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인터뷰] 박석무 “통추의 시대정신, 앞으로도 영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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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인터뷰] 박석무 “통추의 시대정신, 앞으로도 영원할 것”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5.29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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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전 국회의원 (現다산연구소 이사장)
“DJ에게 ‘분열필패론’ 설득하다 정계 입문… 의원실, 민원인으로 바글바글”
“DJ 민주당 분열로 통추 생겨… 낙선 예감했지만 소신 지키기 위해 잔류”
“DJ 당선으로 통추 임무는 끝… 통추의 시대정신, 앞으로도 영원할 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시사오늘〉은 지난 27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다산연구소에서 ‘통추’의 풍운(風雲)과 함께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시사오늘〉은 지난 27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다산연구소에서 ‘통추’의 풍운(風雲)과 함께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을 만났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우리나라에서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뿌리 깊은 일이다. 애초 학문을 업(業)으로 삼는 지배 계층의 선비만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고, 관직이야말로 선비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었던 나라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 정치는 ‘선비 문화’에서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전라남도 무안에서 근대 무안 전통 학문의 본산(本山)이라 불리는 유서 깊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 민재(敏齋) 박임상은 〈한국인물대사전〉에도 등재된 당대 최고의 학자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어르신들이 문지방을 넘나들던 가풍 속에서, 박 이사장은 자연스럽게 조부의 서당을 졸업했고 손에서 고서(古書)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선비 집안에서 난 선비. 그에겐 부족한 설명이다. 박 이사장은 특별한 선비의 길을 걸었다. 인민 대중을 어리석다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려 드는, 우월감에 취한 선비는 아니었다.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면서 앞장서 혁명의 길을 걸었다. 독재 정권 반대 운동으로 감옥 생활만 네 차례 겪었다. 구속된 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한국에 엠네스티 광주지부를 만들었고, 시민들에게 선택 받아 한국 정치 과도기 속에서 2번 연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19년 5월 23일은 그의 정치 동료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7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다산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동지들과는 자주 만나시나요?” 물으니, “엊그제도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직)퇴임 기념으로 다 같이 모여 식사 한 번 했다”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범상치 않은 대답을 한다.

“다 오는데 노무현만 못 오지. 뜻이 맞는 사람들이라 자주 만나는데, 그때마다 김정길 의원이고 누구고 바빠도 다 오는데. 못 오는 사람은 죽은 노무현 한 사람 뿐이지. 아, 제정구(14·15대 국회의원)도 죽어서 못 오는구만.”

현 민주당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닿아있는 ‘통추’, 그 풍운(風雲)과 함께한 실천적 지식인. 〈시사오늘〉은 ‘대중들을 위한 선비’로 살아온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았다. 

“DJ에게 ‘분열필패론’ 설득하다 정계 입문… 의원실, 민원인으로 바글바글”

-정치권, 재야를 가리지 않고 평생 민주화를 위해 힘쓰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생 때부터지. 내가 전남대 학생운동권 1세대야. 대학 3학년 때 ‘박정희 하야’ 시위로 시작했어.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하야를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이 나야. 성명서도 내가 썼거든. 다음해 ‘월남 파병 반대’ 데모도 주도했고. 대학 때만 2번 구속됐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입문하신 건가요.

“어휴, 말도 마. 사실 나는 정치하고 싶지 않았어.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는데, 나라에서 시국 사범이다, 신원이 불량하다 해가지고 대학이 받아주질 않잖아. 그 당시에는 나를 다 빨갱이로 봤으니까. 일단 내 신분을 세탁해야 뭐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국회의원이 되면, 국민이 선출 해주는 거니까 신원이 보장되잖아. 국회의원 8년 하고 나니까 신분에 대한 문제는 없잖아. 그래서 교수가 되는 꿈도 이뤘고, 지금 강의도 하고 강연도 하러 다닐 수 있는 거지.”

-그럼 어떻게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손을 잡고 정계에 입문하게 됐나요.

