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화로’ 통추1년史] “지역주의에 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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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화로’ 통추1년史] “지역주의에 전사하다”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5.31 17: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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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부채 통추, 긴박했던 막전막후
"DJ는 우리에게 너무 혹독했어"
"불명예 재선 말고 명예로운 초선을"
"DJ에게 떠났고, 상처 받은 사람만 남았지"
"통추, 지는 줄 알면서 옳기 때문에 싸웠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다음은 역사적 인물의 회고록과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참여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사오늘〉이 재구성한 글입니다.

1996년 11월 9일의 시작부터 1997년 11월 24일의 이별까지. 통추의 공식적 활동일은 고작 1년이다. 그러나 통추 참여자들은 입을 모아 그 1년이 우리 나라 정치 역사를 바꿨다고 말한다. ⓒ시사오늘 김유종
1996년 11월 9일의 시작부터 1997년 11월 24일의 이별까지. 통추의 공식적 활동일은 고작 1년이다. 그러나 통추 참여자들은 입을 모아 그 1년이 우리 나라 정치 역사를 바꿨다고 말한다. ⓒ시사오늘 김유종

第一章. 통추의 태동(胎動)

1995.04~1995.07

“DJ는 우리에게 너무 혹독했어”

T.S. 엘리엇이 말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힘든 겨울을 버텨냈지만 도무지 나아진 것 없이 황량한 벌판만 자랑하는 4월. 다만 황무지 아래에도 봄의 생명력이 꿈틀거리며 고난뿐일 삶을 시작하려 하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잔인하게 다가오는 달.

1995년 4월. 6·27 지방선거를 앞둔 한국 정치사에도 또 하나의 ‘분열 정치’를 가져온 잔인한 달이 시작되고 있었다. 동시에 못다 핀 ‘통합 정치’의 상징, 통추도 미미하지만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

92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민주당 일선에서 물러난 김대중은 당권을 쥐고 있던 이기택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94년 정기국회에서는 이기택이 등원거부 운동을 벌이자, 김대중은 이를 마땅치 않아하며 사람을 보내 원내 복귀를 주장했다.

“그건 적절한 판단이 아니오. 원내로 복귀해 투쟁하시는 게 옳다 전해주시오.”

“허허, 그저 당원 한 사람의 얘기일 뿐이지.”

둘의 기 싸움은 4월의 어느 날, 6월 지방선거 공천을 두고 심화됐다. 이기택은 경기도지사 후보로 장경우를 내세웠지만, 김대중은 이종찬 고문을 점찍어두고 있었다.

김대중의 구상은 이러했다. ‘서울 조순-경기 이종찬’ 구도로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제패하고,  “어느 한 지역이 권력을 독점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역 등권론’을 내세워 호남 및 비(非)영남 지역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는 것이다.

김대중은 4월 중순 이기택과 장경우를 각각 집으로 초대해 설득하기까지 했지만, 이기택은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경기지사로 장경우를 밀었다. 결국 5월 경지지사 후보를 결정하는 경선대회에서 장경우 측의 ‘돈 봉투 살포’ 여부를 놓고 지지자들 간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둘의 감정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한편, 노무현·김정길·이철 등 양김(YS·DJ)의 분열 정치에 반기를 내걸었던 꼬마민주당 출신 의원들 사이에선 슬금슬금 불편한 감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특히 부산시장에 출사표를 낸 노무현은 낙선 후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다음은 당시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에 관한 노무현의 회고.

“김대중 이사장이 지역등권론을 내세워 전라북도에서부터 지원 유세를 시작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호남이 역사적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고 소외당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었지만, 부산 시민들은 이것을 지역주의로 이해했다. 이미 3당합당으로 영호남에는 맹목적인 지역대결 정치구도가 이미 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부산에서는 이 논리로 유권자를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민주당은 다시 ‘김대중당’으로, 노무현은 ‘김대중당 후보’로 인식됐다. 결국 선거에서 졌다. 나는 지역등권론을 반대했다. 선거에서 지역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일단 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노무현과 장경우는 낙선했지만, 어쨌든 전체 결과는 야권의 승리였다.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은 김종필의 ‘핫바지론(경상도 사람들은 충청도를 핫바지-멍청이-취급한다)’과 맞물려 지역감정을 부추겼고, 민자당은 영남에서, 민주당은 호남에서, 자민련은 충청에서 압승했다.

