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청문회②]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이다”
[5공청문회②] “발포 책임자는 전두환이다”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5.30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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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두번째 이야기, 1988년 국회 청문회장서
전두환 해명사과 놓고 여야 4당 입장차…연말 전씨 증언서 아수라장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대통령 회고사’는 〈시사오늘〉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다. 우리의 두 번째 재생은 ‘5공 청문회’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다.

우리의 두 번째 재생은 ‘5공 청문회’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다.ⓒ201111 국회보
우리의 두 번째 재생은 ‘5공 청문회’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다.ⓒ201111 국회보

1988.11.18.

“발포 책임자는 당시 국민의 생사여탈(生死與奪)권을 쥐고 있던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전 대통령입니다.”

광주특위의 첫 번째 증인은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이었다. 야당은 5공특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광주특위에 온 힘을 다했다.

나는 평민당 총재단의 동의를 얻어 광주특위 위원장을 문동환 수석부총재에게 맡겼다. 그러면서 첫 번째 증인으로 나를 채택하면 좋겠다고 귀띔했다. 광주 항쟁 배후 조종자로 사형 선고를 받은 만큼 국내외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고, 첫머리에 진실을 밝혀 특위 활동이 바른 궤도로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44페이지

5공 청문회에서 대성공을 거둔 나는 광주특위 청문회를 맞아 특위 위원들이 합숙을 해 가며 준비를 하도록 독려했다. (중략) 여기서 민주당 의원들은 빼어난 활약상을 보였고, 지지부진하던 5공 청산 작업을 가속화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163페이지

1988.11.23.

하지만 잘나가던 5공 청문회가 멈춰서고 만다. 바로 전두환의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머리 숙여 용서를 빕니다.”

전두환은 자신을 둘러싼 일해재단 비리에 대해 사죄하고, 연희동 자택 및 금융자산 23억 원, 정치자금 잉여금 1백39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천명했다. 회견이 끝난 후 전두환은 연희동 자택을 떠나 강원도 백담사 부근에 마련된 은둔처로 향했다.

국회 5공 청문회를 시작하면서 ‘낙향’, ‘은둔’을 압박해오던 11월 11일 언론은 ‘정부여당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장기외유를 권유할 방침’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합천의 나의 생가가 방화에 의한 화재로 지붕을 비롯한 가옥 일부가 불에 탔다. 낙향, 은둔이 기정사실화되어가는 상황에서 나를 고향으로도 갈 수 없게 만들자는 의도였을 것이 분명했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162페이지

언론에서는 ‘전 전 대통령’대신 ‘전 씨’로 호칭했다. 전 씨와 그 일가들의 부정 축재 실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정 축재 혐의로 교도소에 가는 친인척들이 줄을 이었다. 전 씨는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46페이지

전두환의 해명사과에 4당의 반응이 어땠을까. 11월 24일자 당시 한겨례 신문을 살펴봤다. 

민주정의당: 일면 침통한 분위기였으나 전씨의 대국민 사과내용에 만족한 듯 안도감이 감돌았다.
평화민주당: 전씨의 개인적 사과의사 표시로는 의미가 있다.
통일민주당: 사과와 진상규명은 엄격히 분리돼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사과 부분에 대한 수용여부는 찬반양론이 있었다.
신민주공화당: 늦은 감이 있으나 전씨의 결심은 잘한 일이다.

1989.10.07.

전두환의 기자회견 후 남은 1988년이 그냥 지나갔다. 하지만 1989년 들어서도 민정당의 계속된 불참으로 청문회가 중단됐다. 이대로 5공 청문회의 막이 내리나 싶었다. 

그러다 4당 영수 회담에서 마지막 절차로 광주특위와 5공특위 합동회의를 열어 전두환을 증인으로 부르기로 여야 지도부가 합의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질문을 서면으로 내고 전두환이 이에 일괄 답변하는데, 추가 질의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소장 의원들은 지도부의 그런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권당의 반대 때문이라면 청문회가 공전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뒷날에라도 바른 매듭을 지을 수 있지 않은가. (중략) 한 마디로 전두환 씨를 국회로 불러내 일방적인 해명 기회를 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건 법적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국회법에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문권을 봉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건 청문회가 아니라 전두환 씨의 대국민 연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33-34페이지

이러한 합의에 평민당과 민주당 의원들은 반발했다. 그래서 청문회 당일 질문권을 계속 주장하기로 하고 작전까지 미리 짜놓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전두환은 미뤄오던 증언이 확실시 되자 이에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고, 노태우는 어쩔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우리나라의 당면 과제는 5공 청산밖에 없다는 듯이 정치권과 언론이 온통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민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가장 시급한 문제로 정치 안정과 사회 안정이 1위와 2위로 꼽혔고, 5공 청산 문제는 3위에 그쳤다. 노태우 정권이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던 민주 개혁 문제는 9위였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158-159페이지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안 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 457-460페이지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5공특위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에 참석해 증언했다.ⓒ200911 국회보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5공특위 및 광주특위 연석회의에 참석해 증언했다.ⓒ200911 국회보

1989.12.31. 