“87년에, DJ가 통일민주당에서 YS(김영삼 전 대통령)로부터 분당(分黨)해서 나오려고 했잖아. 대선 앞두고. 나는 분열하면 필패라고 생각했고, 달갑게 여기지를 않았어. 그래서 나를 포함해서 재야에 있던 광주 운동권 세력 몇몇이 의견을 모아서 DJ를 찾아갔어. 가서 이렇게 설득했지. 

‘지금 DJ는 미국에 계시다 오셔서 국내 기반이 약하지 않으냐. YS가 국내에서 투쟁을 많이 해서 국내 기반이 강하다. 대통령 임기 5년밖에 안되니 YS가 먼저 5년 하고, 그 다음에 선생님께서 하시면 좋지 않냐.’ 

그게 광주 청년들, 광주 운동권의 생각이라고 전달했어. 그랬더니 DJ가 ‘박 동지는 정치를 안 해봤잖아. 정치란 그런 게 아니다’하고 일축해버리는 거야. 우리 얘기를 수용하지 않더라고. 몇 사람이 연달아서 얘기를 해도 들어주시질 않지. 결국 평화민주당을 만들더라고. 그리고 산하에 정치연구회를 만들어서 재야계 인사 영입을 추진했어. 나는 처음엔 안 가려고 했거든. 그런데 후배 놈들이 와서 막 설득을 해. ‘학생운동 1세대 형님이 들어가야 앞으로 우리들도 길이 열릴 수 있지 않겠느냐’ 해가지고 반은 억지로 하는 수 없이 들어 간 거지. 내 기억은 그래.”

-정계 입문하자마자 13대 총선에서 바로 당선되셨습니다. 국회에선 무슨 일을 중점적으로 하셨나요.

“내가 고등학교 교사 출신이고 하니까, ‘교육민주화’에 가장 많은 힘을 쏟았어. 학교비리 근절, 교육비리 근절하려고 노력했지. 그땐 교육 비리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 특히 사립학교 비리가 엄청났지. 16년 동안 국정감사도 일체 없었고, 정부 통제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13대 국회 들어와서 처음 사립학교 관련 국정감사가 생겼지. 온갖 비리를 내가 다 국감에서 폭로했잖아. 

그리고 난 절대적으로 전교조를 지지하는 사람이야. 전교조 활동이 보장돼야만 교육 비리가 근절되고 교육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국회가 열리는 날에 전교조 문제를 거론 안 한 적이 없었어. 아주 교육청에서 나한테 질려버렸다고. ‘거 좀, 전교조 얘기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도 했었지. 신문에 박석무 이름이 없는 날이 없었어. 99년 DJ정부에서 전교조가 잠시 합법화됐잖아. 그때 법을 많이 고쳤는데, 대부분 교육민주화 내지는 교육비리를 막을 수 있는 법률을 많이 신경 썼지(전교조는 2013년 박근혜 정부로부터 ‘법외 노동조합 통보처분’을 받고 현재는 법외 노동조합이 됐다).”

-교육 비리 사건들은 어떻게 알아내서 폭로하셨습니까. 전부 제보 받으신 건가요. 

“아이고, 맨날 찾아오지. 박석무 의원실은 아주 문전성시야. 해직 교사, 해직 교수, 해직 언론인들까지 와서 자기 좀 거론해 달라고 난리야. 내가 또 총대 메고 국회에 가서 전부 따졌지. 이 사람들 당장 복직시키라고. 우리 의원실 직원들은 토요일도 없었어. 전부 다 출근이야. 전국에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오니까 어쩔 수가 없었지. 그 당시에 교육민주화 관련해서 책도 썼어.”

