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청문회①] “돈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5공청문회①] “돈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5.28 2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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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두번째 이야기, 1988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노태우 전두환의 회고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대통령 회고사’는 〈시사오늘〉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다. 우리의 두 번째 재생은 ‘5공 청문회’ 중 제5공화국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다.

우리의 두 번째 재생은 ‘5공 청문회’ 중 제5공화국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다.ⓒ시사오늘 김유종
우리의 두 번째 재생은 ‘5공 청문회’ 중 제5공화국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특위)다.ⓒ시사오늘 김유종

1988.05.18.

1980년 광주의 5월 이후 8년 만이었다. 오전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야3당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총재회담이 열렸다. 회담은 김종필 당시 신민주공화당 총재가 현안별 합의문 초안을 준비하고, 두 김 씨가 의견을 가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5공 청문회를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이날 합의의 키워드는 5공 청산이었다. 야권은 5공 비리조사 특위, 광주운동 진상규명 특위 등 5개 특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144페이지

국회가 개원하자 이들(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곧바로 5공특위와 광주특위를 구성하기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5공 문제를 무기삼아 노태우 정권을 몰아붙이자는 데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158페이지

1988.11.01.
 
“난 안갈랍니다”
“안됩니다, 의원님. 국회의원이면 국회 일을 해야지 무슨 농성입니까.”

몇 차례 실랑이가 벌어졌다. 옷가지와 이불을 챙길 궁리까지 하던 노무현 당시 초선 의원은 하는 수없이 고집을 꺾었다. 웬만하면 자신의 생각을 따라 주던 비서들이 처음으로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럼 딱 첫날 한 번입니다. 별 볼일 없으면 나 농성 갑니다.”

불과 첫 청문회를 앞두고 이틀 전이었다. 노무현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쓸데없는 말장난보다는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을 돕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이왕 시작한 일이라, 비서들과 함께 꼬박 이틀 밤을 세워가며 열심히 준비를 했다.

청문회가 열리기 2~3일 전인가 부산 연합철강 노동자들이 서울로 올라와 농성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중략) 결국 그곳에 가기로 하면서 청문회는 안 나가는 것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서들이 농성은 길게 가겠지만 청문회는 짧게 끝날 것이니 일단 청문회를 하고 가라고 하도 요청을 해서 청문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 〈성공과 좌절〉, 142-143페이지

1988.11.03.

5공특위 첫 청문회는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밤새 진행됐다. 조사대상은 일해재단(日海財團, 현 세종연구소)으로, 5공 시절 전두환의 비자금을 위해 당시 대기업에게 연간 100억 원씩 3년에 걸쳐 300억 원을 확보한 의혹을 받았다.

이를 위해 5공특위는 1988년 10월 13일 4당 간사회의를 열어 정주영, 안현태, 장세동 등 18명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합의했으며, 첫 청문회를 시작으로 한 명씩 증인을 불러들였다.

10여 차례 진행된 5공특위 청문회를 둘러싼 반응은 야당과 정부가 극명하게 갈렸다.

청문회는 13대 총선 이후 다소 침체해 있던 민주당이 자신감을 회복하는 장(場)이었다. 사상 처음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은 단연 돋보였다. 11월 8,9일 이틀 동안 한국갤럽이 실시한 ‘정당별 및 의원별 인기조사’에서 통일민주당은 4당 가운데 76%의 지지를 차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청문회에 투입된 의원들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고, 통일민주당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올라갔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62-163페이지

여소야대 하에서의 정국은 ‘5공 청산’이란 명분을 내세워 지나간 정권을 두들겨 댔다. 야3당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 불을 붙이고 언론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불만을 갖고 있던 국민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어느 시대건 잘한 것과 못한 것, 즉 명암이 함께 있기 마련인데 명(明)을 내세우기보단 잘못된 암(暗)만 들춰냈다. 욕하고 두들기고 단죄하는 것이 그렇게 통쾌할 수 없다는 식의 분위기였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슬픈 특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57페이지

1988.11.09.

1988년 11월 9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일해재단 청문회의 마지막 증인으로 참석했다.ⓒmbc 동영상 화면 캡쳐
1988년 11월 9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일해재단 청문회의 마지막 증인으로 참석했다.ⓒmbc 동영상 화면 캡쳐

“돈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습니다.”
“나는 시류에 따라 삽니다.”

청문회장이 웅성거렸다. 일해재단 청문회의 마지막 증인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너무 쉽게 국회의원들이 바라는 대답을 줘버렸다. 의원들의 밤새 준비한 질문지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

하지만 뭔가 찝찝했다. 의원들은 전두환 정권이 일해재단의 성금을 강제로 거둬들인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이를 정주영의 입을 통해서 확인했으니 목적을 이뤘다. 하지만 무언가 불편했다. 그때 노무현은 그 가려움을 긁어준다. 일해재단의 ‘강제모금’에서 ‘정경유착’으로 초점을 바꾼 것이다.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간다는, 그러한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
“혹시 그 순응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가는 것도 포함합니까?”
“자기 능력대로 돈을 낸다면 그건 부정이 아닙니다.”
“일해재단이 막후 권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론되기 이전에는 묵묵히 추종하다가, 그 권력이 퇴조하니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까?”

당에서는 정주영 회장이 고령인데다 업적이 많은 기업인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왔지만, 노무현은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에는 권력과 멀리하는 것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겠습니까?”

“본 의원이 증인과 맞대서 대등한 관계에서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본 의원은 증인의 100분의 1도 못 따라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애를 느끼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의 피눈물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가슴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정주영은 결국, 온 국민이 보는 가운데 사과했다.
“우리는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모금의 강제성만 따지면 재벌 회장들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뇌물을 바치고 사업의 특혜를 받는 정경유착이라면 전두환 정권과 재벌 회장들은 가해자 공범이 되고 국민이 피해자가 된다. (중략) 나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증인 심문을 했다. 정주영 회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봐 주지 않았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04-105페이지

(다음 편에 계속)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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