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의 時代架橋] 하노이 회담 결렬 후폭풍과 한반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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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時代架橋] 하노이 회담 결렬 후폭풍과 한반도 정세
  • 이병도 주필
  • 승인 2019.03.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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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협상 결렬 암운
‘천리마 구역’ 대규모 비밀 핵시설 새 쟁점
北 비핵화 험로 확인...새 로드맵을
韓·美는 훈련까지 폐지 국방공백 논란
北 진정성 관건...逆파장 극복 집중 중요
대한민국, '北 비핵화' 앞장서 요구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병도 주필)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됐다. 실질적인 핵 담판의 무산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차 정상회담을 통한 비핵화 합의가 예상 밖으로 불발된 것이다.
북한의 구체적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치를 담을 것으로 예상됐던 '하노이 선언'은 진통 끝에 유산되고 말았다.
사실상 외교적 참사로 끝났다. 한반도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한국과 북한, 미국 모두에 적잖은 정치·외교적 부담만 남겨 놓았다. 후폭풍이 거세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설전만 요란하다.
후속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당장 성과를 장담할 수 없고, 양측 실무진이 움직일 공간도 넓지 않다. "미국 측이 협상을 다시 제기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함이 없을 것"(리용호 북한 외무상), "내 느낌으로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는 등 기싸움도 계속되고 있다.
하노이 북미 회담에서는 양측의 요구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돌아오지 못할 비핵화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북미 모두 일정한 양보를 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게 된 형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하지만, 비핵화를 질질 끌다가는 미국 내부에서 부터 동력을 잃기 쉽다.
북한은 영변 외에 다른 생산기지를 숨기고 있다가 이번에 덜미가 잡혔다. 핵을 폐기하겠다면서 뒤에서 몰래 핵을 생산해온 북의 이중적 태도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김정은은 미국 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를 만나 사실상 영변 '고철'만 내주는 '비핵화 쇼'로 제재의 99%를 허물려 했지만, 끝내 빈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북한은 미국이 요구한 ‘영변+α’의 핵 시설 신고와 폐기를 거부하지 말았어야 했다. 영변보다 훨씬 많은 우라늄 농축을 할 수 있는 평안남도 강선의 핵 시설 등을 감출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이들 시설의 신고·검증·폐기를 거부했다. ‘비핵화’가 위장 구호였음을 입증한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스스로 선택한 운명에 대해 책임질 일만 남았다.
이번 회담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전 제재 해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적잖다. 합의 무산은 지금까지 이어온 북한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에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하노이 회담은 적지 않은 교훈을 양측에 남겼다. 무엇보다 새로운 비핵화 로드맵 마련의 중요성을 확인시켰다. 북미 간 불신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비핵화와 관계정상화, 평화체제 구축의 이행은 단계적·상호적 조치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양측 실무진이 협상을 재개한다면 정교한 비핵화 로드맵부터 논의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美, “큰 비밀 핵시설 더 있다”

이미 영변 핵시설 폐쇄와 남북 경협을 위한 일부 제재 완화 및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등에 북미 양측이 잠정 합의했다는 미국 매체의 보도까지 나온 상태라 협상 결렬 소식은 충격적이다.
좁히기 힘든 입장차가 확인된 만큼 북·미 협상 재개 전망도 불투명하다.
혹여 북이 시간을 끌며 파키스탄처럼 핵 보유국이 되려 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다. 제재가 무너지면 북은 비밀 농축 시설과 수십 개 핵탄두를 폐기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다시 제재를 복원할 수도 없다. 북은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다.
북의 진짜 핵 생산 기지는 영변이 아닌 다른 비밀 농축 시설 2~3곳이다.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은 그 비밀 시설 중 한 곳을 제시하며 폐기를 요구했다. 이에 응하느냐가 김정은 비핵화가 사기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놀라면서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와관련, “영변 시설 외에도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있었다”며 “미사일도 빠져 있고, 또 핵탄두 무기체계가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합의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는 현시점에서 북한이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의 완전한 동결에 의지가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목한 영변 외 핵시설은 평양 남부 산업단지인 ‘천리마 구역’의 강선이 유력하며,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는 제3의 핵시설일 가능성도 있다.
강선에는 최대 6000개의 원심 분리기가 가동 중이어서 영변의 4000개보다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대규모 핵심 핵시설을 제외한 채 진행되는 비핵화 논의는 아무리 단계적인 접근방법을 취한다 해도 그 한계가 뚜렷하다. 비핵화의 기본 전제인 폐기 대상 핵시설의 존재조차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는 비핵화 논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북한이 내건 비핵화 약속에 조금이라도 진정성이 있다면 제2, 제3 핵시설의 위치와 규모, 활동 내용 등을 협상의제에 올리는 걸 더 이상 거부해선 안 된다.