AP통신은 당시 선거를 이렇게 분석했다.

“이번 선거의 승자는 지역주의고, 패자는 김영삼 정권이다.”

김대중은 이때를 정계 복귀의 적기(適期)로 생각했다. ‘김대중당’으로 불리는 민주당의 승리는 곧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국민의 호출이며, 자신은 이미 국민의 추인을 받았다고 본 것이다.

결국 7월 18일, 김대중은 ‘국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한 장의 성명서에는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김대중 신당(新黨)’으로 이룩하겠다는 다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DJ 앞으로 마련된 모금액으로 세운 마포 당사(黨舍)까지 이기택 총재에게 넘기고 서둘러 떠난다.

다음은 당시 결별 상황에 대한 박석무의 증언.

“95년 지방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의외의 선전을 했다. 김영삼(YS)정권이 지방선거에서 수세에 몰리니, DJ에게 힘이 실렸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다. 당시 DJ는 당을 주도하고 있는 이기택과 안 맞았다. 서로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화합이 전혀 안 됐다. 그걸 빌미로 당을 쪼개겠다고 했다. ‘이기택 씨 따라갈 사람 따라가고, 내 따라갈 사람 따라오라’ 하더라.

영·호남의 지역감정으로 민주당은 늘 집권도 못하고 약자의 입장에서 야당을 하고 있었다. 모처럼 겨우 통일된 민주당이 된 상황이었는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떼로 찾아가서 말렸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만나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통했다. ‘우리 당에 들어오셔서 당 대표도 하십시오. 대통령 후보도 하십시오. 우리가 대권 후보로 밀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DJ는 고집을 피웠고 당을 쪼갰다.”

다음은 DJ의 신당 창당과 관련한 김정길의 추측이다.

“그 때 DJ에게 찾아가 ‘총재님, 당을 깨는 것은 명분이 없습니다. 통합민주당에 와서 이기택과 경선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DJ는 이기택과 붙었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DJ는 (이기택 측의) 공작(工作)정치가 겁났던 듯하다. 자기가 안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김부겸의 회상.

“DJ는 당을 깰 때 우리(통추 멤버)를 너무 혹독하게 대했다. 우리가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 ‘정치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분열의 상처가 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DJ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그 상처 때문일 것이다.”

97년 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은 원외 정치인 시절 서울 종로 3가에 무료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상담소 개소식에 참석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김원기 상임대표(오른쪽)과 제정구 사무총장(왼쪽)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97년 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은 원외 정치인 시절 서울 종로 3가에 무료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상담소 개소식에 참석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김원기 상임대표(오른쪽)과 제정구 사무총장(왼쪽)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第二章. 통추, 막을 올리다

1995.09~1996.11

“불명예스러운 재선 말고,  명예스러운 초선을”

흐르는 시간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은 억지로 막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미 결심을 굳힌 정치인을 말릴 방도 역시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1995년 9월 5일. DJ의 새정치국민회의는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성대한 창당 대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총재가 됐다. 조세형, 이종찬, 정대철, 김영배, 김근태, 김상현, 권노갑, 한광옥, 신순범 등이 그를 따랐다. 참여한 현직 의원만 53명이었기에 순식간에 제1야당으로 등극했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각계 명망가 250명을 영입했다.

그러나 소수로 전락해버린 민주당에 끝까지 잔류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잔류파엔 DJ와 사이가 나빴던 이기택계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DJ와 이기택,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도적 입장’도 적지 않았다. 바로 약 1년 후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내걸고 설립되는 ‘통추’의 멤버들이었다.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김정길, 이철, 조세형, 김근태, 박석무, 김원웅 등은 통추의 전신(前身)인 ‘구당(救黨)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민주당에 남은 이유는 단 하나”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DJ가 국민회의를 만듦으로써 야권분열이 온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은 호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DJ의 국민회의행(行)을 거절한 박석무의 서술.

