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의 뷰파인더] 영화 <배심원들>, 평범이라는 눈으로 원칙과 상식을 바라보는 ‘8인의 성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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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의 뷰파인더] 영화 <배심원들>, 평범이라는 눈으로 원칙과 상식을 바라보는 ‘8인의 성난 사람들’
  • 김기범 기자
  • 승인 2019.05.14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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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과 무거움을 대신하는 작지만 잔잔한 울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기범 기자]

영화 <배심원들>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영화 <배심원들>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배심원은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 국민 중 무작위로 선출돼 형사재판에서 유·무죄 여부 등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주로 미국이나 영연방 국가 등에서 판사는 배심원 판결에 따라 형량만을 조절하는 재판의 진행자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영·미권의 배심원제와 비슷한 ‘국민참여재판’이 2008년부터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국민참여재판에서 유·무죄 판정과 양형 선고는 여전히 판사의 몫이며,  배심원들이 내리는 판결은 권고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작위로 뽑힌 일반 시민이 의무적으로 배심원단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은 같다.

여기에 전문적 법률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올바른 판정을 내릴 수 있는가는 비슷한 사법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국가들 사이에선 오랜 논쟁거리다. 냉철한 이성이나 심오한 지식이 부족한 이들일수록 논리와는 유리된 순간적 감정에 휘둘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외를 막론하고 숱한 법정영화가 쏟아졌지만, 특히 배심원을 소재로 다룬 작품 중엔 헨리 폰다가 주연을 맡은 1957년 작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이라는 고전이 백미(白眉)로 꼽힌다.

아버지를 칼로 찌른 한 소년의 살인 혐의에 대해 뉴욕시 법정에서 각자의 사연과 캐릭터를 가진 12인의 배심원들이 겪는 갈등의 드라마가 훌륭한 연출과 함께 어우러진다. 아울러 배심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그리 길지 않은 러닝 타임, 그리고 흑백화면은 서사의 긴장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최고 장치가 된다.

패륜범죄를 저지르고 유죄가 거의 확실시되는 소년에 대해 갑론을박을 거쳐 결국 만장일치 합의로 무죄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단순한 법정 드라마를 지나 미국 배심원 제도의 허점까지 되짚어 보게 한다.

평범한 시민들이 강제적으로 격리수용 된다는 사실은 일상으로의 복귀와 해방이라는 강박까지 초래해 한 사람의 운명을 제대로 판단하는 데에 성급한 오류를 낳을 수 있다.

더군다나 합리적 의심(reasonable suspicion)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 재판 상황에서 ‘불확실하거나 애매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의 정신을 구현한다는 것은 실상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은 국민의 상식이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는 원칙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이유다. 

오는 15일 개봉하는 영화 <배심원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피고인의 이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가볍지만, 울림 있게 그려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백수’ 발명가부터 시작해 엘리트 회사원, 평범한 주부와 법조인을 꿈꾸는 법대생 등 영화 속 8명의 배심원들은 힘없는 사회적 소수자지만, 엄연한 우리의 자화상이다.

서로 다른 배경과 정서를 지닌 채 우연히 이뤄진 배심원단이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을 여정을 암시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왔을 것이 분명한 시나리오는(<배심원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격의 인물 또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처럼 ‘8번 배심원’이다.) 극적 반전보다는 뻔한 결말을 예상케 하는 만큼, 영화 전반의 공기 밀도에선 현격한 차이를 이룬다.

<배심원들>은 이미 정해진 답을 쫓아가는 클리셰를 극복하기 위해 법정드라마의 무거움을 대신하는 필치를 차용한다.

심도 깊은 서스펜스에 기반한 법정영화 특유의 기제보다 주로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원끼리 맞부딪히는 가벼운 대사는 연극적 요소를 연상시킨다. 영화 전반의 코믹한 분위기는 때론 판타지와 결합해 해학성을 띠지만, 주제의식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데에 애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하고 단순한 법의 원칙을 찾아가는 길목들을 굳이 어두침침한 톤으로 비추기보다 다소 편안하고 소소하게 그려낸 점은 소시민들의 상식과 시각을 강조하려는 <배심원들>의 노림수다.

무겁고 사변적이기만 한 법 특유의 성격 때문에 정작 지켜져야 할 간단한 진리마저 외면할 수 있는 우리 현실을 다른 측면에서 되돌아보게 한다.

비록 크진 않지만 영화 말미의 잔잔한 울림이 전달되도록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주는 이는 단연 문소리다.

법을 집행하는 판사라기 보단, 재판의 주재자로서 여러 목소리들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번민의 모습은 영화 후반부의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굳이 <배심원들>을 헨리 폰다의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극적 반전이나 인물 간 세밀한 심리 묘사 측면에서 드라마의 경중 자체가 다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리 국민참여재판을 미국 배심원제와 동일 선상에서 나란히 바라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가까운 일단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 안의 또 다른 소수자 목소리를 어떻게 되살리는지 느긋하게 바라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평범이야말로 눈 가려진 정의의 여신이 보지 못하는 바를 볼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12세 이상 관람가.

 

★★★

담당업무 : 에너지,물류,공기업,문화를 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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