북, 핵심 제재 해제만 요구

문제의 본질은 제재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비핵화 할 테니 제재를 풀어 달라”고 요청해 협상을 시작하고도, 온갖 위장전술로 핵 시설·무기의 리스트 공개와 검증 및 폐기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북의 속내를 꿰뚫고 있는 미국이 ‘회담 결렬’이라는 정공법으로 대응한 것이다.
북한이 뭔가 감춰놓고 합의를 시도한다면 비핵화 협상은 겉돌 수밖에 없다. 미국 입장에서는 알맹이 없는 합의를 하기보다는 일단 협상 결렬이라는 ‘차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페이스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비핵화를 견인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동안 학자나 연구기관 등에서는 북한 전역에 핵시설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으나 미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직접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 부분 폐기만으로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으니 미국의 정보력과 국제사회의 비핵화 실현 의지를 너무도 오판한 것이다.
이번에 북한이 제재 해제와 맞교환을 요구하며 내놓은 것은 핵시설 폐기에 국한됐다. 이미 보유한 핵탄두와 물질은 그대로 놔두고 추가 생산만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는 비핵화가 아니라 핵동결일 뿐이다. 그러니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근본적으로 의심받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담판 결렬 후 방송 인터뷰에서 “나는 ‘진짜 (비핵화) 프로그램’ 없이는 제재를 포기하길 원치 않는다. 그들은 그(진짜 비핵화)에 대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회담 결렬 이유는 분명하다. 북한이 모든 핵을 폐기할 뜻도 없이 제재 해제만 줄기차게 요구한 탓이다.
북한은 영변의 플루토늄·우라늄 농축시설을 폐쇄하는 대가로 유엔 제재 11건 중 5건의 해제를 미국에 요구했다. 숫자로는 절반이 안 되지만 5건은 북한 경제의 목줄을 죄는 핵심 제재에 해당한다. 반면 북한이 카드로 내민 영변 핵시설은 2008년 ‘냉각탑 폭파 쇼’를 벌인 곳이다. 이미 낡아빠진 핵시설을 미국에 다시 비싼 값에 팔려다 퇴짜를 맞은 꼴이다.
여기에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미·북 간 거래 목록의 불균형이 회담 결렬 요인이라면 재협상의 여지는 커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후속 대화의 여지를 남긴 건 그래서 다행이다.

파장 예측 불가

앞으로의 추이가 주목된다.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원인을 놓고 미국과 북한 간에 엇갈린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경제제재 완화’와 관련해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민수(民需)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을 먼저 해제하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측은 이에 대해 “말장난”이라며 “실질적으로 모든 제재조치 해제를 요구한 게 맞다”고 거듭 확인했다.
파장은 예측 불가다. 당장 후폭풍이 어느 정도일지, 한반도 정세에 끼칠 영향은 어떨지 점치기 어렵다. 북미관계가 상당 기간 냉각기를 가질 가능성이 있으며,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올해 초 김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미국이 제재·압박을 유지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음을 사실상 경고해 뒀다는 점이다. 북한이 그동안의 노선을 바꾼다면 작년 봄 남북정상회담 이후 풀렸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급격히 경색될 가능성도 있다.
궁지에 몰린 북의 대응책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부쩍 유화적 태도로 나오는 한국 정부를 더 회유하며 한·미·일 등 자유주의 진영 동맹을 이반시키려 할 것이다. 남한의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내 경제난을 버텨내는 전략을 노골화 할 가능성도 크다.
향후 벌어질 사태가 걱정스럽다. 이번 회담은 김정은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남북경협 등을 추진하고 북한 경제를 일으켜 세우려면 제재 해제가 절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회담 결렬 책임을 미국에 떠넘길 것으로 보인다. 강경 노선으로 회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이 도발이나 압박을 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키리졸브·독수리 훈련 폐지 후유증

