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헌법불합치, 사회안전망 구축 계기로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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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사회안전망 구축 계기로 삼아야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04.12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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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낳고 싶고,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지난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임신 여성이 겪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갈등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형사처벌하는 건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낙태허용 기준 시한으로 태아가 독자 생존이 가능한 시점인 '임신 22주'를 제시했다. 이로써 낙태는 1953년 형법에 낙태죄 조항이 포함된 지 66년 만에 범죄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게 됐다.

시민사회의 반응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여성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낙태를 결정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해줌으로써 여성인권 신장에 기여하고, 국가가 출산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 사상과 결별할 수 있게 됐다며 사법부의 판단에 찬성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무고한 생명을 죽여 용서가 되지 않는 일에 국가가 면죄부를 줬다며 태아의 생명권을 위시한 반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향후 이번 헌재 판결에 근거한 입법과정에서 상당한 사회적 진통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 같은 진통을 최소화하는 건 이제 정부와 국회에게 달렸다. 인간의 행복추구권과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에서 도저히 답이 나올 수 없는 해묵은 논쟁을 더이상 질질 끌기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계기로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한 정책적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

우선, 낳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미취학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미혼모(10~40대) 총 35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발표한 '양육미혼모 실태 및 욕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미혼모의 월 평균 소득액은 92만3000원으로 집계됐다. 근로소득이 없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61.6%를 차지했으며, 소득이 전혀 없다는 응답도 10.0%에 달했다. 이들은 임신으로 인해 직장 중단을 경험(59.1%)했고, 직장에서는 권고사직(27.9%)을, 학교에서는 자퇴(11.6%)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불투명하다. 앞선 설문조사에 참여한 미혼모 중 21.2%가 우리나라에서 미혼모가 자녀를 양육할 환경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고, 비슷할 것이라는 답변은 절반을 넘어선 52.1%로 집계됐다. 모두에게 축복받아야 할 임신과 출산이 오히려 일상에서의 불이익을 불러오는 현실에서 낙태는, 그것이 원치 않는 임신이든 원한 임신이든, 자신의 생존을 위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혼인 대비 출산율은 역대 최저 수준인 1.33명으로 떨어졌다. 결혼 후에도 애를 안 낳고 싶은 국민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울러,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곧 자녀의 출발선이 되는 사회다. 생계와 양육에 허덕이는 미혼모 가정의 자녀들은 경제적 빈곤 속에서 사회에 발을 들이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낙인까지 찍히며 사회적 자존감마저 잃기도 한다. 혼외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 그리고 현실적 어려움이 자녀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실정에서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게 과연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는 것인지, 되레 인간의 존엄하게 살 권리를 경시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낳고 싶지 않은 세상, 살고 싶지 않은 세상에서 자기결정권과 생존권을 운운하며 소모적인 논쟁을 펼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어느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행복하게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당한 편견을 해소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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