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人] 이재오, 재야 운동하면 그를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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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人] 이재오, 재야 운동하면 그를 빼놓을 수 없다
  • 윤진석 기자
  • 승인 2019.05.17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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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독재 정권 타도에 올인
다섯번 구속·모진 고문, 6·3항쟁부터 6월 항쟁 주도
심재철 유시민 진술공방, “솔직해지고, 이해할 때”
“과거 학생운동은 순수하게 독재 타도만 있었다”
“90년대부터 학생운동 이념 성향으로 분화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자유한국당 이재오 전 의원은 60년대부터 90년대 이르기까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하며 5번 구속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자유한국당 이재오 전 의원은 60년대부터 90년대 이르기까지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하며 5번 구속되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재오(75) 전 의원하면, 재야운동 시절을 얘기 안 할 수가 없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 이르기까지 학생운동과 재야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박정희 정권 때 세번,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 두번. 도합 다섯번 구속됐다. 일제 치하 수준의 모진 고문도 당했다. 10년 반 넘는 세월을 옥살이했다. 슬하의 1남 2녀 중 첫째가 태어나던 순간에도 감옥 안에 있었다. 71년 10월 9일 부인 추영례 씨와 결혼한 이듬해 구속된 후 20년 가까이 집을 떠나 있었다.

1945년 웅장한 기개의 깊고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정의로움을 쫓았다. 중학생 때는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농촌운동가의 꿈을 꿨다고 전해진다. 청운의 희망을 안고 중앙대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 협정에 반대”하며 6·3항쟁을 주도했다. “군사 정권 퇴진하라!” 학교 안팎으로 거센 시위가 일었다. 6월 3일 독재정부는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학생운동을 전부 올 스톱 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 전 의원은 멈추지 않았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 비준 반대 학생운동을 도모했다. 이 일로 제적이 됐고, 수배 중 체포됐다. 곧바로 강제징집. 군에 끌려갔다. 5사단 공병대로 갔는데, 원래는 1968년 10월 제대를 하는 거였다. 그러나 다음해인 69년 4월에서야 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남파 무장공작원 출신의) 김신조가 68년 넘어와 청와대를 습격하는 바람에 제대했어야 할 사람들의 공무가 연장됐던 것이다.

그는 지난 7일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

“재수가 계속 없던 거지(웃음).”

사실 제대만 하면 학교로 돌아갈 줄 알았다. 복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군 생활하면서 마음먹었던 게 데모 같은 것은 잊자. 다 때려치우자. 그거였다. “공부만 열심히 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든지, 판검사 시험을 보든지, 고시 공부를 하든지 학생 본업으로 돌아가겠다.” 정말 그럴 작정이었다. 

하지만 웬걸. 나름 비장한 각오로 인생 좌우명 새로 쓰고 학교로 돌아갔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또 데모할지 모르니까 복교를 안 시킨 거였다.

“그때 심정을 요즘 젊은이들 방식대로 말하자면 ‘꼭지가 돌았다’이다. 뭐? 삼선개헌(1969년 박정희 집권 연장을 위해 단행된 개헌)한다고 복교를 안 시켜? 삼선개헌하면 우리가 데모할지 안할지 어떻게 알아? 주동할지 모른다, 시위할지 모른다, 그 이유 하나로 복교를 안 시켜?”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다닌 대학이건만, 심기일전하고 진짜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었는데…. 수업도 못 듣고 졸업도 못하다니. 이 전 의원은 한꺼번에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고 했다.

좌절의 시기였다. 그러면서 절감한 것이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 편하게 살려면 이 군사독재 권력을 저대로 두고는 어렵다. 군사 독재를 무너뜨려야 인간답게 살수가 있겠구나”였다. 그 뒤 결심한 것이 진짜 ‘독재 타도 운동’에 뛰어들자는 거였다. “복교하는 게 급한 게 아니고 군사독재와 싸워야 되겠다.”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1971년 함석헌·계훈제 선생, 김수환 추기경과 민주수호청년협의회를 결성했다. 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활동 등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군사 독재에 저항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드러난 87년 5월에는 YS(김영삼) DJ(김대중) 등 정치인과 시민 사회 종교계가 총규합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에 참여했다.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목표로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군부 퇴진 후에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 등 진보정당 건설에 노력했다.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재야 운동 시절 구속돼 당한 고문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전언이다. 특히 한참 아래의 386세대 등 후배 운동권들보다 그가 겪은 시대는 더욱 엄혹했다. 일제강점기에 횡행하던 고문들이 그대로 자행되던 때였다. 물고문, 전기고문 등은 예사였다. 나무젓가락을 이용해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하는 고문도 있었다. 양손양발을 묶고 매달아 거꾸로 고춧가루 물을 뿌리기도 했다.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다 잡혀 갔을 땐 정보부 지하실에 들어가면, 먼저 옷을 팬티 한 장 안 남기고 다 벗겼다. 처음 당한 고문은 (돼지 바비큐처럼 네 발을 봉에 묶듯) 양손 양 발목을 묶고는 그 사이에 야구방망이를 꼽아 매달았다. 얼굴 위로 하얀 수건을 딱 덮어놓고, 고춧가루를 진하게 탄 주전자를 얼굴에 붓는 거다. 숨이 가쁘니까 자꾸 숨을 몰아쉴수록 물이 밖으로 안 떨어지고 수건에 묻어서 그대로 콧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절하면 찬물 끼얹어 붓고…. 느닷없이 묻는 게 ‘김일성이 언제 만났냐’ 등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구속시키면 인권 문제 등이 불거지니까, 반공법, 국가보안법의 색깔론으로 몰아 고문의 명분을 얻으려는 수작이었다.” 

