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길 "음악이 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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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길 "음악이 나를 살렸다."
  • 박지순 기자
  • 승인 2009.09.22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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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밤 업소 섭외 0순위는 데블스
한국 최초의 소울(Soul) 그룹 ‘데블스’의 리더 김명길(62)을 만나러 가면서 기자는 가슴이 설렜다. 한국 가요사의 몇 페이지는 장식할,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잊혀진 그래서 ‘전설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들어맞는 음악 집단의 리더가 김명길이어서 그랬다.

기자가 데블스와 김명길을 알게 된 것은 숨은 명반을 발굴해 재발해 온 ‘리듬 온 레코드’에서 올 초 데블스의 1집과 2집을 묶어 CD로 재발매한 음반을 접하면서다. 막연히 자신만의 색채를 갖춘 음악일 것이라는 짐작은 크게 빗나갔다.
 
각각 1971년과 1974년 발매된 시점을 생각할 때 데블스 1집과 2집은 ‘가요의 섬’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만큼이나 제법 음악을 들었다는 기자에게도 비슷한 부류의 음악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 김명길은 "데블스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뛰어나다"고 자평했다.     © 시사오늘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소울이 중심에 자리 잡고 펑키가 가미된 듯했다. 7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장르였고 데블스는 당시의 ‘선진적’ 고정팬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것에 비해 단명하고 말았다. 데블스가 현역으로 활동하며 발표한 음반은 독집 3장과 He5와의 스필릿 음반(음반 한 장에 두 명 이상의 가수 노래를 함께 녹음하는 일종의 옴니버스 음반) 1장이 전부다.
 
‘리듬 온’과 ‘비트볼’에서 데블스 음반 재발매로 재평가 움직임 일어
 
리듬 온 레코드 이전에도 데블스 2집이 ‘비트볼 레코드’에서 LP로 재발매된 적이 있다. 발매된 지 35년이 넘게 된 음반이 재발매 된다는 것은 데블스가 가요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을 반증한다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최호 감독이 데블스를 ‘고고 70’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데블스는 현역 시절 태권도 복장으로 무대에 서거나 해골 복장으로 관을 끌고 나오는 퍼포먼스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멤버들이 연주를 하며 스텝을 밟는 동작은 관객들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도록 했다. 방송이나 음반판매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당시 ‘소울 대왕’으로 불리며 밤 무대를 평정했다.

‘고고 70’에서는 주로 데블스의 이와 같은 시각적 이미지가 표현됐다. 김명길은 ‘고고 70’에 대해 “아쉽다”고 평했다. 그는 “최 감독이 영화 제작 과정에서 나를 찾아와 많은 자료를 받아가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 영화에 반영된 내용은 일부 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데블스의 실상은 김명길의 기억을 통해서만 그려볼 수 있을 듯하다.
 
“신중현과는 다른 부류, 비틀즈도 듣지 않았다”
 
‘데블스는 곧 김명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잦은 멤버교체에도 김명길은 데블스의 리더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는 데블스 뿐만 아니라 모방의 수준을 벗어나 자생적인 한국 가요를 만들기 시작하던 무렵의 가요사를 증언해줄 수 있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나 줄곧 인천에서 학교를 다닌 김명길은 고등학교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갔다. ‘정말일까’싶었다. 그는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20살 무렵에야 기타를 처음 잡았다.
 
그리고 약 1년이 지난 1968년 4인조 데블스를 결성한 것인데 기타를 배운 지 1년 여 만에 당대 정상급 밴드의 리더가 됐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명길이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기타 실력을 단시일에 빨리 키웠다”고만 무덤덤하게 말했다.

데블스는 결성 1년이 지나 트럼펫과 색소폰 멤버를 보강, 브라스 밴드의 면모를 갖추고 파주와 왜관, 김제 등의 미군 부대를 주 무대로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김명길은 초창기 시절 “신중현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음악을 했고 비틀즈를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가요사에서 1960년대 말 이후 신중현과 비틀즈를 듣지 않고 자기만의 음악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간과돼서는 안 될 중요 사건이다.
 
“흔한 음악은 취급도 안 했다”
 
그러면 데블스가 모델로 삼은 뮤지션은 누구였을까. 김명길은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미국의 흑인 소울, R&B 가수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음)을 즐겨 들었다”고 답했다.

