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이재오 “노무현의 포용력과 인간미, 文대통령 배워야”
[時代散策] 이재오 “노무현의 포용력과 인간미, 文대통령 배워야”
  • 글 이재오 전 의원/정리 윤진석·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5.1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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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강대강 대치, 노무현 대통령 전화로 실타래
김한길과 북한산 회동서 사학법 대승적 합의
민주-한국당, 민생의 이름으로 손잡고 악수할 때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글 이재오 전 의원/정리 윤진석·조서영 기자)

정치는 타협이고, 합의의 핵심은 협상이다. 대립하는 순간에도 물밑 접촉의 끈은 이어가야 한다. 그게 국민을 위한 이치 있는 행동이다. 지난 7일 서울 은평구 사무실을 찾아온 <시사오늘> 기자들에게 나는 이 점을 강조했다. 동물국회, 빈손 국회하며 여야가 으르렁대고만 있다. 그러다 보니 방송 등에서 과거 훌륭한 협상 사례를 조명하는 일도 늘어난 듯했다.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의 사학법 재개정 협상력도 회자되고 말이다. 당시를 듣고픈 기자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포용력 일화부터 풀어놨다. 그때도 이렇듯 봄날이었다.

자유한국당 이재오 전 의원은 동물 국회로 말이 많은 요즘 사학법 재개정 당시의 대치 국면을 상기하면서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의 일화를 들려줬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자유한국당 이재오 전 의원은 동물 국회로 말이 많은 요즘 사학법 재개정 당시의 대치 국면을 상기하면서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의 일화를 들려줬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 이런 대통령, 필요하지 않소?
어느 날 盧통으로부터 전화 온 사연

“나, 노무현입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예?”
“내가 노무현입니다.”

2006년 4월 28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원내대표로서 전국 순회 중이었다. 울산이었고, 지역구 의원들과 회식을 하던 자리였다. 밤 10시가 넘어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시끌벅적한 속에서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노 대통령. 뜻밖이었다.

“아니, 대통령님께서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내일 나하고 조찬 할 수 있습니까?”

순간 사학법 재개정 문제 때문임을 직감했다. 사학법 파동으로 정국이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여야 대치는 해를 넘겨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직전 해인 2005년 12월 9일 정기국회 마지막 날 여당(당시 열린우리당, 현 더불어민주당)은 사학법 개정안을 직권 상정했다. 사학비리 척결을 앞세우며 민주노동당과 힘을 합해 쪽수와 힘으로 밀어붙였다. 일방적 강행처리에 야당의 선택지는 장외투쟁이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국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엄동설한 한복판의 거리로 나갔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도 함께했다. “전면 무효”  “전교조의 사학 접수법” “편향된 교육 우려” “사회주의 하자는 법” “개방형 이사제 전 방위적 시행 반대”…. 한나라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촛불을 드는 순간이었다. 장장 100일 넘는 대치 정국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학법 재개정 논란을 둘러싸고 교착상태에 놓인 국면을 풀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여야 원내대표와의 조찬 회동을 요청했다고 이재오 전 의원은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학법 재개정 논란을 둘러싸고 교착상태에 놓인 국면을 풀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여야 원내대표와의 조찬 회동을 요청했다고 이재오 전 의원은 말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런 가운데 울린 노 대통령의 전화는, 교착상태에 놓인 국면을 풀 돌파구를 열려는 의중인 듯보였다.

‘양보를 받아내려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여기 울산인데요.”
그 말을 하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내일 조찬하려면 밤에 올라가야 됩니다.”

“그럼 밤에 올라오시죠.”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자, 같이 있던 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한밤 중에 대통령이 왜 전화를 해 온건지, 다들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상의도 할 겸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찬반 양상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야당 원내대표가, 여당 대통령이 만나자고 한다고 가는 게 옳으냐, 그르냐 하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가는 게 맞겠다 싶었다. ‘대통령이 밤늦게 전화하면서까지 만나자고 하는데 올라가는 게 좋지 않겠냐.’ 그 길로 밤중에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들린 곳은 24시간 대중목욕탕이었다. 눈 조금 붙이니 동이 터 올랐다. 샤워하고 바로 청와대로 향했다. 