“나는 호남 사람이고, 학교도 호남에서 다녔고, 전남대 출신이다. DJ를 안 따라가면 다시 국회에 입성할 수 없다는 건 뻔했다. 그러나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도(正道)를 걷고 싶었다. 왜 멀쩡한 당을 깨나. 자기와 의견을 같이 안 해주는 사람이 몇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포용하는 게 정치다. 특히 야당은 단결하고 통합해도 어려운 판에 분열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입당을 거부하자 DJ는 측근인 정대철 등 몇 차례 사람을 보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 의원은 와야 한다’고 온갖 설득을 했다. ‘공천이고 아무 문제없으니까, 나만 따라오면 다시 국회의원 된다’ 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못 가겠다고 버텼다. 끝내 내가 가지 않으니 김원기 의장이 큰 힘을 받았다. 원군이 하나 생긴 것이다. 그래서 김원기 의장과 노무현, 유인태, 홍사덕, 원혜영 등이 통추로 모이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호남 출신인 김원기는 국민회의에 따라갔다면 당 부대표나 대표 대행을 맡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이에 대해 노무현은 다음과 같이 존경심을 표한다.

“김원기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같이 남자고 권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민주당 잔류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김정길, 노무현, 당신들 얼굴을 보니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를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나의 정치 고문이었다.”

통추는 이기택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이기택은 수시로 통추 멤버들을 ‘DJ 2중대’라고 비난했다. 통추 역시 이기택의 대표직 사임(辭任)을 주장하며 충돌했다.

다음은 김부겸이 전해준 이기택과 통추 갈등의 국면.

“DJ와 의원들이 국민회의로 다수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삼십 몇 석을 가진 원내교섭단체였다. 민주당만의 진로를 모색해야 됐다. 그때 우리(통추 멤버)는 이기택 총재에게 ‘분당의 책임을 지시오’라고 주장했다. DJ가 당을 갈라서 나갔는데, 어쨌든 당 대표가 된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막았어야 될 것이 아닌가. 이기택은 확실히 이를 방관한 면이 있었다. 우리 민주당이 국민들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려면, 대표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사퇴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이기택은 ‘난 그렇게 못하겠습니다’하며 거부했다. 그 이후부터 당내에서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통추의 시작이다.”

이기택과 통추 참여자들의 균열은 사실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음은 이철의 기술(記述).

“꼬마민주당 총재로 있을 때부터 이기택은 하는 일이 크게 없었다. 그때 당시 우리는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해서 국고보조금을 한 푼도 받질 못했다. 의원들이 없는 사정에 돈을 각출했다. 지지자로부터 후원도 받았다. 다만 이기택은 여유롭게 살면서도 10원짜리 한 푼 내지 않았다. 이미 그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오히려 출마자에게 돈을 받으며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특히 나는 ‘이기택의 민주당’을 선택해서 잔류한 것이 아니다. 당선만을 위한 정치를 하는 DJ를 그 당시엔 미워했기 때문에, 정의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민주당 잔류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어설프게라도 봉합돼야만 했다. 1996년 4월 11일, 야권이 쪼개진 불리한 상황 속에서 제15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DJ쪽으로 가십시다. 당선돼서 원내에 남아 있어야 집권도 할 수 있습니다.”

“야당 표가 둘로 갈라져서 여당만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면 어쩌지요. 그렇게 되면 정권교체와는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반(反)지역주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패기가 넘쳤던 초반과는 다르게, 총선이 가까워지자 민주당 내에서는 조금씩 불안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야당은 분열하면 반드시 진다는 ‘분열필패론’ 탓이었다.

그러자 당내에서 신임이 두터웠던 제정구가 나섰다. 다음은 당시 제정구의 발언에 대한 박계동과 김부겸의 증언.

“민주당 내 재야그룹들은 3김 청산과 개혁이 주된 기치였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DJ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 제정구가 나서 ‘장렬전사론’을 주장했다. 불명예스러운 재선이 아닌, 명예스러운 초선을 선택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 DJ와 결별하면 국회의원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도권은 DJ 따라가지 않으면 국회의원이 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데, 제정구가 ‘약삭빠르게 DJ를 따라가는 것은 명분을 저버리는 거 아니냐’고 했다. 초선으로 있다가 죽으나 재선, 삼선 하고 죽으나, 국회의원 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거다. 40세가 넘으면 현실을 찾아 실리를 찾기도 해야 하지만, 그 전에는 명분을 따라가자고 말했다. 그 말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 후로도 중대사를 결정할 때 그가 해준 말을 떠올리곤 한다.”