그는 갑자기 인터뷰를 중단하더니 서재에서 ‘우리 교육을 살리자’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와 기자에게 건넸다. “이거 줄 테니까 읽어 봐요”하더니 다시 교육민주화와 관련해 열변을 토한다. 80, 90년대의 혈기 넘치던 청년 정치인 박석무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지면이 짧아 모든 얘기를 싣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DJ 고집으로 통추 생겨… 낙선 예감했지만 소신 지키기 위해 잔류”

14대 대선이 가까워지던 시점이었다. 1990년 YS의 3당 합당으로 원내에는 DJ의 평화민주당과 3당합당에 따라가지 않은 민주당이 야당으로 남았다. DJ는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았던 노무현·김정길·이기택 등 통일민주당  출신 및 무소속 정치인을 모아 다시 민주당을 꾸렸다. 

당권 이기택, 대권 김대중이란 공동체제로 운영된 민주당. 92년 대선에서 패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외유를 떠나면서 이기택 체제의 민주당이 들어섰다. 하지만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 복귀한 DJ는 새정치국민회의 창당했고, 민주당은 분열됐다. 그러나 호남계, 즉 ‘DJ계’로 불렸던 박석무 의원은 DJ의 국민회의를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남았다. 그리고 노무현을 비롯한 김원기·김정길·이철·이미경·김원웅·제정구·김홍신·김부겸·홍사덕 등과 함께 민주당 내에서 ‘통추’를 창립한다.

박 이사장은 호남 출신 DJ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박 이사장은 호남 출신 DJ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정도(正道)를 걷겠다"며 DJ가 만든 국민회의에 입당하지 않았다. 그는 민주당에 잔류해 노무현, 김부겸, 김원기, 김원웅, 박계동 등과 함께 통추를 설립들고 통추만의 길을 모색했다.ⓒ시사오늘 권희정

-통추를 만든 배경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DJ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영국에 있었다가, 95년 지방선거에서 YS정권이 수세에 몰리니까 돌아왔어. 다음 대통령 선거는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이 떴지. 그러니까 DJ가 와서 새로운 당을 만들겠다는 거야. 

그 당시 민주당이 영·호남 통합을 위해 정말 오랫동안 노력했거든. 영남 쪽 사람들이 고생 많이 했지.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제정구 같은 영남 사람들이 정권 창출에 큰 힘이 되겠다고 힘을 모으고 있었어. 근데 DJ가 이기택하고 안 맞으니까, 사사건건 화합이 안 되니까 그걸 빌미로 ‘이기택 씨 따라갈 사람은 따라가고, 내 따라갈 사람은 따라오라’는 거야. 그렇게 당이, 영·호남이 갈라져서 민주당 안에서 또 통추가 만들어졌지.”

-DJ를 설득하신 적은 없습니까.

“왜 안 했겠어. ‘우리 당(민주당)에 들어오셔서 당 대표도 하십시오, 대통령 후보도 되면 우리가 대권 후보로 밀겠습니다’라고 그렇게 여러 사람이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 양반이 자꾸 자기 고집을 피우고 당을 쪼개겠다고 하니까 통추가 생긴 거지.”

-왜 DJ의 국민회의를 따라가지 않으셨나요. 

“김원기 의원 같은 경우는 당시에도 3선의 거물급 정치인이었고, DJ를 굳이 안 따라가도 당선 될 수 있는 가망이 있었어. 그런데 나는 재선이고, 거기다 호남 사람이고, 학교도 호남에서 다녔고. DJ를 안 따라가면 다시 국회에 입성할 수 없다는 건 뭐 뻔했지. 

그래도 한 번 더 하는 건 문제가 아니야. 정치인으로서 가야할 방향이 어딘지를 알고 가는 것, 그게 정도(正道)야. 난 정도를 걷겠다고 했지. 왜 멀쩡한 당을 깨. 난 이해를 못 해. 자기와 의견을 같이 안 해주는 사람 몇 있다고 해도 말이지. 그 사람을 포용하는 게 정치지. 특히 야당은 단결하고 통합해도 어려운 판에 분열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난 차라리 국회의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겠다고 했지. 그 당시 다산에 대해서 논문도 많이 썼고, 책도 여러 권 나와 있었고. 그래서 원래 꿈이던 대학 교수를 하거나, 계속 공부를 해서 집필을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어.” 

