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텔링] 유시민과 심재철의 ‘1980년 서울의 봄’은?
[시사텔링] 유시민과 심재철의 ‘1980년 서울의 봄’은?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5.07 2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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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합동수사본부 진술서 공개
누가 동료를 위험에 빠트리게 했는가, 공방 ‘거듭’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학생운동 당시 심재철 유시민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얽힌 진술서를 둘러싼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어떤 얘기인지 진술서 내용을 재구성해 담았다.ⓒ시사오늘(그래픽=김유정)
학생운동 당시 심재철 유시민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얽힌 진술서를 둘러싼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어떤 얘기인지 진술서 내용을 재구성해 담았다.ⓒ시사오늘(그래픽=김유정)

‘심재철과 유시민 간 진술서 진실 공방’이 반박과 재반박을 오가고 있다. 특히 이 상황에서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 본인도 갖고 있지 않았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피의자 당시 쓴 ‘합동수사본부 진술서’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개해 파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유 이사장의 진술서 내용을 중심으로, 심 의원은 왜 이 문제에 거듭된 진실을 요구하는지 ‘시사텔링’을 통해 엿봤다. 

심재철과 '나'
1980년 서울의 봄

1980년 6월 12일. '나'(유시민)는 일전에 미처 진술하지 못한 사항이나 잘못된 사항, 불명확한 사항을 상세히, 잘못을 수정하고 명확하게 진술 코저 한다. 그때는 1980년 3월 10일경 오후 1시였다. 서울대학교 7동 102호 강의실에서는 경제학과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경제학과 과회장으로 선출됐고, 총대의원회의 대의원 자격을 취득했다.

심재철 학우를 만난 것은 닷새 뒤인 3월 15일경 오후 2시쯤이었다. 신입생환영체육대회 개최 문제와 관련해 사회대 대의원회의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심재철은 서울대총학생회장 후보였다. 그 무렵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려면 회칙에 따라 각과 대표 및 계열대표 124인으로 구성된 총대의원회를 통해 최소한 10인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 제출해야 했다. 심재철이 사회대학생회실로 찾아온 것도 대의원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냥 추천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몇 마디 질의응답을 해보았다. 심재철은 서클 활동의 자유, 학내 언론 자유, 집회의 자유 등 잃어버린 권리의 회복을 모토로 삼고 있다고 했다. 이것이 나와 심재철의 첫 대면이었다. 이후 심재철을 만난 건 3월 24일. 그가 교내 아크로폴리스에서 선거 유세 연설을 할 때였다. 심재철은 교내 언론출판 집회 등의 자유회복과 유신잔재청산, 대학문화혁신의 3가지를 모토로 연설을 했다.

총학생회장 선거는 3월 28일 1시부터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서 실시됐다. 이날은 제1회 총대의원회장 선거도 같이 열렸다. 각축전 끝에 사회대 대의원들의 지지를 받던 내가 선출됐다. 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심재철이 92대 22표로 당선됐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서울대 재학 시절 1980년 6월 12일 합동수사본부에서 진술한 진술서 내용을 심재철 의원이 블로그에 공개했다. 사진은 앞장 캡처.ⓒ시사오늘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서울대 재학 시절 1980년 6월 12일 합동수사본부에서 진술한 진술서 내용을 심재철 의원이 블로그에 공개했다. 사진은 앞장 캡처.ⓒ시사오늘

4월 16일은 중국집 청원에서 서울권 대학교간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개최됐고, 서울대를 비롯해 서강대 연대 성대 이대 숙대 서울여대 등이 참석했다. 회의는 서울대총학생회장인 심재철이 주도했다. 그는 4월14일 최규하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정부가 학원사태를 계엄연장의 이유로 든 것과 신현확 국무총리가 유사한 발언을 하고 정부가 개헌주도를 해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한데 대해 시국에 대한 공동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음을 연설했다.

성명서는 서울대가 초안을 작성하기로 했다. 또 다음날인 17일 오후 3시 연세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단끼리 다 같이 모여 초안을 검토한 후 오후 5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회의 결과에 따라 심재철과 나는 그의 누님 댁으로 가서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날 우리가 쓴 성명서의 제목은 현 시국에 대한 공동 성명서였다. 내용은 비상계엄과 헌법 개정에 대해, 그리고 언론자유에 대한 것 등이었다.

다음날이 되자 심재철은 인쇄한 유인물을 기자들과 학생들에게 배포한 뒤 직접 낭독했다. 한국의 현대사는 4·19 정신과 그것을 죽이려는 자 사이의 투쟁의 기록이며 지금도 반민주와 민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반드시 민주가 승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5월 2~4일은 집중 농성이 진행됐다. 이 기간 심재철은 교내 순환도로를 일주하는 민주화 대행진을 총지휘했다. 그는 계엄 해제 구호를 선창하고, 시국선언을 낭독했다. 이 낭독은 5월 6일자 대학신문에 전문이 게재됐다. 주로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비상계엄이 해제돼야 한다는 것과 언론검열제로 등의 모든 비민주적인 요소를 청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철야 농성에 앞서 우리는 비상계엄해제 등을 주제로 자유성토를 진행했다. 그리고 신현확, 전두환의 이름을 써서 교문에 매단 후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 화형식을 가졌다. 5월 3일 시국성토대회를 마친 후 5월 4일은 병역집체훈련 환송식을 가졌다. 이때 심재철은 한식집에서 생선찌개와 곱창과 소주 등 약 1만 원도 되는 식사대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그 돈의 출처는 알지 못한다.