마음을 다잡은 민주당 내 통추 멤버들은 다양한 지역에 출마를 선언한다. 종로구 노무현, 도봉구을 유인태, 성북구갑 이철, 광진구을 박석무 등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지역주의를 깨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제3당도 아닌 제4당의 길은 막막했다. 민주당은 지역구 9석, 전국구 6석 총 15석 확보에 그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하고 만다. 수도권 지역에서는 이부영, 제정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했고, 부산에선 이기택을 포함한 전원이 낙선했다. 심지어 김원기는 본인의 텃밭이었던 호남에서까지 낙선하고 말았다.

민주당의 패인(敗因)에 대해 통추 멤버들은 각각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박계동과 원혜영은 지역주의를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결과적으로 신한국당(영남), 국민회의(호남), 자민련(충청)으로 양분된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힘들어 낙선됐다.”

“한국정치는 무엇보다도 지역기반,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힘이 크기 때문에 결국 민주당이 소신 있고, 참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멸하다시피 하고, 나도 380표차로 떨어졌다. 그때 내 지역구는 국민회의에서 동네 이장 출신이고 단위 농협조합장 하시던 최선영이라는 사람이 출마했다. 언론에서도 당선권이라고 예측했는데 결국 지역주의를 못 넘었다.”

김부겸은 소선거구제의 폐해(弊害)를 지적하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홍성우 인권변호사같은 재야 세력까지 합쳐서 민주당으로 총선을 치렀다. 우리는 전국적으로는 한 12% 정도 득표했다. 지금 같으면 정의당 이상이다. 그런데 소선거구제니까 의석은 달랑 5% 이하 점유율에 그쳤다. 전국 득표율을 따졌을 때, 어쨌든 통추는 자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철은 DJ 국민회의 측의 공작정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있었다. 우리 지역구에 ‘이철 등기부등본 종이를 봤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몇 백억이 넘는 자산을 소유했다’는 소문이 도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철이 도둑놈이라고 욕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이철은 내가 아니라 나와 이름도 같고 나이도 같은 동명이인의 이철이었다. 그의 등기부등본과 각종 서류를 복사해서 악선전을 하고 다닌 것이다. 나중에 재판에서도 밝혀졌지만, 그 사람은 국민회의 측 후보 진영 사람이었다.”

박석무는 ‘배신자 프레임’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15대 총선에서 나는 호남으로 갈 수가 없었다. 호남에서는 ‘DJ 아니면 배신자’로 몰았을 때다. 정도를 걷겠다는 내 마음과는 아무 관계없이,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호남에 가면 무조건 떨어지니까 당에서 새로운 수도권 지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 내가 청문회 스타로 인지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진구 을에 출마했지만, 그 지역에 호남 사람들이 유독 많이 살았기 때문에 잘 되지 않았다.”

물론 15대 총선은 DJ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한국당 139석, 국민회의 79석, 자민련 50석. 의회엔 야당이 난립했고, 여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친 의석을 얻었다. 심지어 민주당 당선자 15명 중 5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지경까지 맞았다. 야당 모두에게 상처뿐인 결과였다.

그로부터 2달이 지난 1996년 6월. 민주당의 당권을 결정하는 전당대회가 열렸다. 앞서 설명했듯 통추의 전신인 ‘구당 모임’은 홍성우를 후보로 내세웠지만, 결국 이기택에게 밀려 패했다. 총선에서 대부분 낙선하고 당권까지 놓쳐 초조해진 당내 ‘반(反)이기택 모임’ 및 ‘구당 모임’은 국민통합추진회의, 즉 통추를 드디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다.

1996년 11월 9일. 3천여 명의 발기인으로 창립된 통추엔 김원기 대표를 비롯해 박계동·장을병·제정구·이수인·이미경·김홍신 의원, 노무현·이철·김정길·김원웅·유인태·원혜영·박석무·홍기훈·황의성 전 의원, 김부겸·이강철·안평수·성유보 씨 등이 참여했다.

