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역] 정치 지형 흔든 ‘충청도 핫바지론’ 시작된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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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 정치 지형 흔든 ‘충청도 핫바지론’ 시작된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9.05.24 2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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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세 강하던 충청, JP 뜻 따라 DJ에게 우세 선물…DJ 당선에 일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DJP연합은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시사오늘
DJP연합은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시사오늘

“네. 지금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제15대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됐습니다.”

1997년 12월 19일 새벽 4시 12분. TV에서는 ‘김대중 당선’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개표율이 98.0%에 달해서야 승자가 확정된, 말 그대로 ‘숨 막히는 접전’이었다. 이로써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유일하게 ‘비(非) 영남’ 출신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지금도 완전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2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선거는 ‘지역주의’ 선거였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여당이 민심을 잃고, 이인제의 독자 출마로 인한 보수 분열 속에서도 이회창이 DJ와 접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지역주의 덕이 컸다. 제15대 대선에서 이회창이 영남에서 얻은 표는 총 421만여 표로, DJ(96만여 표)보다 325만여 표나 많았다. 이조차 이인제가 영남에서 가져간 179만여 표를 제외한 숫자다.

DJ는 호남에서 306만여 표를 독식(이회창 11만여 표)했지만, 영남 유권자 수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DJ에게는 충청이 있었다. 대전과 충남, 충북은 무려 101만여 표를 몰아주며 DJ에게 확실한 우세를 선물했다. DJ는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에서의 근소 우세와 충청에서의 승리, 호남에서의 압승을 바탕으로 영남에서 대승을 거둔 이회창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그렇다면 충청은 왜 DJ에게 표를 던졌을까. 당시 충청은 정치 성향이 영남권과 비슷한 지역이었다. 제13대 대선 때만 해도 충북은 노태우(36만여 표)에게 1위, YS(21만여 표)에게 2위를 안겨줬다. 3위는 JP(10만여 표)였고, DJ는 4위(8만여 표)였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정치적 기반인 충남은 JP에게 69만여 표를 집중시켰지만, 노태우(40만여 표)와 YS(25만여 표)의 득표율도 만만치 않았다. DJ는 충남에서도 19만여 표를 얻으며 4위에 머물렀다.

제14대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YS는 대전에서 20만여 표, 충남에서 35만여 표, 충북에서 28만여 표를 얻은 반면 DJ는 대전에서 17만여 표, 충남에서 27만여 표, 충북에서 19만여 표를 얻는 데 그쳤다.

그랬던 충청이 DJ에게 승리를 안긴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를 1995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1990년 ‘3당합당’에 참여했던 JP는 ‘호랑이굴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작한 YS에게 밀려 민주자유당(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한다. JP는 자민련의 지지 기반으로 자신의 고향(충남 부여)인 충청을 선택하고 세 결집에 돌입했다. 이때 JP가 선택한 전략이 ‘지역감정 자극’이었다.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둔 1995년 6월 13일, 천안역 지원유세에 나선 JP는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 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른바 ‘충청도 핫바지론’이었다. DJ의 호남, YS의 영남과 같은 탄탄한 지지 기반이 필요했던 JP는 지역감정 카드를 꺼내들었고, 핫바지론을 계기로 충청 민심은 급격히 JP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JP가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충청 표심을 결집시켰던 천안역의 모습. ⓒ시사오늘
JP가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충청 표심을 결집시켰던 천안역의 모습. ⓒ시사오늘

‘김종필 바람’은 우선 언어적 자극에서 시작된다. “더 이상 핫바지가 되지 말자”는 ‘지역 정서 부추기기’에서 출발해 “이번엔 본때를 보이자”는 선거 결정론까지가 그것이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민자당을 쫓겨난 데서 촉발된 자민련 바람은 한때 드세었지만 김 총재의 정치적 한계로 인해 오래가지 않아 수그러들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았다. 대전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충남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으로 자민련을 꼽는 주민과, 자민련을 지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절반을 넘는 데서 보듯 바람은 실천력을 수반하는 실체로 자리 잡고 있다. 충남지역의 경우 ‘잊혀진 정객’으로 여겨지던 김 총재에게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나 선거 결정론이 바람잡이에만 그칠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대전도 본격 선거전에 접어들면서 자민련이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인식이 장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해 바람의 실체가 드러나는 상황이다. 따라서 애초 바람은 있되 강도는 약해 지난 87년 대선과 88년 총선 당시의 김 총재에 대한 지지율(43.8% 및 45.9%)을 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적어도 충남지역에는 맞지 않을 전망이다. (후략)
1995년 6월 15일자 <한겨레> ‘핫바지 되지 말자…JP바람 드세지나’

이 분석처럼 충청에서 일어난 JP의 돌풍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민련은 제1회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광역단체장을 싹쓸이하며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이듬해 열린 제15대 총선에서는 대전·충남·충북에 배정된 28석 가운데 24석을 독식, 명실상부한 ‘충청 대표 정당’이 됐다. 이로써 민자당-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일부로 여겨지던 충청은 대한민국 정치 지형의 한 축을 담당하는 독자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충청의 독자 세력화는 DJ 입장에서 엄청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호남과 영남이 갈라지고, 나머지 지역에서 반반 싸움이 펼쳐지는 이전 구도는 DJ에게 불리한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JP가 충청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면서, DJ는 JP와 손을 잡을 경우 충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반전을 도모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DJ는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싱크탱크였던 아태재단으로부터 JP와 연합해야만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DJP연합’ 초안을 받은 DJ는 본격적으로 DJP연합 협상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통령 후보는 DJ로 하고 초대 국무총리는 JP로 하며, 제16대 국회에서 내각제로 개헌한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JP가 DJ와 연합하자, 충청 표심도 DJ에게로 향했다. 이전 두 차례 대선에서 노태우·김영삼에게 투표했던 충청도민들은, 제15대 대선에서 DJ를 선택하며 JP의 힘을 입증했다. DJ가 충청에서 획득한 표수는 108만6252표로, 이회창(67만7933표)보다 40만8319표 많았다. 제15대 대선 전국 득표수 차이가 39만557표에 불과했으니, 충청 표심을 바꾼 것이 DJ의 승리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보수의 일부였던 충청을 JP가 ‘핫바지론’으로 결집시킨 뒤 DJP연합을 구성함으로써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을 만들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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