-DJ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난리가 났지. DJ도 몇 차례 사람을 보내가지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의원은 와야 한다’고 온갖 설득을 다했어. ‘공천이고 아무 문제없으니까, 나만 따라오면 다시 국회의원 된다’ 식으로 얘기하고 그랬지. 그래도 나는 못 가겠다 했지. 끝내 내가 안 가니까 김원기 의장이 힘을 받은 거야. 원군이 하나 생긴 거지. 그래서 김원기 의장하고 노무현, 유인태, 홍사덕, 원혜영 등등이 통추로 모이게 된 거지.”

-결국 민주당에 남아 15대 총선을 치렀지만 낙선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전남 무안이 아니라 서울 광진구에 출마하셨나요.

“호남으로 갈 수가 없었던 거야. 호남에서는 ‘DJ 아니면 배신자’로 몰고 그럴 때에요. 당시엔 국민회의 아니고서야 호남에선 안 됐어. 그래서 수도권에서 새로운 지역을 맡아서 하기로 했지. 물론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때 멤버들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잖아. 다 같이 ‘지역주의 타파’ 외치며 광진구 을에 출마를 했어. 근데 뭐… 거기 호남 사람들이 유독 많이 살아서. 배신자라고 외치던 사람도 있었고. 잘 안 됐지.”

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결국 참패하고 만다. 서울에선 이부영만이 당선됐고, 부산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비롯한 전원이 낙선했다. 확보한 의석은 겨우 15석. 원내교섭단체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결과가 좋지 않으니 당 분위기도 어두워졌다. 이기택계와 통추계의 분열은 심화됐다. 그해 11월 만들어진 통추는 1년간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다, 대선 후보를 놓고 내부 논란을 벌인 끝에 결국 해체됐다. 제정구·김부겸·김홍신·이수인·이미경·이철·김원웅 등은 신정치추진연합을 결성하고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박석무 이사장을 비롯한 노무현·김원기·김정길·유인태·원혜영·홍기훈·황의성 전 의원 등은 국민회의 행(行)을 택했다.

"학생운동 1세대 형님이 들어가야 앞으로 우리들에게도 길이 열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후배들의 호소로 어쩔 수 없이 정치에 입문했다는 박석무 이사장.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DJ 당선으로 통추 임무는 끝… 통추의 시대정신, 앞으로도 영원할 것”

통추의 해체가 정계 은퇴의 계기가 됐다는 박 이사장. 그는 “학문의 길에 더 다가설 수 있어 후회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통추 인사들이 다 당선됐더라면 우리나라 정치는 바뀌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통추는 결국 해체됐습니다. 당시 상황이 어땠나요.

“97년이 되니까, 통추를 막 만들 때하고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 잘만 하면 DJ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보였어. 나는 DJ의 당선이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봤어. 미워서 떨어져 나왔지만, 정권교체가 더 중요했지. 여야가 바뀌는, 이른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DJ를 앞세울 수밖에 없다는 게 그 당시 정치적 판단이었어. 그렇게 되니까 어휴…. ‘ 그 사람(DJ) 싫다고 나왔는데, 우리는 절대 못 돌아가겠다’는 파가 있었고, ‘그래도 우리라도 힘을 보태서 정권교체 해야 한다’ 파가 있었지. 아무튼 97년 선거에서 DJ가 당선이 된 거잖아. 그러면서 통추의 임무는 끝난 거라고 볼 수 있지.”

-통추 내부에서 독자 후보를 내려는 움직임도 있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세(勢)가 미약했어. 정당도 없고, 의원도 하나도 없고. 그렇잖아. 사실상 원외 정당인데. 통추에서도 ‘독자 후보를 내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컸어. 몇 사람들이 얘기한다고 그게 되나?” 

-미완(未完)된 통추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신가요.