통추를 발족하면서 주요 멤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통추만의 정의(正義)를 무엇이라고 봤을까. 다음은 김부겸의 생각.

“통추는 우리가 당 내부에 만든 일종의 ‘정치 그룹’이다. ‘반(反)이기택 모임’으로 축약해선 안 된다. 정확히는 ‘분열 반대’를 기치로 내건 소신 정치 모임이었다.”

마찬가지로 비슷했던 박석무의 정의.

“통추는 그야말로 ‘국민통합을 위한 정치 모임’이다. 우리는 영원한 의미의 통합을 꿈꿨다. 이 통합은 영호남, 세대, 남북 통합 그 모두를 포함한다. 통합된 정치를 가야만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봤고, 최종 목표도 그랬다.”

한편, 통추의 중심인물이었던 노무현은 통추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 처음엔 회의감을 느꼈다고 전한다.

“처음엔 이 조직을 만드는 데 반대했다. 정치 조직을 만들면 97년 대선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통추에는 DJ와 절대로 함께 정치를 할 수 없는 사람과, 신한국당으로는 결코 갈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DJ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럼 결국 신한국당으로 가려는 사람과 절대 못 간다는 사람이 또 다시 갈라질 텐데, 그런 모습이 국민 보기에 과연 좋겠는가. 그렇지만 혼자 빠지면 독불장군 소리 들을 것 같아서 96년 11월부터 큰 기대는 없이 참여했다.”

노무현의 선견지명이었을까. 그 밑바닥에는 다시 누가 김영삼의 뒤를 이어 대권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벌어질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필연적인 균열(龜裂)도 이들을 향해 아가리를 쫙 벌리고 있었다.

왼쪽은 11월 10일, 국민회의 입당을 결정한 통추 인사들과 김대중 총재가 서울 여의도 63빌딩 만찬에서 환담하고 있다. 오른쪽은 11월 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행사장에서 열린 국민회의-자민련 선거대책회의.ⓒ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왼쪽은 11월 10일, 국민회의 입당을 결정한 통추 인사들과 김대중 총재가 서울 여의도 63빌딩 만찬에서 환담하고 있다. 오른쪽은 11월 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행사장에서 열린 국민회의-자민련 선거대책회의.ⓒ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第三章. 통추의 균열(龜裂)

1997.3~1997.11.24

“DJ에게 명분 찾은 사람은 떠났고,  상처 받은 사람들만 남았지”

1997년 3월 7일. 총선 후 한동안 방황하던 통추 내 낙선 멤버들은, 유인태가 우스갯소리로 꺼낸 “음식점이나 차리자”는 말에 착안해 고깃집을 연다. 이 고깃집이 바로 서울 역삼동에 위치했던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하로동선이란 ‘여름 화로,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처럼 낙선 의원들이 다시 쓰일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낙선한 이철·김원웅·유인태·노무현·박석무·홍기훈·원혜영·박계동 등 통추의 20여 명은 ‘공동출자·운영·분배’의 원칙 아래 모두 4억 원을 출자, 2층 단독 건물(건평 150평)을 빌렸다. 질 좋은 한우고기를 제공하는 것을 제1의 경영방침으로 삼고 ‘맛으로 승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음은 김부겸이 하로동선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며 들려준 얘기.

“서로가 서로에게 동지애가 있었다. 예를 들면, 하로동선에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하루씩 당번을 서는데, 당번은 아주 헌신적으로 테이블을 돌면서 손님에게 술을 받아 마셔야했다. 테이블이 40개 되는 큰 식당이었다. 테이블에서 소주 한 잔씩만 받아도 네다섯 병은 됐다. 그걸 다 마시면 등에 업혀서 집에 가고 그랬다. 어느 날은 권양숙 여사가 ‘우리 노최고(노무현) 당번 좀 빼달라, 사람 죽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그만큼 가게에 대한 책임감이 아주 강했다.”

다음은 김원웅의 회상.

“주변에 사업하는 친구들이 가게 이름을 너무 어렵게 하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통추 멤버들 전부 당시 ‘왕자병’ 같은 게 있었다. 생각해보니 왕자병 환자들만 모였다. 그 시대에 3김(金) 안 따라갔던 사람들이니까. 이름이 어려워도 ‘우리가 하면 유명해진다’ 생각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하로동선은 97년 말까지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다가 99년에 문을 닫았다. 그마저도 노무현·유인태 등이 실제로 가게를 관리한 기간은 1년 남짓이었고, 1997년 이후에는 사실상 명의만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음은 하로동선의 실패에 대한 김원웅의 분석이다.