그런 점에서, 회담 결렬 이틀 만에 한미간에 키리졸브(KR)·독수리 훈련(FE) 사실상 폐지 발표가 나온 점도 걱정스럽다. 연합방위체제가 약화될 중차대한 위기에 놓였다.
키리졸브 연습은 11년 만에, 독수리훈련은 4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두 훈련은 한미연합방위태세 유지를 위해 매년 초 시행해 왔던 2대 핵심 훈련이다. 매년 8월 실시해온 을지 프리덤 가디언 연습이 작년부터 유예된 데 이어 키 리졸브, 독수리 훈련까지 폐지함에 따라 한·미 연합사 차원의 3대 훈련이 모두 없어지는 셈이다.
연합훈련은 한·미연합사령부 및 주한미군과 함께 한미동맹의 3대 지주다. 당연히도 연합훈련을 줄이면 그 영향은 주한미군 감축과 연합사의 전투력 저하로 이어진다. 훈련하지 않는 부대는 전투력이 떨어지고, 그 존재 가치도 유명무실해 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대규모 실기동훈련인 독수리훈련 종료는 한·미 연합방위능력을 저하시킬 가능성이 크다. 국군과 미군이 손발을 맞출 기회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용 부담을 내세워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되풀이한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 한 부활될 가능성은 낮은 셈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담보 없이 초래될 한미연합 방위력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문제를 제기치 않을 수 없다.
동맹마저 ‘돈의 논리’로 보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스타일도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간 우려되는 일이 아니다. 한·미 연합훈련은 한·미동맹에 필수적인 요소다. 키리졸브연습·독수리훈련 중단으로 주한미군 주둔의 명분이 떨어지고 한·미동맹이 크게 약화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당연히 제기된다.

군사훈련 카드 무력화 곤란

한미 연합훈련은 사실 북한이 꼽는 최대 위협이었다. 핵무기 투발이 가능한 전략폭격기와 항공모함 등 전략자산이 대거 전개되기 때문이다.
연합훈련 실종은 대북 군사 대비 태세의 해이, 나아가 동맹의 이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게 만든다. 가뜩이나 전시작전권 전환과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훈련 공백이 장기화되면 연합방위능력의 실질적 저하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북한의 오판 가능성이다. 북한은 그간 연합훈련에 대해 “침략전쟁·핵전쟁 연습”이라고 반발해왔다. 작년 말엔 소규모 훈련마저 시비를 걸며 모든 군사훈련의 완전 중단을 요구했다. 평화 공세의 뒤편에서 북한은 한미 간 이간질의 성공이라고 오판할 수 있다.
‘하노이 담판’ 실패로 경비초소(GP) 철수,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 지난해 9·19 남북군사합의가 성급했다는 점이 확인된 마당에 한·미 연합군사훈련 전격 취소는 내용과 시점 모두 그렇게 부적절하다.
작년 6월 싱가포르 1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을 발표했을 때 북한이 핵 폐기를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독려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설명했었다. 그렇다면,  이번 하노이 2차 회담에서 북의 비핵화 의지가 가짜라는 걸 확인했다면 유예했던 을지 훈련도 재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반대로 남아있던 훈련마저 아예 종료한다는 것이다.
비핵화 조치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한·미 군사훈련 카드를 무력화시키면 곤란하다. 북한의 비핵화 수준에 따라 군사훈련 규모를 줄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안보만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엇이 그리 급해 전화 한 통으로 방위력을 약화시키는 연합훈련 축소·중단부터 결정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 중재역할 절실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에 따라 한국의 중재역할이 실로 중요해 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외교가 한층 더 필요하다. 협상의 여지를 남겨뒀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미국이나 북한으로서는 이제 문 대통령 중재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도 하노이 회담 결렬과 함께 분명하게 제시된 ‘기준’을 외면할 수는 없게 됐다.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제재 해제도 없다’가 그것이다. 이 기준을 어기고 남북한만 앞서 나간다면 국제 제재에 균열을 가져오고, 북핵 폐기는 물 건너갈 수 있다.
북미 간 쟁점이 분명해진 만큼 신속히 한미ㆍ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북미 간 이견을 좁히는데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핵심은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의 장’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다. 
남북 경협의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예상했던 3, 4월에 가능할 지 미지수이지만 장소가 어디든 남북 정상이 조기에 회담을 가질 필요성이 생겨난 것은 분명하다.
문 대통령은 치고 빠지는 식의 옛날식 '북한 외교'로는 협상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김 위원장에게 전해야 한다. 핵무기 목록 작성이나 신고를 통해 비핵화 노력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얻어야만 경제제재도 해소될 것이라는 점을 김 위원장에게 설득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거부했는데 ‘선제적 경제협력’을 거론하고, 군사 대비태세를 낮추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과 국민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북한 비핵화 없이는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도, 신한반도체제 구상도 공수표로 변한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대북제재 완화가 아니라 북한을 상대로 핵 폐기를 설득하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 비핵화와 제재완화의 절충안을 만들어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져야 한다. 북한 핵문제가 미국 국내 정치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미·중 패권 경쟁과 연계되는 일도 없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은 한미동맹이 빈틈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면서 경제협력에 대한 성급한 기대를 부추기기보다는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가 진전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대미·대북 전략 재구축을

