무한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10·26 이후 어느 자리에서 김영삼 총재는 지난날 신민당 총재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가진 여야 영수회담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민주회복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김영삼 총재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 총재님, 저 창밖을 보십시오. 지금 가을로 접어들어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지는 쓸쓸한 모습이 마치 깊은 산중의 절간 같지 않습니까? 마누라는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마누라도 없는 이곳에서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혼자 살고 있는 내가 무슨 욕심이 더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김 총재님께 굳게 약속을 하려고 하는데, 이 약속 내용에 대해서는 사나이와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서로 지키자고 약속을 해주셔야겠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영삼 총재는 한 인간으로서 측은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말씀을 해보십시오.”
“나도 절간 같은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이 없습니다. 대통령 직선민주화? 내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알려지면 권력지향적인 똥파리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요동을 칠 것입니다.
 
이런 가능성도 막고, 주변사람들을 설득하며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민주화는 꼭 해놓고 물러나겠습니다. 김 총재께서 지금 나가시더라도 민주화에 대해 우리 두 사람이 한 약속은 발표하지 마시고 무덤까지 가시고 가기로 약속하십시다.”

눈물을 글썽이며 사정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태도가 측은하기도 하고 진지해 보여서 김영삼 총재는 “그렇게 합시다!” 하고 약속을 하고 나왔다.

그 후 민주화 방침을 뺀 영수회담 합의사항 발표를 보고 신민당 내 비주류나 많은 국민들이 얻은 것이 없다고 김영삼 총재를 비판했다.
김영삼 총재는 박정희의 민주화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렸지만 허사였다고 말했다.

“내가 그때 언제까지 하겠다는 시한을 정하지 않고 나온 것이 실수였다. 하지만 눈물을 글썽이며 마누라도 총에 맞아 죽고 어린아이들만 데리고 그 넓은 청와대 안에서 혼자 사는 고독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데 그 태도가 너무도 진지해서 그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김영삼 총재도 숙연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김영삼 총재도 눈물을 글썽이며 민주화를 자기가 할 수 있게 해달하고 한 박정희 대통형의 진지한 태도를 믿었다고 했는데, 나도 믿고 싶다. 그래서 박정희의 10·26은 더 불쌍하고 한심하다.
 
10·26 없이 그냥 물러날 수도 없었거니와 만약 그냥 물러났다면?
 
#3. 박정희는 처음부터 내려갈 생각이 없었고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18년이나 앞만 보고 달려왔다. 너무 높이 올라왔다. 내려갈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박정희는 10·26이 없었으면 강압으로 얼마를 더 버텼을까? 탱크로 몇 만의 국민을 밀어붙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릿고개를 없앴다고, 경제를 살린다고 한국적 민주주의니 어쩌니 하면서 “한국놈은 맞아야 한다”고 두드려 패면서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 고 민주정치를 깔아뭉갠 정답이 10·26이 아니겠는가?

10·26이 없었으면 박정희정권은 4·19보다 훨씬 강력한 국민의 저항을 받고 비참하게 무너졌거나, 아니면 강권통치를 더욱 강화시켜 국민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불행은 안됐지만, 10·26은 결과적으로 더 큰 불행을 사전에 막은 사건이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은데, 어떻든 다시는 쿠데타 같은 정변도, 10·26 같은 비극도 있어서는 안 된다.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주체라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불법단체가 자의로 만든 최고회의법을 ‘악법도 법’이라며 복종을 강요했을 때, 우리나라의 종교적·사상적 민권운동의 지도자 함석헌 선생은 “아비 때려 죽여 놓고 제사는 왜 지내!” 하며 쿠데타에 항거하는 연설을 했다고 해서 감옥에 갔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쿠데타,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 계엄령, 유신 등 강압수단을 적당히 바꿔가며 선포하고 언론말살, 불법·무법의 강권통치로 일괄하여 사실상 자유민주주의 하에서는 당연히 배척하여 없어져야 할 리더십이다.

독재는 안 된다. 공산독재는 더욱 안 된다. 전통적 자유민주주의만이 우리의 살길임을 우리는 철저하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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