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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 되짚기(5)> 이장우 전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이사장
"YS가 민산 해체하지 않았다면 재집권 성공했을 것"
"군정종식을 목표로 둔 변형된 정당"…"민산해체, 가을 오기도 전에 서리 맞아 죽은 셈"
"이성춘 '봉고차' 민산 활동에 큰 역할"…"YS, 산행 중 절대 앉지 않아…쉴 때도 서서 쉬어"
2011년 07월 07일 (목) 윤종희 기자 yjh_1120@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주산악회는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 조직이다. 민주화 운동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 따른다. 민산 회원들도 그런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나중에 YS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보상은커녕 이들에게는 '해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달됐다. 많은 민산 회원들이 이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YS가 자신의 최대 정치 조직인 민산을 해체한 것은 잘한 일일까? 이와 관련해 민산이 발행한 '자유의 종' 편집위원을 지낸 이장우 전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이사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이장우 전 부이사장은 '민산을 해체하지 않았다면 YS에 대한 평가가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터뷰는 2011년 7월 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 이장우 전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이사장
 
"민산은 자유시장 경제를 중시한 보수·우파"

- 민산 활동을 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제가 부산 동아대 학생회장을 했었습니다. 사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졸업 후에 삼성물산에 들어갔습니다. 태평로 1가 250 번지에 있는 당시 삼성 본관에서 일했는데 그 곳에서 5·17과 5·18을 맞았습니다. 저로서는 마음이 많이 흔들렸던 시기입니다. 삼성에 다닐 때 정보기관으로부터 사찰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동아대 학생회장 출신이니까 부마 민주화운동에 관련됐던 후배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만나서 밥도 사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부마 민주화운동 배후 인물로 의심하고는 했는데 사실 저는 배후인물은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런 거대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 경찰로부터 임의동행을 당한 적도 있다면서요.

"맞습니다. 5·17 직전에 제가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서대문에 '나비'라는 술집에서 회사 부서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있을 때 경찰이 저를 잠깐 보자면서 임의 동행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부경찰서로 가게 됐는데 저와 비슷하게 끌려온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그러다가 밤 12시가 되니까 흑백 TV에서 비상계엄선포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때 바로 내가 경찰서에 오게 된 이유를 짐작했죠. 그 때부터 구류 형태로 일주일 살다가 삼성에서 저를 보증하는 각서를 써줘서 풀려났습니다. 삼성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회사생활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그 다음해에 11대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만든 민정당과 민한당에는 갈 수 없어서 신정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습니다."

- 그럼 언제부터 민산 활동을 하셨나요.

"선거에서 떨어진 이후 인쇄·출판업을 하면서 민주산악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민주산악회 회보가 있었는데 나중에 '자유의 종'으로 바뀌었고, 이 '자유의 종'은 명실상부한 민주산악회 기관지였습니다. 저는 '자유의 종' 편집위원이었습니다. 편집위원장은 서청원이었습니다. 서청원은 11대 총선에서 민한당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12대 총선에서는 낙선합니다. 이후에 민산에 들어온 것입니다. 또 다른 편집위원으로는 최기선, 이성헌, 최주영 등이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장우 전 부이사장은 민한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YS계 인사들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서청원, 서석재, 박관용 등이 민한당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시중에는 이 사람들이 민한당이 아니었으면 국회의원이 절대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석재가 YS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려왔는데 우리 민산 회원들은 서석재가 관을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정도로 안 좋게 생각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정치규제로 묶어 정치활동을 막았다. 다만 심사를 통해 1980년 11월 22일 정치활동이 가능한 2백68명의 구제자 명단을 발표했다. 그 안에 YS계의 대표적 인사였던 신상우가 들어가 있었고, 신상우는 당시 관제야당이라고 불렸던 ‘민한당’ 공천 작업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다. 민한당 간판을 달고 국회에 입성한 상도동 인사는 서청원 서석재 등이다. 이 부사장은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 굳이 다른 정치 조직을 놔두고 YS가 있는 민산에 들어간 이유가 있습니까.

"솔직히 학생 때는 지역주의가 매우 싫었습니다. 그래서 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일도 자주 만났고 김옥두, 한화갑 등 호남출신 정치인들과도 자주 만났습니다. 하지만, 정치 현실이라는 게 이상하게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었고, 제 고향이 경남이고 친한 선배들도 그렇다보니 줄이 민산으로 닿게 되었습니다."

- DJ 쪽에도 민산과 같은 조직이 있었나요.

