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빨갱이란 용어가 던진 ‘물음’
[주간필담] 빨갱이란 용어가 던진 ‘물음’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3.24 1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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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잔재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이유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빨갱이란 용어가 친일 잔재라고 했다.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빨갱이란 어원을 친일 잔재에만 국한시키기에는 역사적으로 어렵다. '빨갱이' 란 용어가 던진 물음, 어원을 생각하며 따라가 봤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빨갱이란 딱지가 붙여졌다고 문재인 대통령은 언급했다. 사진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일본의 한 신문이다. ⓒ뉴시스(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빨갱이란 딱지가 붙여졌다고 문재인 대통령은 언급했다. 사진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의 순국 관련 기사를 보도한 일본의 한 신문이다. ⓒ뉴시스(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항일 무장 독립운동 後
‘유격대=프랑스어로 파르티잔’
빨갱이 유래를 거슬러 보면…
 

안중근 의사,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의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저격. 강우규 의사, 1919년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 투척. 박열 의사, 1923년 일본 국왕 암살 기도. 조명하 의사, 1928년 타이완에서 일본 육군 대장 척살 시도 등.

그 시기를 지나 1930년대 이후부터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백범 김구 선생이 결성한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 의사는 1932년 도쿄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천황 암살 시도를 했다. 같은 해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하이 공원에서 일본의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만주에서도 무장 독립 투쟁이 한창이었다. 남만주 최후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은 1932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일대를 장악하자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에 대항했다.

약산 김원봉 선생도 무장 항일투쟁의 한 축을 이끌었다. 김 선생은 1938년 만주에서 의용군을 조직하고 중국의 국민당과 연대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당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심취한 지식인들이 상당수 됐다. 1917년 러시아에서 마르크스 사상을 표방한 레닌이 중심이 돼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소련의 공산당 지도부가 창설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김원봉 선생도 그중 한 사람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었다.

좌우 양쪽 모두를 비판한 장준하 선생은 1945년 중국 쓰촨성 충칭 등에서 광복군 활동을 통해 항일 투쟁을 벌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며 진짜 공산주의에게만 적용된 말은 아니었다, 친일 잔재의 청산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며 진짜 공산주의에게만 적용된 말은 아니었다, 친일 잔재의 청산 대상이라고 강조했다. ⓒ뉴시스

文대통령, 빨갱이 용어, 친일 잔재라 했지만
한국전쟁 때 공산군 만행 ‘빨갱이’ 기억 많아
박정희 전두환 인권유린 피해에 비춰 봐도…

좌우 이념 등을 차치하고 공통적으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건 숭고한 투쟁은 일제에 엄청난 위협이 됐다. 특히 그 과정에서 모두가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공산주의를 속되게 이르는 말인 ‘빨갱이’ 등으로 몰아 탄압했다는 게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점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빨갱이란 용어가 친일 잔재라고 했다. 청산해야할 대상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아나키스트 할 것 없이 모든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내 몰았다는 얘기였다.

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한 빨갱이라는 용어가 일제와 친일잔재가 악용해 내려온 청산 대상인 만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 같은 ‘빨갱이 유래’는 대통령의 복심인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지난해 1월 16일 출간한 책 <세상을 바꾸는 언어>에서도 규정된 바 있다. 지난 3일 이를 발췌해 전한 한 매체에 따르면 이렇다.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나 공산혁명을 상징하는 색깔 빨강 혹은 적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빨갱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에서 나왔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한국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 이 말이 나중에는 공산주의자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즉, 사전적 의미로 유격대원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파르티잔(partisan)이 항일 유격대원을 가리켜 빨치산으로, 나중에는 한국전쟁(6·25 전쟁)을 거쳐 공산당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변형됐다는 얘기였다. 어쨌거나 빨갱이는 북한의 붉은 기 등의 색깔이나 공산주의 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붉은 완장과 죽창을 든 공산주의자와 부역자들을 ‘빨갱이’로 기억하는 이들이 볼 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 진다.

지하혁명조직과 북한을 다룬 <진보의 그늘>(한기홍 저)에 따르면 6월 25일 북한의 남침에 의해 일어난 한국전쟁 초반기에는 공산주의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세력이 남한 대부분의 영토에서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나와 있다. 또 전쟁 중후반기에는 지리산 일대로 피신해 빨치산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듯 한국전쟁 당시 남한 전국을 뒤덮은 공산주의 영향력과 그에 대한 공포는 남한 내 많은 사람들에게 빨치산, 빨갱이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견해다.