“증인 나와서 답변하세요.”
“증언을 계속하겠습니다. 당시 5월 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 사령부의 작전 지침이…”

순식간에 청문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전두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자위권 발동이 뭐야! 발포 명령자 밝혀!”
평민당 정상용 의원이 소리치며 앞으로 뛰어 나왔다.

“발포 쟁점부터 밝혀! 살인자 전두환!”
동시에 평민당 이철용 의원이 증언대로 돌진해 전두환의 팔을 잡고 소리쳤다.

모든 건 그가 증언을 시작한지 불과 30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백담사에서 내려온 전 전 대통령은 1989년 12월 30일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섰다. 예상은 했지만 증언이 아닌 거짓을 무한정 쏟아 냈다.
-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549페이지

5·18 피해자와 가해자 위치였던 평민당과 민정당 의원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청문회장이었다. 야당이었지만 직접적 관계가 적었던 민주당 의원들은 침착했다.

노무현은 당시 민주당 내부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통일민주당 지도부의 반응이었다. ‘광주항쟁과 관련된 사안이니 틀림없이 평민당에서 누가 나와 판을 깰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않아도 과격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평민당이 온통 바가지를 뒤집어 쓸 것이다. 그러니 우리 당은 절대 항의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이것이 지도부의 지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평민당의 지도부도 마찬가지였었다. 나는 울화를 삼키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34-35페이지

“전두환이 아직도 너희들 상전이야!”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진 회의장을 보며, 문동환 광주특위 위원장은 회의 속개 4분 만에 정회를 선포했다. 전두환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변호사와 함께 빠져나갔다. 퇴장 이후 노무현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명패를 증언대 쪽으로 던졌으며, 그 뒤로 여전히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이 이어졌다.

다음날 언론은 ‘국회의원 자질’을 논하면서 내가 무식하고 경우도 모르는 깡패인 것처럼 보도했다. (중략) 어디로 던졌든 상관없이, 그것은 분노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 이때 만들어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오랜 세월 정치인 노무현을 옥죄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09페이지

두 차례의 증인호출에도 불구,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보장과 소란행위의 사과 없이 회의장에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여야4당은 단상으로 달려나간 평민당 의원들을 퇴장시키고 명패를 던진 노무현이 사과하는 선에서 회의를 속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과의 방식이 문제됐다. 민정당은 사과의사를 문서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노무현은 신상발언 형식으로 하겠다고 맞섰다. 결국 민정당 없이 야3당만의 참석으로 속개됐다.

“본인이 명패를 본 연단을 향해 던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는 이미 위원장이 정회를 선포한 후였고, 증인이 퇴장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회의장이긴 했지만 회의 중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자랑스럽지는 않습니다.”

끝내 전두환은 여야 합의가 없는 한 출석할 수 없다며 백담사를 향했다. 1989년에서 1990년으로 넘어가는 밤, 역사적인 5공 청문회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용두사미(龍頭蛇尾)였다. 

1989년 12월 31일 나의 국회 증언은 ‘5공 청산 정국’의 종결을 의미했다. 여야가 영수회담을 통해 ‘대합의’를 이룬 내용이었다. 내가 다시 백담사로 돌아왔지만 노 대통령 측으로서는 나를 언제까지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나의 거처를 옮기는 문제가 6공 청와대의 당면 과제가 된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2권, 164페이지

결국 자정을 넘기면서 전두환의 답변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청문회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전두환에 대해 “스님도 아니면서 절에 왜 가 있나. 자기 집에 보내는 것이 좋다”며 그 죄는 밉지만 관용을 베풀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146-147페이지

청산하지 못한 미래는 언젠가 되돌아온다

이렇듯 6월 항쟁으로 얻어낸 민주화가 가져다준 자유는, 그저 전두환을 증인석에 세우기‘만’ 했다. 언론은 여전히 소장 의원들에게 고령 기업인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요구했으며, 평민당과 민주당마저 정치싸움에 바빠 지켜내야 했던 가치를 끝내 놓쳐 버렸다.

청문회가 끝난 1990년 1월 1일, 김종필 당시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신년 단배식에서 “증언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나, 이제 5공 문제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고 미완의 장으로 남겨놓자”며 “정치권은 새로운 경제 도약과 정치 안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미래는 다시 되돌아온다. 이것이 ‘자위권 발동’이라 했던 1989년의 마지막 날 밤 이후 30년이 지난 2019년에도 여전히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과 망언이 난무하는 이유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30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30년 전 이야기가 문재인 정권에서도 반복되는 것은 과거에 철저하게 처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뒤 “당시 대립하던 한 쪽에 해당하는, 현재 집권 중인 386세대가 재평가 시 자칫 기울어진 잣대를 적용해 국민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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