“중간까진 잘 됐다. 후반 가니까 다들 지역구 관리를 한다고 내려갔다. 노무현은 부산에 가 있지, 사장인 나는 대전 가 있지, 중반쯤 되니 아무도 가게에 보이질 않았다.”

다음은 박석무의 시각.

“통추가 여러 차례 세미나도 열고 대중 집회도 열면서 정치적 세력을 키우려고 했었다. 그 과정에서 돈이 없으니 정치자금을 마련하자는 의미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잘 됐었는데, 당시 미국에서 소와 관련된 병이 유행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일절 고기를 안 사먹었다. 우리가 3000만 원씩 출자를 해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은행에 고스란히 갚는다고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로동선의 흥망성쇠는 통추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1997년 15대 대선이 다가오자, 통추의 존재감은 여름의 화로처럼, 겨울의 부채처럼 작아져만 갔다. 사람들은 야당 후보 DJ가 이번엔 대권을 잡을 수 있을지, 혹은 DJ에 맞선 여당 후보로 누가 나설 것인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통추 안에서도 대선 후보 추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지더니, 급기야 언쟁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때 통추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한쪽은 민주당이 아닌 통추만의 독자 후보를 추대해서 승부를 보자는 ‘독자후보론’, 나머진 같은 야권인 DJ에게 세를 몰아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이 먼저라는 ‘정권교체론’이다.

이회창이 경선을 통해 신한국당 후보로 결정되자, 통추는 더욱 소란해졌다. 이회창의 지지율이 김대중보다 두 배나 높은 여론조사 결과가 속속 나왔기 때문이다.

통추 독자후보론 지지자들은 인지도가 높았던 경제학자 출신의 조순 서울시장을 후보로 밀자고 주장했고, 조순은 이를 수용하며 9월 11일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됐다. 그러나 지지율이 답보 상태에 놓이자 통추와 냉전 관계에 있었던 민주당의 이기택과 한 배를 타더니, 이후엔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통합,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노무현의 회고.

“유인태 의원을 따라 조순을 찾아간 적이 있다. 김대중 후보가 물러나지 않으면 이회창 후보에게 지게 되는데, 김대중이 양보하면 출마하는 것이고 양보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순은 ‘나도 이런 일을 할 때는 뜻을 가지고 하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 이기택과 손을 잡아 버렸다. 또 대선이 임박하자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 쪽으로 가 버렸다. 아마 김대중이 양보하지 않으면 후보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괘씸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조순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 독자후보론 안에선 다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때 언급됐던 대체 인물이 외부 인사였던 이인제, 내부 인사였던 제정구와 노무현이다. 이인제는 당시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배한 후 독자 출마를 고려하며 9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한 상태였다. 통추는 초반엔 ‘조순-이인제’ 단일화 중재를 모색했지만, 조순이 사퇴하자 신한국당 내 민주계까지 포괄하자는 ‘제3세력 연대 방안’도 논의됐다.

노무현은 3당 합당을 적극 찬성했던 이인제를 대선 후보로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통추가 이인제를 지지한다면 나도 출마하겠다”며 “통추가 나를 밀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해선 후에 “절대 이인제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홧김에 한 발언”이었다고 저서에서 해명하고 있다. 노무현은 결국 1997년 11월 13일, 대선 한 달 전 DJ의 국민회의로 입당한다.

다음은 이인제와 노무현의 갈등을 목격했던 원혜영의 서술.

“처음엔 이인제 독자 후보 추대도 나름대로 우리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이인제가 당시 독자적으로 선풍을 일으켰으니 그것을 대안으로 논의를 해봤지만, 결국 노무현의 간곡한 부탁으로 안 하는 쪽으로 정리를 했다. 노무현은 이인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아주 강했다. 3당 합당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겪어봐서 잘 안다. 이인제는 정말 정치적 태도나 입장이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태도가 아니어서 실망했다. 더구나 3당 야합 때 다른 의원들은 서로 양해를 구하는 입장이었는데 이인제는 너무도 당당하게 당신은 왜 안 쫓아오느냐고 반대로 나를 비난해서 정말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런 사람을 지지할 수 없지 않느냐.’