고향이 경기도인 한 노령 시민(남‧78)은 최근 <시사오늘>에 당시를 떠올리며 “빨갱이라는 말은 민간인들 사이에서 각인된 말”이라고 했다. “시뻘건 완장을 차고 남침해 무자비한 폭정을 일삼던 공산 군인들을 보고 민간인들끼리 부른 말이 빨갱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6월 25일 공산군이 남침해 9·28 서울 수복 때까지 남한 주민들은 지옥 같은 생활을 겪었다. 시뻘건 완장을 찬 공산 군인들이 총과 죽창, 회초리처럼 생긴 막대기를 들고 동네를 배회했다. 수시로 부르주아를 색출해야 한다며 동네 어린 꼬마들을 모아놓고 ‘아버지나 형이 어디에 숨었는지 대라’며 무섭게 캐물었다.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짓는 집주인을 가리켜 부르주아라며 개 끌듯이 끌던 모습, 총 개머리 판으로 사정없이 두드려 패며 주재소(면사무소)로 끌고 가는 처참한 광경도 부지기수였다. 이웃 마을에서는 무고한 주민들을 반동분자라고 죽여서 한 구덩이에 쓸어 묻었다는 흉흉한 소식도 들려왔다. 식량을 뺏기고 굶어죽는 집도 있었고 맞아 죽은 집들도 많았다. 그래도 공산당이 무서워 소리 내 통곡도 못했다.”

“어른들은 농사일을 하다가도 오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마을 공회당으로 집합을 해야 했다. 공산 군인들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목청 높여 강제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콩 한 톨도 인민들과 반쪽씩 나눠 드시는 훌륭한 지도자이시다’라며 선전선동을 매일같이 일삼았다. 그리고 다 여물 지도 않은 보리와 밀을 위대한 통일 공산군인들의 군량미로 써야 된다며 허구한 날 공출해갔다. 그 시기 나이는 어렸지만 너무나 공포에 떤 광경들이라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쥐가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려도 모든 식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그때의 무서움은 말과 글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67개국이라는 가장 많은 나라가 참여한 한국전쟁의 인적 물적 정신적 재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의 참상은 유엔군 초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1951년의 의회 청문회에서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본관조차 이런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하고 말았다”고 증언한 것을 통해서도 가늠되고 있다.

각 기관마다 통계 수치가 달라 아직까지도 정확한 피해 규모가 집계되고 있지 못하지만, 복수의 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3년 동안의 전쟁으로 남북한 유엔군 중공군 등 약 450만~52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중 사망, 부상, 실종 등 남한은 약 230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인적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1950년 북한의 기습 침략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의 직간접 트라우마가 상당하다는 점에서 ‘빨갱이’ 란 용어를 친일 잔재의 청산 대상으로만 국한시키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이다.

중견 시사평론가는 얼마 전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누구도 변명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북한의 남침으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났고,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아직도 상처로 괴로워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에게 빨갱이를 일재의 잔재로 치부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북한의 남침에 의한 고의적 피해는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평론가는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인권 유린도 언급하며  “피해자가 명확한 이상 역사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미화한다 한들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부마항쟁, 실미도, 인혁당 등 수많은 인권 탄압을 자행한 것까지 띄울 수 없다. 전두환 역시 마찬가지다. 5·18 민주화 운동, 박종철 고문사건 등 인권 유린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가해자를 용서를 할 수 있겠느냐”며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에 치를 떠는 사람들도 엄연히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빨갱이란 어원은 일제 강점기가 아닌,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도올 김용옥은 지난 1월 KBS1TV <도올아인 오방간다>와 지난 3월 팟캐스트 <김어준의 다스뵈이다>등에 출연해 “빨갱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시대 ‘아카’(빨강)라는 말은 있었는데 공산주의자를 의미하는 빨갱이라는 말은 없었다”면서 “해방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했다. 또 “제주 4·3사건으로 3만 명이 학살됐고, 여순사건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과정 속에 '빨갱이'란 말이 정착하게 됐다”고 부연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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