2.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사학법 대치 정국, 야당 손 들어줘

 
2006년 4월 29일 오전 7시 . 청와대 관저에 도착했다. 여당의 김한길 원내대표가 먼저 와 있었다.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던 여야 대치 정국의 운명이 조찬 간담회 테이블에 올려질 게 뻔했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원내사령탑으로서의 어깨가 막중했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대통령과 셋이서 조찬 회동을 하는데 민주화 운동 시절 얘기부터 주거니 받거니 했다. 대통령도 인권변호사 출신인 만큼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재야 운동을 하다 내가 구속됐을 때 변호인단을 자처해준 인연도 있었다. 국회의원으로 만났을 땐 교육위원도 같이하며 싸워도 봤다. 인연이 없던 게 아니었다.

김 원내대표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인연이었다. 그의 선친과도 잘 알던 사이였다. 김철 전 사회당 당수로,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다. 김 당수는 1969년 박정희 유신 정권 때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운영위원이었다. 나는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장이었다. 함께 투쟁 계획을 짜던 시간들도 많았다. 당수께서 살아계실 때의 정초에는 세배도 하러 갔다. 당신 집에 가면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이던 김 원내대표도 보였다.

그런 인연 아니고도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문학적 공감대가 있었다. 김 원내대표는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의 소설로 베스트셀러 출신의 국회의원이었다. 나는 학생운동하다 군대에 끌려가 제대한 뒤에는 십여년 넘게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친 바 있다. 현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도 나의 애제자 중 한명이었다. 이후 재야운동의 길을 걷던 나는 YS(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지로 나온 경우였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전만 해도 군사독재 아래에서 십년 넘게 구속됐고, 다섯번의 모진 고문을 당하며 옥살이를 해야 하던 처지였다. 고통과 신음 속에 살아가던 날들이 끝나지 않을 터널처럼 이어지곤 했다. 그렇지만 겨울을 뚫고 한 잎을 피어내고야 마는 인동초처럼 어려운 와중에도 의지로 거듭 태어나는 시간들이었다.

이재오 전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학법 재개정 협상 양보는 초당적 자세로 이끈 폭넓은 협치의 면모였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런 면에서 포용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전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학법 재개정 협상 양보는 초당적 자세로 이끈 폭넓은 협치의 면모였다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런 면에서 포용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그때였다.

“김 (원내)대표님.”

지나간 얘기때문인지 문득문득 상념이 찾아올 무렵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현실을 일깨웠다. 노 대통령의 눈과 입이 내 옆의 김 원내대표를 향했다. 다시 긴장감이 흘렀다.

“김 (원내)대표님, 야당에서 고생하는데 이재오 (원내)대표 손 좀 들어주시죠. 야당 안을 받아들이시죠?”

그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대승적 차원에서 여당이 양보하면서 국정을 포괄적으로 책임지는 행보가 필요하다는 권고였다. 예상 외였다. 여당 편을 들어주려고 야당 원내대표인 나를 설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야당 원내대표 손을 들어주라 하니. 나도 모르게 김 원내대표 얼굴부터 살폈다. 굳은 표정의 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렵다며 항의 표시를 하려는지, 말문을 열기에 앞서 광대뼈 주위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대통령님.”
“네.”
둘 사이에 미묘한 파장이 일었다.
“여당 사정이 그렇지 않습니다. 당내 사정이 그렇지 않습니다.”
김 원내대표가 거듭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저도 잘 압니다.”
대통령도 부인하지 않았다.

야당에서 볼 때도 당·청 간 갈등이 불거져가던 시점이었다. 몇 달 전에는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탈당을 언급하기도 했다. 국정 지지도 하락에 따라 당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묘책으로도 해석됐다. 그렇지만 여러 현안을 놓고 엇박자를 내면서 당청 관계가 불편해진 데서 오는 결단이라는 설왕설래가 파다했다.

“뭐 당내 사정을 잘 아는데, 언제 여당이 뭐 제 말 잘 들었습니까. 허허허.”
웃음소리가 화통하게 맴돌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그 끝도 단호했다.
"이번엔 그렇게 협상을 하시죠."
김 원내대표 미간에 고심의 흔적이 역력했다. 식사를 마친 그의 발걸음은 분주한 듯 보였다. 당에 돌아가 구체적 상황을 제대로 전해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재오 전 의원은 2006년 1월 12일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원내대표 당선 후 이 전 의원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사학법 장외투쟁을 마무리 짓는 거였다.
이재오 전 의원은 2006년 1월 12일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원내대표 당선 후 이 전 의원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사학법 장외투쟁을 마무리 짓는 거였다.