문 대통령은 냉엄한 국제현실 속에서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대미·대북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뒤 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방안을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밝힌 것은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를 위반하려는 듯한 언행은 지양해야 한다.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호응을 얻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 것은 국면 전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국제사회 대북제재 연대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한·미 간 긴밀한 공조하에 필요한 역할과 지원을 다 하겠다”고 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대화해서 그 결과를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정부는 북·미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중재의 묘를 살려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떠안게 됐다.
미국과는 부실한 공조 망부터 되살려야 한다. 청와대는 대변인이 회담 결렬 25분 전 “남북대화가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문 대통령과 비서진이 북·미 정상의 서명식을 TV로 지켜보는 이벤트까지 준비했다가 망신을 샀다. 한·미 간에 정보 공유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희망적으로 과신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에만 몰두하다 보니 대미 공조 전선에 구멍이 뚫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이른 시일 안에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한·미 간 정책 혼선을 해소하고, 일치된 대북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섣부른 제재해제 요청은 실로 금물이다.
남북대화의 중요성도 커졌다. 제재 추가 완화나 경협 확대 방안 등이 여전히 북 비핵화를 견인할 유효한 카드다. 대북 지원을 골자로 한 신한반도체제 구상 등 '당근'과 함께 북한 비핵화를 위한 한·미 공조의 고삐도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실무협상 재개 다시 출발해야

트럼트 미국 대통령이 회담 재개 가능성을 열어놨지만 회담이 언제 열릴지 현재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회담 재개는 빠를 수도 있고, 빠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은 재개 시점의 방점이 후자에 찍혀 있는 듯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회담 재개의 공을 넘긴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에서 드러난 것처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가 선행되지 않으면 3차 북·미 정상회담은 마냥 늦춰질 수 있다.
협상이 장기교착 국면으로 들어간다면 대화 동력은 급속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한 조속히 실무협상을 재개해 양측이 머리를 맞대는 것이 최선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을 북-미 대화의 파탄으로 볼 수는 없다.
회담 결렬과 공방의 과정을 통해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나아가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후의 선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짚고 가게 된 점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성과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회담이 깨진 그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 밀도 있는 협상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북한과 미국이 하노이 핵담판 결렬에도 대화의 끈을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은 사실이다. 북한 매체는 2차 북미정상회담 관련 보도에서 대미 비난 대신 미국과의 '생산적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방침을 전했다.
특히 미국은 이번 결렬을 ‘미완의 합의’로 보고 “몇 주 안에 합의되길 바란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훈련은 오래전에 포기했다”며 지난해 중단한 한미 연합 훈련의 재개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제재는 계속 유지하되 더 강화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북 압박 강도를 높여 위기로 몰아가지는 않으면서 국면을 관리해 나가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미국도, 북한도 재작년 말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에 빠뜨린 대결 국면의 재연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김정은의 확고한 결단이다. 완전한 핵 폐기를 통한 정상국가화만이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현대史 교훈

