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 “류영모를 만나 성경이란 것을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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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 “류영모를 만나 성경이란 것을 생각하게 됐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1.07.2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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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에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여섯이었을 때 그에게 형뻘이 되면서 뒤에 목사가 되는 함석규가 그 동내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어려서는 집에서 천자문을 배우고 일곱 살 때는 서당 삼천재에서 명심보감을 배웠는데, 마침 그때 그 서당이 기독교학교인 덕일소학교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그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홉 살 때 이미 학습을 받았다. 그러나 세례는 집안이 다 믿어야 주는 법인데 자기 집에서는 어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했다.

그는 그때 일을 두고 (내가) “교회 신자는 못 되도록 하나님이 마련했던가보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세례를 받아야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데 그의 말은 이 제도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후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학교의 동무들이 거의 다 믿지 않는데 자기 혼자 믿는다 하고 가기가 부끄러워서였다. 그러므로 스스로는 여전히 기독교 신자로 자처했고 방학 때 집에 가면 다름없이 교회에 나갔다. 3·1운동 때 평양고보의 연락책임자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되어 퇴학을 당하고 집에 와있는 2년 동안에는 마음속에 번민도 많고 하여 다시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이렇다 할 깨달음도 경험도 결심도 없었다. 

그가 다시 본격적으로 예수를 믿은 것은 1924년에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그는 그곳에서 학교 1년 선배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성서연구회(聖書硏究會)’에 입회하게 된다. 그 성서연구회는 기성교회가 아니었다. 이리하여 그는 무교회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

1928년 4월에는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취임하고 얼마 후 한국판 무교회집회인 오산성경연구회를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 유학 중에 김교신 등 6인이 모여 동인지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김교신이 혼자 맡아 발행하는 ‘성서조선(聖書朝鮮)’에 매월 성경해설을 싣게 된다. 
 

▲ 함석헌은 류영모를 통해 성경의 깊이를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사진제공=(사)함석헌 기념사업회

기독교에 대해 실증이 나있던 함석헌을 다시 기독교로 불러들인 우치무라 간조는 어떤 사람인가? 함석헌은 우치무라 간조를 무교회주의자라 비난하는 서창제 교수에게, “사자냐 아메바냐”(함석헌전집 3권 89쪽, 이하 함석헌전집은 생략하고 권수와 쪽수만 3-89로 표시함.)라는 글에서 이렇게 그를 변호한다. 

 “청년시절 북해도 농대에서 클락이 뿌린 자유 신앙의 씨에서 난 신앙 모임에서 믿음에 들어갔고 미국에 건너가 앰허스트 대학 씨리 선생 밑에서 자랐다. 그의 유명한 저서요 세계적으로 읽힌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됐나'하는 책에서 우리는 그의 신앙이 어떤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참의 사람, 독립의 사람이다. 그는 반드시 교회를 반대한 것 아니었다. 미국서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처음에 교회에 있었고 미션학교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그의 참과 자유 독립을 사랑하는 정신이 교회의 의식, 제도화해 버린 데 견딜 수 없었다.

선교사란 사람은 전도 성적을 내기 위해 본국에 거짓보고 하기를 예사로 하고 지도한다는 미명 하에 일본인을 차별대우하고, 열심히 믿는다는 것들은 인간의 기백은 다 팔아먹고 그저 선교사의 집 개처럼 추종만을 일삼는 것을 볼 때 그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래 직언을 하다가 나오게 된 즉 교회 측에서 붙인 이름이 ‘저것은 무교회주의다’ 한 것이다.”
 
함석헌은 또 우치무라 간조를 “어용 종교사상가”라고 공격하는 서 교수에게 이렇게 그의 인격을  변호한다.

“내가 알기론 그가 청년시절에 신문기자로 있어 특별히 그의 인격이 고격(高激)한 것으로 사회에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강연집에서 그가 권력계급과 열렬히 싸워간 의기(義氣)를 많이 볼 수 있고, 일고(一高)에 교수로 있다가 천황칙어(天皇勅語)에 최경례(最敬禮)를 아니한 까닭으로 매국노라 박해를 받아 한때 심히 어려웠으며, 노·일전쟁을 반대해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했으며, 죽기까지 아무 국록을 먹는 것 없이 동경 교외에 일개 야인으로 있었던 것을 안다.”
 
평양고보에 재학 중이던 함석헌은 그의 형뻘이 되는 함석은이 일본에서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서 숭덕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의 평안남북도 학생동원 책임을 맡게 되자 자연스럽게 평양고보의 연락책임자가 되었다. 만세사건이 끝나고 나서 그는 퇴학을 당했다.

다시 복교하려면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을 잘못이라고 시인하는 반성문을 써야 했다. 다른 학생들은 반성문을 쓰고 복교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기가 싫어서 복교하지 않고 2년여를 고향에서 머뭇거리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학업을 계속할 길을 찾았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할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함석규 목사를 만나 그의 손에 이끌려 정주로 가서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남 같으면 대학을 졸업할 수도 있는 스물한 살이었다. 
 
바로 이 무렵에 류영모가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그의 학력을 문제 삼아 승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부임 1년 만에 사임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류영모는 그 1년 남짓한 동안에 함석헌에게 종교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함석헌의 말로 직접 들어보자.
 
“그때까지 내가 교회에서 배운 것은 기독교라는 한 개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생님을 만나서 조금 성경이란 것을 생각하게 됐고, 교회에서 배운 성경이 그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이제 비로소 성경이란 깊이 생각을 하며 봐야 하는 책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4-190)

 그리고 3년 후인 1924년 4월에 함석헌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년 선배인 김교신을 따라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나가게 된다. 오산학교 재학 중에 류영모에게서 노자나 톨스토이에 대해 배웠고 동시에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것이 함석헌이 그의 모임에 나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한문서당에서 통감(通鑑)을 배우고 10세 때부터 2년간 소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12세 때부터 3년간 한문서당에서 맹자(孟子)를 배웠다. 그리고 15세 때 YMCA 김정식 총무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면서 예수를 믿게 된다.

17세 때 경성일어학당(京城日語學堂)에서 2년간 수학하고 바로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양평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교사로 있던 중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로 초빙을 받아 거기 가서 2년간 재직했는데, 그때 그가 오산학교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파했으며 남강 이승훈도 그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그 후 바로 일본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했는데 그때 동경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다. 그리고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21년에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간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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