김상현이 자유산악회 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YS의 민산을 보고 따라 한 것입니다. 하지만 민산 수준은 되지 못했습니다. 민산 회원수가 최대 2백만 명까지 늘었던 것에 반해  자유산악회는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도동계에 대한 동교동계의 경쟁심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서청원 서석재 민한당서 당선…‘인정 못해’”

- 민산의 이념성은 어떠했나요.

민산은 좌파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진보적 우파나 진보적 색깔을 띤 보수에 불과하다고 할 것입니다. 민산은 헌법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중시했습니다. 빨치산도 좌파도 절대 아닙니다. 민산의 구체적 목표는 군정종식과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YS도 원래 보수입니다. 보수 우파입니다. 그리고, 민산은 정당의 변형된 모습입니다. 당시 법을 피해가며 만들어진 변형된 정당과 같았습니다."

- 민산에 들어갔을 때 어떤 분들이 활동하고 있던가요.

"민산 초창기에는 백두산조, 한라산조와 같이 산이름으로 조를 나누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1조, 2조, 3조 등으로 부르게 됩니다. 저는 이 때 들어갔습니다. 저보다 앞서서 노병구 선배 등이 활동하셨는데 이 분은 정말 절제된 분이십니다. 그리고 복진풍 선배는 김동영 최형우 등 YS 가신으로 불리는 사람들보다도 더 YS와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성춘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이사장의 봉고차도 민주산악회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때 자동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성춘 부이사장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하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는 했습니다. 제가 이 봉고차를 민주화운동 기념물로 보존해야 한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성춘, 이 분 기가 보통 센 분이 아니십니다."

- 산에 오를 때 기수로 활동하셨다면서요.

"민산 활동이 왕성할 때 중앙산악회가 한번 산에 오르면 50~100명이 참여했습니다. 산행대장 이우태가 1번, 기수인 제가 2번, YS가 3번이었습니다. 중간에 그런 순으로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번호를 외치면서 인원을 확인하고는 했는데 YS는 회원 수가 한 사람 두 사람 늘어가는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매주 목요일마다 산에 올랐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가사불고(家事不顧:가정을 돌보지 않는) 정신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박정태 총무가 민산을 2백만 회원 조직으로 만드는데 정말 큰 역할을 했습니다."

- 민산 깃발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죠.

"보시는 것처럼 민주산악회 깃발에 산이 세 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김영삼'의 '삼'을 의미합니다. 또 상형문자인 뫼산(山)자를 형상화 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통령 선거는 민주산악회가 치른 것입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당시 부산 수영에 100만 명이 모였는데, 민주산악회가 중심이 돼서 그렇게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0만 명은 적은 수가 아닙니다. 12대 2·12 총선 당시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광화문 인근의 한 학교에서 유세할 때 10만 명이 모이는 것을 보고 혁명의 시발을 예감했는데 이 보다 열 배나 많은 100만 명은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이날 이장우 전 부이사장은 직접 본인이 보관하고 있던 민산 깃발을 가져와 보여줬다.

   
▲ '김영삼'의 '삼'과 뫼산(山)을 형상화 한 민주산악회 깃발

YS, 평창동 저택 향해 "저놈들 도둑질 참 많이 했구나"

- YS가 산에 오를 때 특별했던 점이 있습니까?

"YS는 산행 중에 절대로 앉는 법이 없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앉지 않고 서서 쉬었습니다. 선 채로 나무에 기대어 쉬었습니다. 밥 먹을 때만 앉았습니다. 밥도 금방 먹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면서도 힘들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YS는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래서 내의를 가방에 넣어 와서 김기수가 가려주면 갈아입고는 했습니다. 한 번은 여름날 북한산을 오르는데 YS가 땀을 엄청 많이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체질상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YS가 그런 저를 보더니 ‘이 동지, 니는 참 대단하데이. 땀이라고는 한 방울도 안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산행대장이었던 이우태가 ‘총재님, 고등 동물일수록 땀을 많이 흘립니다’라고 말하더라구요. 나중에 생각하니 너무 섭섭하더라구요.(웃으며)"

"산행 중에 라디오를 들고 다니면서 듣는 사람이 있으면 '저거 미친놈 아이가. 산에 와서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지 와 라디오를 듣노'라고 소리를 질러서 저희가 놀랄 정도였습니다. 또, YS가 산을 오르다가 평창동 입구에 좋은 집들을 보고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놈들 참 도둑질 많이 했구나'라고도 말했습니다. YS는 돈 문제에서 깨끗한 것은 사실입니다."