지난 현대사의 교훈은 중요하다. 이번 하노이 회담의 결렬은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의 실패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헤어졌지만 치열한 논쟁을 토대로 1년 뒤 다시 만나 중거리핵전력 폐기 조약(INF)에 서명할 수 있었다. 하노이 담판의 결렬도 ‘북-미판 레이캬비크’가 돼야 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북한의 자업자득이다. 유엔 안보리는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2017년 대북제재를 대폭 강화했다. 대북 정유제품 공급 한도를 대폭 줄이고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를 송환토록 하는 등 외화벌이를 차단했다. 산업기계·운송수단·철강 등도 대북 수출금지 품목으로 묶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는 2006년 1 차 북핵 실험 때부터 시작됐지만 북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진짜 제재는 2016년 4차 핵실험 이후부터였다. 북 수출품 1~3위에 해당하는 석탄·섬유·수산물을 전부 막았고 '달러 박스'였던 해외 노동력 송출을 차단했다. 북에 유입되는 유류(油類)도 제한했다.
그 때는 중국과 러시아도 북의 핵·ICBM 도발을 더는 묵과할 수 없어 찬성표를 던졌다. 그 결과 지난해 북의 대중(對中) 수출은 전년보다 90% 줄었다. 북한 GDP는 곤두박질치고 지도부는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2016년 이후 5개 제재는 그렇게 김정은을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불러낸 제재의 99%나 다름없다. 북·미간 핵 협상이 있게된 실질적 배경이다.

북, 결자해지(結者解之) 필수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쪽은 사실 북한이다. 북한 경제를 심각한 궁핍 상태로 몰아넣은 제재조치가 기약 없이 이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북한은 수출과 수입 길이 막히면서 국내총생산이 2년 연속 곤두박질 쳤다. 생산시설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해 1990년대 북한 주민들을 대량 아사(餓死)로 몰고 간 ‘고난의 행군’이 재연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올 정도다.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국가로 발전하려면 완전한 비핵화 실행으로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북한 지도부는 곧바로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평가하고 향후 대응방안을 논의할 것이다.
북한은 하노이에서 퇴짜 맞은 제안이야말로 국제사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시간은 결코 북한 편이 아니다. 김정은이 진정 피폐한 인민의 삶을 걱정한다면 과감한 비핵화를 통해 제재 해제의 최소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것 없이는 제재와 고립의 고통 속에 핵만 껴안은 채 구제불능의 불량국가로 살게 될 뿐이다.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 귀국길에 오른 김 위원장의 왕복 7,600㎞ 열차 대장정은 전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킨 데 비해 성과가 빈약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제재가 풀린 뒤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베트남 현장을 100시간 안팎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 베트남도 그들 입장에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던 캄보디아 철군을 수용한 뒤 제재가 풀리며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
김 위원장은 전용열차를 타고 중국·베트남을 오가면서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두 나라의 발전상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이제 선택은 김 위원장에게 달렸다. 김정은이 꽉 막힌 상황을 타개할 길은 있다.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길은 핵과 미사일을 전면 폐기하는 것뿐이다. 열차 대장정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베트남 방문의 경험과 교훈을 잘 살려 ‘획기적 사변’을 만들어야 한다. 

냉각기 최소화 협상틀 재가동을

2차 북미정상회담은 구체적 성과물 없이 끝났지만 너무 비관해서도 안 된다.
북미 양측은 정상에서부터 실무진까지 충분한 의견을 교환하며 서로의 속내를 이번에 충분히 파악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매우 생산적인 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협상 결과를 차분히 평가한 뒤 너무 늦지 않은 시일 내 북미 양측이 다시 만나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
북미 간 간극이 작지 않지만, 양측이 이번 회담 과정에서 확인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이견을 좁혀가려는 노력을 펼친다면 접점 마련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양측이 협상 결렬의 충격과 냉각기는 최소화하고 조속히 다시 협상의 틀을 가동하길 촉구한다.
북이 끝내 ‘핵 보유국’으로 남을 경우 가장 큰 위협에 노출될 나라는 역시 대한민국이다. 한국은 미국이 느슨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단호하게 ‘완전한 북한 비핵화’를 요구해야 마땅하다.
북한의 최종적인 비핵화까지는 ‘긴 여정’이 될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최소한 핵과 미사일을 모두 공개하고 완전 폐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제재 해제와 함께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경제 지원이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병도는…
1952년 경남 진양에서 출생했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1979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후 1981년 연합뉴스로 자리를 옮겨 정치부 야당출입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저서로는, <6공해제>, <97년 대선 최후의 승자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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