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피로 점철된 조선의 정쟁과 대한민국의 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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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정치] 피로 점철된 조선의 정쟁과 대한민국의 士禍
  • 윤명철 논설위원
  • 승인 2019.04.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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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훈구와 사림의 정쟁의 길을 선택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뻔하지 않겠는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논설위원)

여야 정치인들이 훈구와 사림의 정쟁의 길을 선택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뻔하지 않겠는가? 사진제공=뉴시스
여야 정치인들이 훈구와 사림의 정쟁의 길을 선택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뻔하지 않겠는가? 사진제공=뉴시스

조선 세종 이후의 역사는 정치 혼란기였다. 조선을 넘어 한민족 최고의 성군으로 인정받는 세종 이후의 역사가 잦은 정변과 사화(士禍)로 점철됐다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주가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당시 지배세력의 권력욕까지 지배할 순 없었다. 역성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혁명파 신진사대부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세조의 왕위찬탈을 기획했고, 성공했다.
 
세조의 훈구파는 사실상 택군의 역사를 열었다. 이들은 세조 사후, 예종과 성종을 선택했다. 특히 성종의 즉위는 계유정란의 기획자 한명회와 권력의 화신 인수대비의 대타협이 만든 합작품이다.
 
하지만 성종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노회한 훈구파를 싫어해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인 사림을 등용했다. 사림은 왕권의 후원을 받았지만 훈구의 맞상대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사화(士禍)가 이를 증명한다.
 
훈구는 무오사화를 기획해 연산군을 내세워 사림을 무참히 짓밟았다. 세조의 후손인 연산군의 역린인 계유정란을 건드린 사림은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연산군은 훈구의 권력욕도 싫었다.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를 주도한 훈구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갑자사화의 비극은 훈구파가 뿌린 불행의 씨앗이었다.
 
훈구는 연산을 제거하기위해 힘을 합쳐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왕이 된 중종도 집권하자 권력의 화신으로 돌변했다. 도학정치를 부르짖는 조광조를 필두로 중종반정의 주역인 훈구 제거를 시도했지만 훈구는 기묘사화로 중종의 의지를 꺾었다.
 
중종은 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의 동지인 조광조를 배신한 비정한 군주였다. 중종이 조광조를 버리지 않고 훈구 제거라는 공동의 목표를 끝까지 완수했다면 을사사화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큰 아쉬움이 남는다.
 
후일 사림도 권력욕에 미친 괴물로 바뀌었지만 잦은 사화로 조선의 수많은 인재들이 희생됐다. 훈구와 사림은 자신들의 비정한 권력욕으로 조선의 미래보다는 과거사로 상대방 궤멸에만 전념했다.
 
대한민국은 사화(士禍)의 나라가 됐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前 정권의 과거사에 대한 심판으로 세월을 보내곤 했다. 한 명의 대통령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두 명의 대통령이 범죄인 신분이 됐다.
 
조선의 훈구와 사림이 치킨 게임이 아닌 공존의 정치를 선택했다면, 조선은 임진왜란도,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훈구와 사림의 정쟁의 길을 선택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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