"YS는 지각하는 것을 엄청 싫어했습니다. 민추협 회의를 할 때 김상현 공동대표 대행이 10~20분 늦으면 '김상현, 시계 하나 사줄까'하고 에둘러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산행을 할 때도 시간을 엄수했습니다. 만약 10시에 출발하기로 되어있으면 10시에 바로 출발합니다. 뒤에서 누가 오고 있다고 해도 바로 출발합니다."

"YS는 뚱뚱한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몸도 관리 못하는 사람이 무슨 나라를 관리하느냐'라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YS는 많이 먹는 것을 죄악시 했습니다. 그래서 소식하고 근검했습니다. 주변에 많이 먹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아 대강 먹어라'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YS는 경남고등학교 축구부에서 골키퍼를 했습니다. 원래 건강한 사람입니다.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못 빌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 그렇다면 YS와 함께 있을 때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YS를 보면 태산 같은 힘이 느껴졌습니다. 평화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YS가 말은 잘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느꼈습니다. YS는 '민정당에서 뭐라고 했다'라는 등의 보도나 얘기가 나와도 아예 무시해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식으로 대범했습니다. 게다가, YS는 항상 웃는 얼굴입니다. 눈에 분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 얼굴을 보고 공천이 됐는지 안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첨언하자면 YS는 최형우와 김동영을 옆에 두고 충성경쟁을 시켰습니다. 그런 용인술을 쓰기도 했습니다. 용인술에 뛰어났습니다."

"민산 살아있었다면 이인제 출마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

- 민산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저도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인쇄·출판업을 했는데, 저를 묶으면 페이퍼(민주화 운동 인쇄물)가 못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독재타도' 등이 적힌 많은 인쇄물들을 빼앗겼습니다. 인쇄를 마무리 하고 제본을 거의 다 해놓았을 때 덮쳐서 그 것들을 압수해 갔습니다. 그러면 금전적 손해가 정말 크게 됩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살벌해서 인쇄를 하려면 소위 '현금 박치기'를 해야 했습니다. 위험이 따랐기에 돈을 더 많이 지불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보상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식으로 두 군데서 인쇄를 해서 한 곳의 인쇄물만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민산에 대한 평가가 좋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중에 소위 테크노크라프트(기술관료·행정관료)들이 '군화발이 가더니 이제 등산화가 왔다'면서 민산을 폄하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공부도 잘했고 똑똑합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은 민산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민산이 한 민주화 운동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게 사실 아닙니까. 정말 저희들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세상을 바꾸고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민산 활동을 한다고 월급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점을 전혀 높이 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관료이기 때문에 전두환에게 항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전두환이 인상 한번 쓰면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 YS가 대통령이 된 직후 민산이 해체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산악회를 해산시켰는데…,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있지요. 민주화라는 본연의 임무가 끝났으니 중단을 시킨 건데, 중국의 2만 장정이 끝났다고, 혁명이 완수됐다고 그것을 해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종교집단에서는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지만 인간 집단에서는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알아야 합니다. 민산은 정치집단인데 아무런 보상이 없었습니다. 논공행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논공행상을 떠나서 뭔가를 만들어 놓고 해산을 시켰어야 했습니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가을도 오기 전에 서리를 맞아 죽은 셈입니다. "

이장우 전 부이사장이 말한 2만 장정은 1934∼1936년 중국의 홍군(紅軍)이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에서 산시성의 북부까지 국민당군과 전투를 하면서 1만 2000km를 걸어서 이동한 행군을 말한다.

- 민산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YS에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YS는 나중에 IMF를 맞아 경제를 망친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정권 재창출도 못해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YS가 이룬 민주화 업적에 비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YS가 정권 말기에 '민주주의'라는 논리로 이인제가 (1997년) 대선에 나가는 것을 놔둔 것은 잘못입니다. 정당이라는 것은 집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YS가 그 때 정치력을 발휘 했어야 했습니다. 재집권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 걸 못해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민산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재집권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민산의 1차 목표가 달성됐다고 해체하는 게 아니라 겸손, 절제를 강조하면서 조직을 계속 끌고 갔어야 했습니다. 민산의 중심은 계속 있었어야 했습니다. 민산이 살아있었다면 이인제가 나서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민산은 '문민화'라는 거대한 물결을 만들었습니다.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해야겠다는 열의로 동지적 결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화라는 한 시대의 목적은 이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민주화 부분에서는 YS와 민주산악회가 그 중심적 역할을 한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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