 

3. 그 뒤로 욕을 못 하겠더라
“文통도 포용력 보여줬으면…”

남은 이는 노 대통령과 나, 둘이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청와대 구경이나 하고 가시죠.”
 
노 대통령이 제안했다. 내게 청와대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은 마음씀씀이가 느껴졌다. 나로서는 당장 시간이 바쁜 것도 아니었다. “그러죠.” 대통령을 따라 나섰다. 둘이서 관사 구석구석을 돌았다. 노 대통령은 나를 안내하며 방방마다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이 방은 누구랑 밥 먹었던 방이고. 이 방은 뭐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관저 뒤편의 청와대 뒷산이었다. 산책길이 순례길처럼 펼쳐졌다. 4월의 봄 향기도 물씬 났다. 걸음을 옮기니 남산이 바로 보였다.

“김영삼 대통령 때 불상을 치웠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이 그 말을 하고 멈춰선 곳에는 불상이 놓여 있었다.
“이 불상이 그겁니다.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대통령은 자랑하듯 불상을 가리켰다. 청와대에 있던 불상은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보물 1977호)이었다. 한때 김영삼 정부 때 치웠다는 유언비어가 돈 바 있다. 산책길을 돌며 이 설명 저 설명 해주는 대통령의 모습은 어딘지 흥이 나 보였다. 청와대 경례 방식 등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들어갈 때만 해도 뒷목이 뻐근했지만, 나올 땐 양 어깨가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또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 뒤부터는 노 대통령을 향한 욕이 확 줄었다. 아무리 모진 야당 원내대표라도 여당 대통령이 그 정도로 진정성 있게 나오니까, 함부로 힐난을 못하게 되는 거였다. 밥 먹고 실컷 대화 잘하고 한 시간 동안 내내 청와대 산책하면서 이야기 다 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공격을 가하는 것도 아닌 듯여겨졌다. 사무총장이든 딴 사람들이 욕하도록 놔두는 경우는 있어도 전처럼 대놓고 뼈아픈 공세를 가하지는 못했다. 그것만 해도 정국이 훨씬 부드러워지는 거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으면 좋겠다. 더불어민주당과 범여권의 패스트 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강행 처리 이후 여야 간 의회 협상은 올스톱 됐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전국 장외 집회를 멈추지 않고 있다. 마치 사학법 파국 때의 데자뷔를 보는 것도 같다. 국회가 저러니 당장 추경이 문제가 되고 있다.
‘범여권 160 의석수 이상 확보했으니 야당(한국당)과의 협의 없이 통과시키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럴 때 대통령이 야당 대표든 원내대표든 청와대에 부르는 거다.

“우리 식사라도 한 끼 합시다” “막걸리라도 한잔 합시다” “차 한 잔 합시다”….
‘난 애로사항이 이거요’,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어느 정도는 양보를 좀 해주시오’하며 털어놓고 얘기를 하는 거다. 여당 측도 불러 ‘야당이 이 정도니, 우리가 이 부분은 양보를 합시다’고 설득도 하고.

대통령이 포용력을 발휘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훨씬 더 인간미도 있고, 포용력도 있었다. 사학법 재개정 협상 양보는 초당적 자세로 이끈 폭넓은 협치의 면모였다. 국회를 정상화시켜 비정규직 입법과 3·30 부동산대책 등 주요 쟁점 현안과 산적한 민생 법안을 일괄처리 할 수 있도록 그랜드 바게닝(일괄타결)을 주도한 셈이었다. 지금도 산책길을 함께 걷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법이다.

이재오 전 의원은 사학법 등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고자 김한길 원내대표에게 긴급 회동을 제안했다. 두 여야 원내대표는 2006년 1월 서울 구파발 북한산 매표소에서 만나 대동문 정상까지 올라 담판을 지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 전 의원은 사학법 등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고자 김한길 원내대표에게 긴급 회동을 제안했다. 두 여야 원내대표는 2006년 1월 서울 구파발 북한산 매표소에서 만나 대동문 정상까지 올라 담판을 지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4. 북한산에서의 단독 회담
“김 원내대표님, 등산이나 갑시다”

북한산 정상에서 가진 여야 원내대표 회동. 이른바 산상 회담도 파격적 협상의 일화로 기억된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조찬 회동이 있기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시기 역시 사학법 파행이 최대 쟁점일 때였다. 우리로서도 한 달 넘게 등원거부·장외투쟁을 이어가느라 지쳐가고 있었다. 당내 소장파와 중도파 중심으로 국회가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눈들이 많았다. 바로 그 무렵 나는 2006년 1월 12일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김무성 후보와 겨뤄 총 123표 중 72표를 얻으며 압승을 거뒀다. 원내대표 당선 후 내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는 사학법 장외투쟁을 마무리 짓는 거였다.