그렇게 나에게 설명 겸 호소를 했다. 나도 ‘잘 알겠다’고 했고, 결국 정권교체를 위해 DJ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국민회의 입당 과정에 대해선 통추 멤버들 간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이에 〈시사오늘〉은 그들의 주장을 최대한 균형감 있게 다루려고 한다.

첫 번째, ‘노무현은 본인이 독자 후보가 되지 않아서 국민회의로 나간 것’이라는 박계동의 주장.

“민주당에 남은 재야세력들이 향후 진로에 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YS와 DJ가 아닌 제3의 인물로 가는 ‘독자후보론’이었다. 노무현도 독자후보론 제언(提言)을 만들어 동료 정치인들에게 팩스로 보냈다. 노무현은 본인을 독자후보로 생각하는 듯 했다. 반면 독자후보론 주장 측에선 제정구를 추대하려고 했다.

그랬더니 노무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DJ에게 가버렸다. 결국 통추는 독자후보도, 창당도 못하게 됐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했겠나. 통추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결론은 아직은 독립적인 창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하는 시기에 지분 40%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제정구, 이부영, 박계동 등이 (한나라당으로) 가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자연스럽게 국민회의행과 잔류(後한나라당 창당)로 나뉘었을 뿐, 박계동의 주장은 허구라는 김정길·박석무·이철 등의 입장. 이들은 독자후보론이 “현실 가능성 없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고 지적한다.

다음은 김정길의 반박.

“그건 박계동 혼자만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사실과 다르다. 통추에서 단일후보를 내세운다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겠나. 당시 통추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냐, 김대중 후보 지지냐’로 의견이 나뉘었고, 각자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판단에 따라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거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면서 통추가 해체된 것이다. 노무현과 나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선 김대중이 당선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국민회의로 함께 갔다.”

마찬가지로 박석무의 반박 및 회상.

“97년이 되니까, 통추를 막 만들 때하고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잘만 하면 DJ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보였다. 나는 DJ의 당선이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봤다. 그가 미워서 떨어져 나왔지만, 정권교체가 더 중요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DJ를 앞세울 수밖에 없다는 게 그 당시 정치적 판단이었다.

‘그 사람(DJ) 싫다고 나왔는데, 우리는 절대 못 돌아가겠다’는 파가 있었고, ‘그래도 우리라도 힘을 보태서 정권교체 해야 한다’ 파가 있었다. 독자후보론도 있긴 했지만, 그 세(勢)가 미약했다. 정당도 없고, 의원도 하나도 없고. 사실상 통추는 원외 모임이다. 통추에서도 ‘독자 후보를 내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컸다. 몇 사람들이 얘기한다고 그게 되나?”

비슷한 이철의 말.

“통추 독자 후보 움직임도 있긴 했다. 제정구를 내보낸다, 누구를 내보낸다, 그런 얘기가 있긴 했다. 그러나 후보 문제를 두고 노무현과 통추의 균열이 발생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 당시 나는 힘을 쫓는 정치를 하는 김대중에 대한 미움만으로 국민회의 보다는 민주당에 남아있기를 택했고, 자연스럽게 한나라당 창당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마지막 세 번째, 독자후보론은 애초에 ‘타이밍’부터 어긋났다는 김부겸의 발언.

“대선이 다가오니까, 조순 서울시장을 민주당 안에서 우리가 좀 띄웠다. 통추가 모여서 회의를 하다가 ‘그럼 어떡할래, 이 양반을 메고 뛸래?’ 얘기가 나온 거다. 제정구, 노무현, 유인태가 조순을 찾아가서 설명했고, 조순도 오케이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리고 독자 후보를 내려면 조순을 추대하기 전에 했었어야 된다. 이미 조순이 후보로 나온 마당에 무슨 독자 후보? 게다가 조순이 꼬리를 내린 마당에, 다른 후보를 또 내세우긴 어려웠다. 그래서 안 됐다. 조순이 포기했을 땐 이미 시간도 늦었고 동력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DJ도 DJP연대를 하겠다는 거다. DJ 본인이 ‘집권을 위해 너무 우경화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까 우려했던 것 같다. 한 쪽엔 JP, 한 쪽엔 통추, 균형 있게 가려고 통추를 끌어넣은 것이다. 그 무렵에 DJ가 ‘그럼 내하고 하지’ 하더라. 그래서 갈 사람은 가게 됐다.”