이 기간 나는 지난 4월 11일 김상진 열사 추도식에서 행사 문제로 5분간 다툰바 있던 복학생과도 화해를 할 수 있었다. 그 복학생은 학기 초부터 (김대중의 사조직 국민연합의 산하단체인) 민청협 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사회학과 이해찬 씨였다.

김부겸도 같은 기간 알게 됐다. 교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1만2000명이 모인 가운데 민주화대총회가 열렸을 때였다. 정치학과 4학년생인 복학생 김부겸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민주화투쟁을 위해 응소키로 한 (심재철)총회장의 결정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는 요지의 설득력 있는 연설을 했다. 이 때문에 심재철은 복학생 중에서도 김부겸에 대해서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총학생회 지도부는 그 뒤에도 계엄군이 온다는 잘못된 정보를 학생들에 전해 혼란케 해 책임 추궁을 당한 바 있다. 이때에도 김부겸은 다시 등장해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이처럼 변호한 것으로 보아 심재철과 김부겸 사이에 뭔가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5월 14일. ‘휴교령이 내릴 텐데 내일까지 미룰 수 없다.’ 심재철을 중심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심재철과 함께 비상계엄군 해제 농민권익보호 서민생활보호, 노동3권보장, 신현확 전두환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도 불렀다. 심재철은 교문 앞 200명의 전투경찰 지휘자에게 길을 비킬 것을 요구했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우리는 신림사거리, 영등포 시장앞도로, 신촌로타리, 광화문 등을 행진했다.

이는 1980년 ‘서울의 봄’ 기간을 이끌던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행적과 관련해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을 수사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진술한 내용의 일부를 심 의원 중심으로 개략해 재구성한 것이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뒤 유신체제가 끝난 직후부터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 확대조치가 선포되기까지의 과도기적 기간을 일컫는다. 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 당시 정치인 등 20여 명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을 씌어 사형선고 등을 내린 사건을 말한다.

진술서 공개, 왜?
"전문 통해 밝혀질 것"

유 이사장의 진술서는 지난 6일 심 의원이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것이다. 이는 ‘심재철과 유시민의 합수부 진술서’ 관련 양측의 주장이 상반되자, 유 이사장이 동시 공개를 제안했고, 이에 동의한 심 의원이 “누구의 진술이 수사의 가이드라인이 돼 동료들의 목을 조였는지 국민들께서 진술서를 읽어보고 판단하시리라 믿는다”며 관련 내용을 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유시민이 1980년 당시 고문을 견뎌가며 학우들을 지켰는지, 상세한 검찰 측 참고인 진술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방송을 통해 문장력을 뽐낼 만큼 진술서가 국민 앞에 당당한 내용인지는 이번에 공개되는 진술서 전문을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기록은 지금까지 국민 앞에 공개된 적이 없다. 따라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기록 안에 포함된 합수부 진술서 공개는 국민의 알권리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고 전제했다.

심 의원에 따르면 유 이사장의 진술서를 처음 구하게 된 것은 1995년 전두환 노태우 내란사건 고발인 자격으로 서류를 작성할 때였다. 그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 입증증거였던 유시민의 진술서를 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때 비로소 유시민이 검찰 측 참고인이었다는 사실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의 핵심 증인으로 판결문에 판시됐음을 처음 알았다”고 했다.

관련해 심 의원이 지적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유시민의 진술서는 전지적 관점에서 관찰자적 시각으로 학우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진술서는 심재철의 공소사실의 핵심 입증 증거로서 활용됐다. 또 그의 진술서에 내(심재철) 이름은 모두 78번 언급됐다. 또한 1980년 6월 11일의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소상히 밝혀진 77명 학우 가운데 미 체포된 18명은 그의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 수배됐다. 그 중 15명은 심재철의 유죄를 입증하는 합수부 진술을 해야만 했다. 유시민의 진술로 故김병곤 선배는 심재철에 관한 합수부 증거이기도 하지만 신군부가 의도한 민청협의 복학생을 통한 재학생 시위 교사의 정황증거가 돼 이해찬 씨에 대한 검찰 측 핵심 증거로 판결문에도 인용됐다. 유시민은 당시 운동권 핵심인물이었지만 진술서 제출 이후인 1980년 8월20일 아무런 처벌 없이 불기소로 석방됐다.”(6일 심재철 보도자료)

심 의원은 자신이 쓴 진술서에 대해서도 비교해 언급했다.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청문회를 앞두고 나는 유시민으로부터 8년 전 치안본부 지하실에서 고문으로 점철된 내 진술서를 건네받았다. 국회청문회를 앞두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재판자료가 청문위원에게 배포됐는데 이해찬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막 취업한 유시민은 전체 2만 쪽 자료 중 나의 합수부 진술서만 건네줬다. 고문으로 점철된 나의 고통스런 기록을 그렇게 8년 만에 마주했다.