담판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북한산 등산이나 갑시다.”

김한길 원내대표에게 긴급 회동을 제안했다. 나름의 비장한 결심 끝에 내린 착안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갓 원내대표로 선출된 후였다. 여당 원내대표로서 그 또한 해빙모드의 돌파구 마련이 급선무였다.

우리는 2006년 1월 30일 오전 9시 서울 구파발 북한산 매표소에서 만났다. 목적지는 대동문까지였다. 입구에서부터는 한 4km쯤 될 거다. 북한산성에서부터 중흥사, 동장대를 거쳐 중성문, 대동문까지 갔다가, 다시 처음 위치로 내려오는 여정이었다. 녹록지 않은 겨울산행 코스였다.

날이 몹시 추웠다. 땅이 얼고 곳곳에 안개가 자욱했다. 얼어붙은 국회처럼 북한산도 얼음산처럼 미끄러웠다. 조심조심 걷자니 옆에 있는 이가 가장 의지가 됐다. 서로가 손을 잡고 끌어주고 밀어주고. 자연스레 덕담이 오갔다.

“빙판을 김 (원내)대표와 손잡고 함께 걸으니 참 좋습니다. 김 (원내)대표, 우리의 목적지가 대동문까지 아니요? 우리도 대동단결합시다.”
내 말에 김 원내대표도 화답했다.
“안개 속에서 일출을 봤는데, 아주 멋있습니다. 국회도 국민 앞에서 그렇게 폼이 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5. 대동문 정상에 올라
“여기서 합의 못 보면 못 내려간다”

이윽고 대동문 정상에 올랐다. 시내가 한눈에 펼쳐졌다. 망루에 올라 관산을 조망하며 둘만의 단독 회동이 시작됐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로 웃음을 보였지만, 합의의 절대성을 서로들 잘 알고 있었다.

김 원내대표가 이번에는 포문을 열었다.
“대동문 정상에 올랐으니, 국회도 하루속히 정상화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단단히 고삐를 조이며 응수했다.
“우리, 여기서 합의를 못 보면 못 내려간다, 그런 각오로 임합시다. 산 위에서 잘 생각인 거 아닌 이상, 무사히 내려가려면 합의를 봅시다.’
지지부진하게 끌지 말고 사생결단. 담판을 짓자. 그 뜻으로 한 말이었다.

“선배님.”
김 원내대표가 불쑥 꺼내며 한 말이다. 평소 사석에서는 나를 ‘선배님, 선배님’이라 불렀던 그다.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습니까?”
나를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곧바로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구체적인 문안을 두고 조율을 벌였다. ‘상임위에 상정돼야 하니,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선은 이정도 선이다.’, ‘여당이 양보해줄 선은 여기까지다.’ 둘이서 거의 한 시간가량 밀고 당겼다.

“그 정도 선이면 좋소. 받아들이겠소.”
이윽고 내 말에 김 원내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당이 요구하는 선이 그 정도 선이라면 우리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드디어 합의문을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다. 최대 쟁점인 사학법 재개정 논의를 비롯해 인사청문회 청문보고서 결과보고서, X파일 특별법·특검법, 기초의회의 선거구 재획정 등 미해결 현안에 대한 합의들이었다.

