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의 악순환, 언제까지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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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의 악순환, 언제까지 할 텐가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5.13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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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자극적 발언은 더 자극적 발언 낳아…악순환 고리 끊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지난 11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대구에서 열린 집회 연설 중 “KBS 기자가 요새 문빠, 달창들에게 공격받았다”고 발언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뉴시스
지난 11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대구에서 열린 집회 연설 중 “KBS 기자가 요새 문빠, 달창들에게 공격받았다”고 발언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뉴시스

생물학에 ‘역치(閾値)’라는 개념이 있다. 생물이 외부환경 변화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 크기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같은 자극을 받으면 감각의 순응으로 인해 역치가 올라가게 되는데, 덤벨(dumbbell) 운동을 할 때 계속 같은 무게를 들어 올리면 근육이 적응해버려 운동 효과가 낮아지는 것이 그 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생물의 지속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역치를 넘어서는 더 강한 자극을 계속해서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kg짜리 덤벨로는 운동 효과를 느끼지 못한다면, 2kg, 3kg, 4kg으로 계속 무게를 늘려가야 한다. 그래야 세포가 반응하고, 운동 효과가 나타난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역치 개념이 떠오른다. 지난 11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대구에서 열린 집회 연설 중 “KBS 기자가 요새 문빠, 달창들에게 공격받았다”고 발언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문빠’와 ‘달창’은 문재인 대통령 적극 지지층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공식석상에서 입에 담기 어려운 유래를 가진 비속어다.

나 원내대표는 지난 3월에도 문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논란에 휩싸였던 바 있다. 비단 나 원내대표뿐만 아니라, 황교안 대표 역시 문 대통령을 ‘김정은 대변인’이라고 지칭하고 문재인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규정하는 등 강성 발언으로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한국당만 나무랄 수도 없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야당 시절 “이명박 정부는 쿠데타 정권”이라거나 “쥐박이·땅박이” 등 인격 모독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해왔던 역사가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라는 말을 했다가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정치권이 ‘막말’과 ‘더 센 막말’을 주고받는 이유가 바로 역치와 관련이 있다. 거대 양당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구축한 우리 정치 특성상,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은 우리 진영의 결집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상대 진영에게는 막말이겠지만, 우리 진영에게는 ‘맞는 말’로 수용되는 것이 우리 정치다.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으로 나 원내대표가 ‘나다르크(나경원+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이 좋은 사례다.

문제는 아무리 강한 표현도 반복되면 일상 언어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나 원내대표의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에 비해 황 대표가 했던 ‘김정은 대변인’ 발언의 파장이 미미했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언젠가부터 ‘독재 정권’ 수준의 단어는 여당이 따로 반박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야당이 늘 하는’ 표현이 됐다.

이러다 보니 정치인들은 자기 진영을 결집시키기 위해 역치를 뛰어 넘는, 즉 예전보다 더 강하고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저 그런 막말’로는 지지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없으니, 더욱더 자극적인 말을 찾아 내뱉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만들어 놓은 악순환의 고리다.

정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행위다. 그러나 막말은 정치 혐오를 유발하고, 무관심층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국민이 외면하고,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정치는 과연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일까. 눈앞의 ‘지지층 결집’에만 골몰하지 말고,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가 무엇일지 고민해볼 시점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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