“통추 인사들이 다 당선됐더라면 우리나라 정치는 바뀌었을 거야. 96년 선거에서 통추가 다 떨어졌잖아. 심지어 김원기 의장마저 자기 고향에서 떨어졌잖아. 이 사람들이 그나마 괜찮은 정치인 집단인데, 그들이 다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면…, 한국 정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어. 그걸 국민이 수용 안 해준 거지. 우리로써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거지. 

지금도 유권자들은 세만 따라가. 옳고 그른 정치보단 어디가 더 세느냐, 어디가 더 힘이 있느냐만 따지고 ‘힘 있는 쪽 밀어주자’고 하잖아. 그래서 우리 정치가 여론조사 결과 하나로 왔다 갔다 하잖아. 여론이 높다고 하면 뽑아주고, 여론이 낮다하면 안 찍어주고. 당시 통추 멤버들이 15대 총선에서 한 20명 가까이 출마했으니까, (됐다면) 교섭단체도 되고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었겠지. 그래도 통추가 실패한 것은 아니야. 처음으로 한국에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났잖아. 우리 통추가 합쳐진 것이 큰 힘이 된 거고.”

-통추의 절반은 현재 보수당의 전신(前身)인 한나라당을 창당하게 됐는데, 정체성 측면에서 따진다면 상당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요. 절반은 진보, 절반은 보수의 뿌리가 됐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한국 정치사에서 ‘정치 철학’같은 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그런 것들인데…. 원래는 야당 출신이었고, 여당과의 대척점에 있던 YS가 ‘3당 합당’을 해서 여당으로 가버렸잖아. 거기서부터 한국 정치 국면이 흐려진 거지. 

이게 아주 설명하기 어려운 거야. 봐, 통추에서 여당(신한국당)과 합쳐서 한나라당을 만들게 된 사람들이 ‘나는 YS에게 간다’고 해버리면, 그걸 단순한 ‘변절’로 비난할 수 있겠어? YS도 옛날엔 우리와 같은 편에서 싸운 민주화 투사였잖아. 그래서 통추 일부가 저쪽(한나라당)으로 갈 땐 변절이라는 개념이 약화된다고. 오늘날 야당(진보정당)의 뿌리엔 YS도 들어가잖아.”

-통추의 시대정신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면 무엇입니까.

“통추는 말 그대로 ‘국민 통합을 위한 정치 모임’이지. 영호남 통합, 지역 통합, 세대의 통합. 통합된 정치를 해야만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어. ‘국민 통합의 가교가 되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지. 어찌됐건 DJ 당선 이후부터 국민 분열이 많이 완화됐다고 봐. 이번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민주당이 영남에서 많은 표를 얻었잖아. 우리의 뜻이 점차 실현이 돼가고 있다고 보고 있어. 통추 정신은 그때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해.”

박 이사장은 다시 재야 학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해 보이는 그에게 “정계 은퇴가 아쉽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바로 손사래를 친다. 

“정치판 쫓아다니는 거 시간 낭비고, 국회의원 한두 번 더하려는 노력을 학문에 바치니 성과도 좋아. 오히려 정치 그만두니까, 사람들은 내가 더 좋아졌다던데.”

마지막으로 정치 선배로서 후배 정치인들에게 한마디 해 줄 말이 있느냐고 부탁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세를 쫓는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답을 들려줬다. 통추의 정신이 곧 그의 소신이었던 셈이다.

“난 지금도 정도(正道)로 정치를 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 최소한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려고, 혹은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고 부당한 일을 하진 않았다는 소리야. 1996년이면 내가 쉰네 살이었어. 어떻게 보면 한창 정치를 시작할 때지. 남들은 시작할 때 난 그만둘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던 거야. 앞으로도 우리 정치인들이 그렇게 정치를 했으면 좋겠어. 한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고 졸졸 쫓아다니고, 세만 따라다니고. 그저 일신의 안위에만 급급해서…. 이젠 세를 쫓는 정치를 해선 안 돼.”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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