극적 합의에 대한 기자회견을 앞둔 가운데 박근혜 당시 대표와 연락이 닿지를 않아 초조했던 시간을 보내며 하산해야 했다. 하지만 기다린 끝에 박 대표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고 이 전 의원은 회상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극적 합의에 대한 기자회견을 앞둔 가운데 박근혜 당시 대표와 연락이 닿지를 않아 초조했던 시간을 보내며 하산해야 했다. 하지만 기다린 끝에 박 대표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고 이 전 의원은 회상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 기자회견 앞두고 난관 봉착
“오늘로 장외투쟁은 끝납니다”

남은 것은 극적 합의에 대한 기자회견이었다. 또 이를 위해 당대표에게 보고를 드리는 일이었다. 원내대표의 전권사항이긴 하지만, 당수의 동의를 얻는 것은 중요했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거다. 대동문에서 북한산 입구의 기자회견 장소로 내려오는 데까지 두 시간가량이 걸렸다. 그때까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합의한 김에 회견을 통해 끝내야지, 시간 가면 파투가 난다.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정했던 회견 시간을 한 시간이 넘겨도 연락이 안 됐다. 두 시간 지나도 연락이 안 됐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거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김 원내대표가 답답한 나머지 다급하게 물어왔다.
“안 되고 되고를 떠나서 대표하고 통화를 못해봤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그리 말했지만, 입이 바짝 타는 것 같았다.

두 시간쯤 더  지났을까. 박 대표로부터 드디어 연락이 왔다.

“대표님, 지금 김한길 대표하고 합의를 봤습니다. 합의 내용은 이러이러 합니다.”

그러나 박 대표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부턴 내가 지고 갈 짐이었다.

“제가 책임집니다. 원내대표가 책임질 테니까, 대표님 그냥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전화를 끊고 곧장 합의문을 발표했다.

“오늘로 한나라당 장외투쟁은 끝납니다. 내일부터 원내로 복귀합니다.”

53여일만의 극적 타결. 야당 국회의원들로서는 숨통이 트이는 발표였다. 합의문도 손해 볼 내용은 아니었다. 야당의 안을 상임위에서 다시 다루기로 했으니, 협상 과정에서 충분히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면 될 일이었다.

박근혜 대표도 더는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인간 이재오와는 친하지 않았지만, 원내대표 이재오 만큼은 신뢰했다. 처음 선출됐을 때만 해도 우리 둘은 물과 기름이라는 소리들이 많았다. 재야 운동권 출신과 故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점부터 이래저래 편치 못한 관계였다. 박 터지게 싸울 거다, 한두 달도 못 갈 거라고 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원내대표 된 순간부터 나는 모든 걸 내려놨다. 박 대표를 깍듯이 모셨다. 박 대표도 ‘원내대표 수행하는 동안에는 입 댈 게 없다’며 나를 신임했다. 모두가 의외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역대 당에서 가장 아름답게 원내대표랑 당대표가 잘 해나갔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전 대표는 여야가 대치 정국 속에서도 물밑 협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상회담과 대통령의 양보 권고 후에도 이 전 의원은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 비공식이라고 해도 머리를 맞대려 했다고 언급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 전 대표는 여야가 대치 정국 속에서도 물밑 협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상회담과 대통령의 양보 권고 후에도 이 전 의원은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 비공식이라고 해도 머리를 맞대려 했다고 언급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7. 말 많은 동물국회
협상의 끈 놓지 않을 때

요즘 동물국회, 말들이 많다.

1차적 책임은 여당에 있다. 국회와 국정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게 하는 게 여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여당이 능력이 없다’ ‘포용력이 없다’ ‘협상 수단이 없다’ 등 이런 말이 나도는 거다. 물론 야당 책임이 없느냐 하면, 또 아니다. 여당이 안 받아들여주면 몸으로 때운다, 식의 대응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실제적으로 야당의 안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안을 내놔야 한다. 그래야 양보하고, 물러서고, 마지노선이다, 받아라, 이거 안 받으면 진짜 당신들은 나쁜 사람 되는 거다. 그렇게 할 수 있다.

사학법 재개정 당시 우리가 그랬다.

산상회담과 대통령의 양보 권고 후에도 여야 대립 국면은 결과적으로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그럴수록 우리는 비공식이라고 해도 머리를 맞대려 했다. 특히 김 원내대표와는 중국집에서 자주 만났다. 정국 경색 속에서도 물밑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았던 거다. 같이 자장면 먹으면서 상대 당의 사정도 들어가며 원내 협상을 다각도로  전개했다.

싸워서는 야당의 투쟁 의지를 보여주고, 내면적으로는 여야가 타협할 수 있는 협상안을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 그게 원내대표로 있을 때의 내 방식이었다. 나만의 스타일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슬기로운 방법이었다.

지금이라도 여야가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다.
그리고 민생의 이름으로 손잡고 악수할 때가 아닐까.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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