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봄에 찾는 '섬 山'…그리움의 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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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봄에 찾는 '섬 山'…그리움의 해갈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19.03.24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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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섬 이야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뭍과 떨어져 있는 섬은 그리움이다. 그 추운 겨울 섬 산은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홀로 낙조를 바라봐야 했다. 그렇게 섬마을은 늘 기다림이어서, 사연도 참 많다. 숱한 시련과 풍파를 딛고 살아야 했던 섬의 사연은 어쩌면 가혹한 눈보라를 견뎌내고 찾아 온 봄날과 닮았다. 

남쪽에서 봄꽃 소식이 들려오는 2월이나 3월, 성격 급한 산꾼들은 남녘 섬으로 향하곤 한다. 한결 유순해진 바닷바람을 맞으며 일망무제의 풍광을 사방에 두고 산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지난 주말 '금오도'라는 섬에 갔었다. 

새벽녘 여수 돌산도에 도착해 금오도로 가는 첫배를 탔다. ⓒ 최기영
새벽녘 여수 돌산도에 도착해 금오도로 가는 첫배를 탔다. ⓒ 최기영

서울에서 출발해 5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여수 돌산도 신기항에 도착,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금오도 여천항까지 20여 분을 더 들어가야 한다. 대부산과 비렁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섬으로 가는 여정은 언제나 그렇듯 길고도 험난하다. 

금오도 여천항에 내리면 대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바로 만날 수 있다. 대부산의 주봉인 매봉산의 높이는 해발 381m다. 북한산 백운대가 836m임을 감안하면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뭍에 있는 산들의 초입은 제법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지만 바다 끝자락에서 시작하는 섬 산의 해발 높이는 '에누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천항에서 시작하는 대부산도 초입부터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도록 가파른 산길이 좁다랗게 이어졌다.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밭일을 하는 섬 아낙의 모습 ⓒ 최기영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밭일을 하는 섬 아낙의 모습 ⓒ 최기영

금오도에는 동백나무가 참 많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절정을 지난 동백꽃은 산길 이곳저곳에 흩뿌려지듯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봄꽃들은 경칩쯤에 피기 시작하지만 동백은 훨씬 그 이전부터 꽃을 피우니 우리나라 남쪽 섬에 있는 동백꽃은 이미 시들해져 버린 것이다. 

금오도(金鼇島)는 자라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름다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한자락인 금오도 지구에 속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을 짤 때, 판옥선과 같은 전선을 만들기 위해 재료로 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이었을 만큼, 원시림이 풍부하다. 그래서 땔감이 부족하던 그 시절, 조선 팔도의 산이 대부분 황량했지만 이 섬만은 하도 숲이 울창해서 멀리서도 검게 보여 '거무섬'이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실제 여천항에서 출발한 산길은 능선에 오르는 내내 하늘을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아직 잎사귀도 나지 않아 숲이 우거지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문바위'부터는 탁 트인 남해 바다와 아기자기한 섬의 절경을 어떠한 방해도 없이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좁다란 숲길과 조망 좋은 곳이 나오기를 반복하는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부작사부작 여유롭게 산길을 걸을 수 있었다. 

가파른 길을 올라오면 ‘문바위’를 만날 수 있다. 문바위에서 본 섬마을의 모습이다. ⓒ 최기영
가파른 길을 올라오면 ‘문바위’를 만날 수 있다. 문바위에서 본 섬마을의 모습이다. ⓒ 최기영

그러다 대부산의 주봉인 매봉산이 나온다. 자칫 이곳이 산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표지석 하나 없다. 정상인줄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것 같다. 정겨운 산길을 걸으며 조망 좋은 넓직한 곳에 자리를 잡아 간식을 즐기기도 하고 산들산들 산을 걸어 내려오면 '비렁길'이라고 쓰인 조그만 이정표가 보인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면 드디어 비렁길과 만난다. 

'비렁'은 '벼랑'의 이 지역 사투리다. 그래서 '비렁길'은 금오도 전체를 에두르고 있는. 아름다운 해안가의 낭떠러지 같은 벼랑을 따라 이어지는, 말 그대로 '벼랑길'이다. 그렇게 아찔한 절벽 위로 나 있는 이 길은 사람들과 바다를 잇는 통로이기도 했다. 고기잡이를 갔다 오면 비렁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실제 비렁길을 걷다 보면 예전에는 사람이 살았겠지만 방치된 채 그대로 남아 있는 폐가나 담벼락만이 남은 집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섬을 떠난 뒤 아직도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전망대인 ‘신선대’에서 본 비렁길. 비렁길은 금오도 해안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그리고 섬사람들과 바다를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 최기영
전망대인 ‘신선대’에서 본 비렁길. 비렁길은 금오도 해안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그리고 섬사람들과 바다를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 최기영

또 다시 봄이 찾아 왔고 숱한 사연들이 지나간 비렁길 위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조곤조곤 터져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날 때는 댓잎이 부딪히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물맛 좋은 약수터도 있어서 먹을 물을 보충할 수도 있다. 걷다보면 마을이나 항구를 만난다. 거기에서는 바다를 곁에 두고 판상에 앉아 따뜻한 봄볕을 맞으며 시원한 막걸리에 취한 건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한건지, 나른해진 몸은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냉냉하기만 했던 겨울 바다 바람이 그치고 나니 섬은 그렇게 그리웠던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 올 때, 우리들은 깊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법정 스님이 쓰신 수필 '설해목(雪害木)'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제 겨울이 지난 봄 산은 얼었던 땅이 녹아 길은 질척질척하고 산 여기저기는 어지럽기만 하다. 생명이 나오기 직전, 지독한 산고라도 겪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봄에 찾는 섬 산은 그래서 또 한 번 시련을 견뎌 낸 세월이고, 그리움의 해갈이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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