그는 “보니엠(Boney M)이나 시시알(CCR)처럼 흔해서 누구나 다 연주하는 레퍼토리는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며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음반을 구해 ‘야전 전축’으로 천천히 돌리며 음을 듣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 악보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 작업을 ‘판을 딴다’라고 표현했다.
 
▲ "죽기 전에 신곡을 발표하기 위해 곡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  김명길은 얼만 전 음악 작업용 컴퓨터를 구입했다.     © 시사오늘


독학이나 다름없는 연습과정을 거친 데블스는 미군 무대 오디션을 당당히 통과하며 점차 자신의 무대를 넓혀 갔다. 김명길은 40년 전의 오디션 과정을 기억하며 “1등은 하지 못했고 그 다음 등수 정도 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무대에서 노래한 것을 자랑하는 가수들이 많지만 오디션을 통과해 정식으로 인정받은 경우는 드물다”며 “오디션에 떨어진 가수들도 미군무대 가수임을 떠벌리곤 했다”고 당시의 세태를 전했다.

김명길은 왜관 미군무대 시절 데블스가 부대 내 최고 인기밴드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왜관은 미군의 보급물자가 집결하는 곳이었고 클럽은 ‘쫄병’, 서진(부사관), 아피서(장교) 별로 구분돼 있었다고 기억했다.
 
미군들에게 1967년 26세에 요절한 Otis Redding의 ‘The dock of the bay’를 부르면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김명길은 어렵게 구한 판을 따 악보를 작성하고 철저한 연습을 거쳐 미군들 앞에 섰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무려 다섯 번의 앵콜이 이어졌다.

미군무대에서 명성을 쌓던 시절 데블스가 받던 월 급료는 숙식제공과 현금 2만5,000원, 아리랑 담배 두 갑이었다. 여섯 명의 멤버가 4천 원씩 나눠 갖고 천 원이 남는 액수였는데 김명길은 “의식주를 해결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있는 생활을 했다”고 당시의 급여 수준을 얘기했다.
 
1970년대 밤 무대 섭외 0순위는 데블스
 
미군무대에서 경륜을 쌓은 데블스는 1970년 서울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의 전신)에서 열린 ‘플레이보이컵배 전국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구성상과 가수왕상을 수상하며 중앙무대 등장과 동시에 정상급 그룹의 반열에 올라섰다.
 
1977년 세 번째 독집을 낼 때까지 고고클럽을 중심으로 한 밤 업소에서 데블스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업소 홍보를 위한 게스트로 데블스는 늘 섭외 0순위였다”고 김명길은 회고했다.

유행을 좇지 않아서였을까. 데블스는 1980년 팀을 해체하고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명길은 지난해 9월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과 젊은이들의 독무대인 홍대 주변에서도 연주를 펼쳤고 “40년 동안 단 하루도 연주를 쉬어본 날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밤 업소에서 기타연주와 보컬로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손님들 중에는 자신의 연주와 고음 화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흥에 겨우면 무대까지 뛰쳐 올라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김명길 풍으로 두 번 쓰러졌지만 음악의 힘으로 건강 회복
 
기자가 김명길을 만났을 때 그는 언어가 다소 서툴러 보였다. “풍을 두 번이나 맞았습니다. 제가 건강을 지금처럼이나마 회복한 건 오직 음악을 했기 때문입니다. 업소 사장님께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컴퓨터를 한 대 구입했다. 음악 작업을 위해서다. 앞으로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도 “내 일생은 음악 밖에 없다”며 “죽기 전에 신곡을 내기 위해 곡을 구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노장 음악인이 신세대 음악을 어떻게 바라볼까도 궁금했다. 예전에 비해 진지성이나 수준이 떨어졌다고 답할 줄 알았지만 이 예상도 빗나갔다. 김명길은 “음악은 다각적으로 봐야 하는데 현대 대중음악은 기능면에서 과거에 비해 우수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길에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기타를 등에 매고 가는 한 남자와 우연히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남자는 미국의 한 음대에서 3년간 유학하다 학비 부족으로 귀국해 기타 강습소를 운영하며 음악 작업을 하고 있는데 김명길은 그 남자와 음악 얘기를 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경륜이나 명성으로 본다면 얕보기 쉬운 젊은 연주자를 인정하는 김명길의 모습에서 60대의 나이에도 끊임없는 연주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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