본인의 진술서는 본인의 행적에 관한 것이 90%였다. 다른 사람에 관한 것은 ‘유시민과 이홍동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와 같이 단순기술 단 1회였다. 본인의 진술서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이미 유시민의 진술서로 말미암아 지명 수배된 서울대 단과대학 학생회장 4명에 관한 한 줄의 단순 기술이었다. 혐의와는 상관없는 일반 선배들로서 내 진술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명 수배되거나 혐의가 인정된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피력하고 김대중 씨 등 정치권의 개입이 없었음을 일관되게 주장했고 이 같은 진술은 공판에서도 유지됐다.”(6일 심재철 보도자료)

심 의원은 이 같은 상황임에도 유 이사장이 2016년 4월 총선 등에서 자신에 대한 “사적인 일화까지 공개해가며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그것은 노유정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현재까지도 재생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에도 그는 “4월 20일 공영방송을 통해, 그리고 5월 1일에는 (노무현 재단 유튜브 영상 채널) 알릴레오를 통해 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유시민의 왜곡된 허위사실이 전달됐다”고 덧붙였다. 심 의원은 뒤이어 “유 이사장의 진술이 곧 다른 학우들에게 직접적 위협의 칼날이 됐다”며 거듭 질타했다.

“그는 학생회 간부로 공개된 사람들에 관해서만 진술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복학생 등의 가두시위 독려 등 학생운동권 내부 움직임 등을 진술해 다른 학우들에게는 직접적인 위협의 칼날이 됐다. 그는 ‘진술서 쓰는 동안에는 맞지 않으므로 맞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 오랫동안 진술서를 썼다’고 언급했다. 이는 고문으로 고초를 당한 민주화운동가들의 희생과 고통에 대한 폄훼이다.”(6일 심재철 보도자료)

앞서 유 이사장은 지난달 27일 KBS-1TV <대화의 희열>에 출연해 “자기들끼리 진술서를 받다가 뭐가 나오면 비교를 해요.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그러고 ‘야 이 건은 얘가 이런 진술을 했는데 쟤를 좀 족쳐봐’ 그러면 딴 사람을 족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이 유리한 진술을 누군가가 하면 그 진술에 맞춘 진술을 하도록 두들겨 패는거죠”라고 한 바 있다.

심 의원은 일련의 유 이사장 발언에 대해 “상세한 진술이 당사자들에게는 목을 겨눈 칼로 바뀐다는 것을 이렇게 잘 알면서도 자신의 진술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 체 한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당시 수사관들이 기대하는 이름과 내용이 기술되지 않은 진술의 대가는 폭력과 고문으로 돌아왔지 않은가”라며 “1980년 5월 17일까지 학내사정을 상세히 서술한 유시민의 진술서로 인해 수사당국은 상세지도를 확보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김대중과 관계있다는 민청협 회장 이해찬’ 진술은 민청협 수사로 방향을 틀게 한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민청협 5명과 관련 복학생 1명은 피고가 되며 민청협이 복학생들을 통해 재학생들의 시위를 사주했다는 밑그림이 완성된다”고 부연했다.

심 의원은 유 이사장은 알릴레오에서 ‘80년 당시 심재철이 자수했고 어떻게 형 집행 정지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가한 것에 대해서도 이유를 밝혔다. 

“나는 당시 6월 30일 자수했다. 2심 재판 후 피고인 24명 중 7번째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이어 군에 강제징집 됐다. 당시 본인에게는 현상금 100만원과 일계급 특진이 걸려있었고 숨겨주거나 도피를 도와준 사람도 계엄법과 형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계엄공고가 내걸렸다.(80.6.24. 동아일보) 내 고향인 광주에서의 당시 참상과 사회 저명인사 97명의 자수명단은 도피하던 나에게 전망의 부재로 느껴졌다.”(6일 심재철 보도자료)

한편 심 의원과 유 이사장의 진술 공방은 당분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유 이사장은 심 의원이 1980년 6월12일자 합수본부 진술서 공개한 것에 대해 반박하며 7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학내 비밀조직 배후로 언급하지 않기 위해 합수부 수사관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도록 허위로 진술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유 이사장은 앞서 알리레오를 통해 진술서를 쓸 때 감출 것은 감추고, 비밀이 아닌 가치 없는 진술만 했다며 그 증거로 진술서를 쓴 뒤 500명에 가까운 수배자 명단이 발표됐는데, 자신의 비밀조직 구성원은 단 한명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심 의원은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 이사장의 거듭된 거짓 해명에 유감”이라고 재반박했다.

이 가운데 재야운동의 원로로 십년 넘게 5번 구속과 일제 치하 수준의 모진 고문을 겪었던  이재오 전 의원(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은 7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후배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진실 공방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이 전 의원은 “고문이 너무 처절해 그 앞에서 불지 않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구속되면 형량이 늘어나도 좋으니 고문만은 피해갔으면 하고 바랐다. 독재 정권의 엄혹한 상황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솔직해질 것은 솔직해지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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