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심재철과 유시민…‘서울역 회군’ 있었던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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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심재철과 유시민…‘서울역 회군’ 있었던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5.14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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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계엄철폐 요구하며 10만여 명 운집했으나 충돌 우려해 해산…현대사 물줄기 바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신군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모인 10만여 명의 군중들. ⓒ민주화기념사업회
신군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 모인 10만여 명의 군중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18년간의 군부독재는 막을 내렸다. 아니, 그런 듯했다. 10·26 사건 직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특별담화를 통해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가능한 빠른 기간 안에 헌법을 개정한 뒤 이에 따라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다시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거의 모든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 권한대행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민주주의로 가는 발걸음에 가속이 붙었다. 바야흐로 서울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자, 대한민국 수도에는 다시 찬바람에 불어 닥쳤다. 결국 시민들은 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선봉에 선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개강 후 대학가에 12·12 쿠데타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곧바로 민주화 투쟁을 재개했다.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교내 시위만 지속하던 학생들은, 5월 14일을 기점으로 거리 투쟁을 시작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 모여 토론을 거듭한 이들은 평화적 교내 시위 종료와 교외 진출을 결의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가두시위 이틀째인 5월 15일 오후 3시경, 서울역 인근에 모인 대학생 수는 무려 10만여 명에 달했다.

이 시위대 속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서울대 복학생 대표 이해찬,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 등 학생회 간부들뿐만 아니라 서울대 복학생 김부겸도 있었다.

치열한 투쟁의 장소였던 이곳은 이제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됐다. ⓒ시사오늘
치열한 투쟁의 장소였던 이곳은 이제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 됐다. ⓒ시사오늘

그러나 너무 많은 학생들의 집결은 오히려 총학생회 대표들을 당황시켰다. 현실적으로 서울 중심지에 모인 10만여 명의 군중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에서, 군부가 군인들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려 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이 재현한 당시 상황은 아래와 같다.

“잠실운동장 부근에서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효창운동장에도 군인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곧 여기로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 곧 해가 저물기 시작할 겁니다. 향후 동선을 계획해놓지 못한 채 여기서 군인들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제 오늘의 투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고 봅니다. 이만하면 정부와 군에서도 우리의 의사를 분명하게 알아들었을 겁니다.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갑시다.”

“동의합니다. 어둡기 전에 학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 물러나면 군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시민들의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밤중에 군인들과 충돌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이하는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유시민 작가가 KBS <대화의 희열>에서 그때 상황을 회고한 것이다.

“서울역에 10만 명의 학생들이 서 있고, 병력이동 상황에 대한 첩보가 들어오고…. 그때가 정말 무서웠다. 내가 아직 21번째 생일이 안 됐을 때였는데. ‘죽겠지? 군인들이 들어오면…. 나는 죽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 뭐 나는 일을 저질렀으니 죽을 수도 있지. 그런데 거기에 신입생들도 와 있었다. 보이지는 않는데,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19번째 생일이 안 된 내 여동생도 거기 와 있었고. 그걸 보면서 ‘저 신입생들 어떡하지?’ 그 생각이 계속 들었다. 우리는 이미 3학년이었고 일을 저질렀으니 우리가 책임을 져야 되는데, 신입생들을 보면서 ‘쟤들 어떡하지?’ 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학생회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해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발표를 하는데, 내일모레 어떻게 될지 몰라도 너무 안심이 되더라. 걸어서 신림동 학교까지 돌아왔는데, 걸어오는 내내 너무 안심이 됐다. 그때가 제일 무서웠고, 지금 생각해도 무섭다.”

준비가 돼있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들과 충돌할 경우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총학생회 대표들은 결국 해산 후 다음에 다시 집결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은다. 다음은 1980년 5월 16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대학생 대거 가두시위 계속’이라는 기사 일부다.

『(전략) 서울역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차도와 역 앞 광장을 꽉 메웠던 시위학생들은 이날 하오 9시 30분부터 1시간여에 걸쳐 자진해산, 대학별로 학교로 돌아가거나 귀가했다. 이들의 해산은 시위에 참여했던 각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하오 7시부터 서울대 마이크로스쿨버스 안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1시간 30분에 걸친 격론을 벌인 끝에 해산을 결정, 시위 학생들을 설득해 이뤄졌다.
학생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대 이수성 학생처장은 김종환 내무부장관에게 전화를 통해 학생들이 자진해산할 경우 경찰이 보호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군(22·사대 영어과 4년)은 하오 8시 30분 서울역 일대의 시위 학생들에게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하고 “각 대학별로 이 자리에서 해산, 학교에 돌아가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토론, 그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고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후략)
1980년 5월 16일자 <경향신문> ‘대학생 대거 가두시위 계속’』

당시 서울역은 신관에 자리를 물려주고 ‘문화역 서울284’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시사오늘
당시 서울역은 신관에 자리를 물려주고 ‘문화역 서울284’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시사오늘

결과론적이지만,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는 이 해산은 큰 아쉬움으로 남고 말았다. 해산 이틀 뒤인 17일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다음,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이어 신군부는 서울역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 간부들을 잡아들여 고문·회유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이 획책한 내란이라고 몰아붙였다. 심재철과 유시민이 벌이고 있는 ‘진실게임’의 배경도 바로 이때다. 서울역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바꾼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한편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 9월 준공된 서울역은 광복 전까지 경성역으로 불리다가, 경성부가 서울특별시로 개명된 1947년에야 서울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이때부터 2003년까지 역으로서의 기능을 하던 이곳은 2003년 11월 완공된 신관에 역할을 물려주고 현재는 ‘문화역 서울284’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284는 서울역의 사적번호에서 따온 숫자로, 현재 문화역 서울284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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