한번은 맹장이 터진 것을 고문관들이 방치해버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지금의 적십자 건물이, 옛날엔 정보국이었다. 지하 감방에 있다 맹장이 터졌는데, 근 20일 방치됐다. 결국 복막염까지 갔고, 몸 전체로 염증이 퍼졌다. 사람이 죽게 생겼으니, 그제야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가 수술하는 동안에 정보부원들이 고문 등이 밝혀질까, 겁이 나서그런지 서둘러 맹장만 떼게 했다. 염증 찌꺼기 등 불순물도 제거 않고 봉합시켜 부랴부랴 구치소로 던져놓은 것이다.”

이 전 의원은 고문관들의 행태에 대해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고 술회했다.

“결국 다시 수술한 자리가 재발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외부에서 의사가 왔다. 의무실 마룻바닥에 눕혀 놓고는 마취도 않고 째는 게 다반사였다. 무려 열두 번이나 다시 붙이고 째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하다하다 안 되니, 명동성당 앞의 성모병원으로 보내더라.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몸에는 여전히 당시의 상처가 깊게 남겨져있다. 여러 차례의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긴 흉터가 맹장이 있던 자리의 배위로 길게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나중엔 그런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그냥 십년 이십년 너희들 주고 싶은 데로 줘라. 대신 고문만은 말아 달라.” 하지만 다섯번 구속 동안 고문은 계속됐다. 감옥 밖을 나오니 어느덧 나이가 마흔 여덟이었다.

복교 꿈은 30년이 지나서야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졸업은 32년 만에서야 할 수 있었다. 독재를 무너뜨리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된 건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학생운동과 재야 운동 사이,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은 적도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노웅래 의원이 존경하는, 은사이기도 하다.

1994년 김영삼 문민정부 때 민주자유당(현 자유한국당)에 입당, 현실정치 입문을 본격화했다. 당명이 신한국당으로 바뀐 뒤 96년 15대 총선에서 첫 당선,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이후 서울 은평을이 지역구로 16, 17, 18, 19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됐다. 국회 문광위,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원내총무, 당 수석 최고위 등을 지냈다.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장,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특임장관, 늘푸른한국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문재인 정부의 4대강보 해체 추진에 반대하는 4대강국민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어느덧 재야 운동계의 원로가 된 이 전 의원. 저항정신으로 보면 여전히 한창때인 듯했다. 요즘도 자신이 나서야 할 때는 혼자서라도 천막농성, 1인 피켓시위 등도 마다않고 있다.

이런 그가 볼 때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후배 운동가들의 진술서 논란은 안타까운 듯 보여 졌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은 1980년 서울의 봄 기간 학생운동 당시 쓴 합동수사본부 진술서를 놓고 진실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 이사장이 방송에서 진술서 일화를 전하자, 심 의원은  폄훼‧왜곡하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유감을 표했다. 또 유 이사장이 쓴 진술서를 공개하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증거로 쓰였고, 학생운동을 하던 학우들에게는 직접적 위협의 칼날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유 이사장은 비밀조직을 지키기 위해 허위로 적은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이 전 의원은 이 같은 공방에 같은 날(7일)<시사오늘>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고문이 너무 처절해 그 앞에서 불지 않기는 어렵다. 그래서 동지들끼리 서로의 집도 모르고,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했다. 그래야 아는 게 없으니 못 불 것 아닌가. 독재 정권의 엄혹한 상황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고문을 받았든 아니든 솔직해질 것은 솔직해지고, 반성할 것은 반성을, 이해할 것은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우리가 학생운동 할 때는 군사독재를 반대하느냐, 아니냐  였다. 그 시절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은 순순히 독재냐 반독재냐. 민주화냐 반민주화냐. 군사독재타도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냐. 단순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9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라는 게 생겼다. 학생운동이 이념성향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유시민과 심재철은 운동권이 분화될 무렵 직전의, 경계에 있는 친구들이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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