1997년 11월 13일, 노무현을 비롯해 김원기·김정길·박석무·유인태·원혜영·홍기훈·황의성 전 의원 등은 공개적인 국민회의 입당 서명식을 갖는다. 이들은 이날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DJ와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50년 여당의 부패와 부조리를 청산하는 여야 정권교체가 이 시대 최대의 사명이자 최고의 개혁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하고 대선에서 함께 힘을 합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잔류파(제정구·박계동·김홍신·이수인·이미경·이철·김원웅·김부겸 등)는 약 열흘 뒤인 11월 24일,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한다. 결과적으로 통추는 1997년 11월 24일 공식적으로 활동이 종료된 셈이다.

다음은 한나라당 행을 택했던 김부겸의 상황 설명.

“우리가 말렸는데도 악착같이 당을 깨고 나간 사람과 뭘 하겠는가. 분당 사태 때, DJ는 우리에게 ‘신한국당 2중대’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DJ한테 갈 수 있겠나. 눈물을 머금고 DJ에게 갈 사람은 국민회의로 갔고, 민주당에 있던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한나라당에 가는 상황이었다. DJ에게서 명분을 찾은 사람은 떠났고, DJ에게서 받은 분열의 상처가 깊었던 사람들은 남은 것이다. 그렇게 후자가 한나라당 창당 멤버가 됐는데, 우리와 헤어졌던 조순을 당 총재로 만났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역시 한나라당으로 갔던 박계동의 묘사.

“먼저 90년대 초 재야세력의 상황을 봐야 한다. 재야는 문제제기의 장인데 반해, 정치는 문제해결의 장이다. 당시 재야세력들은 ‘언제까지 문제제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재야세력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1991년부터 있었던 이유도 이런 연유에서다. 재야출신들은 과도적 문민정부인 YS정권에 몸담기보다는, 야당을 선택해 온전한 문민정부의 창출을 원했다. 그런데 DJ가 정계은퇴를 번복하면서 통추세력들이 둘로 갈라졌고, 남은 사람들은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으로 간 것이다.”

박계동은 이어 제정구의 한나라당행에 대해서도 추론했다.

“제정구는 옛날부터 DJ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한 확신에 따른 거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6공 집권 1년 후에 예정돼 있던 민주화 7개안 조치에 대한 중간평가를 누가 제일 먼저 필요 없다고 했나. DJ 아닌가. 지도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같이 갈 수가 있겠나.”

第四章. 통추, 막을 내리며

통추가 남긴 시대정신

“지는 줄 알면서도 그저 옳기 때문에 하는 싸움이었지”

1996년 11월 9일의 시작부터 1997년 11월 24일의 이별까지. 공식적 활동일은 고작 1년. 그러나 통추 참여자들은 입을 모아 “그 1년은 우리나라 정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1년이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특히 김부겸은 기자에게 통추의 ‘이별(離別)’이라는 말보단 ‘몌별(袂別)’이란 단어로 표현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존속 기간이 1년이라지만 우리는 정말 꾸준한, 오래 된 관계다. 옛 선비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도포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울면서 소매를 붙잡고 억지로 헤어지는 상황을 ‘몌별(袂別)’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 몌별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헤어진 것이다. 그래서 통추가 끝나고도, DJ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도 우리끼리 자주 만났다. 지금도 마포에서 자주 모임을 가진다.

99년쯤이었나, 어느 날 마포의 한 식당에서 만나서 노무현이 갑자기 ‘내 대통령 출마하는데 나 좀 도와다오, 동생아’ 하던 일도 있다. 어이가 없어서 ‘아니 형님, 우리 당도 아닌데 내가 왜 도와줘요’ 따지니까, 웃으면서 ‘임마. 다 도와주는 법이 있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그게 가능했던 곳이 통추다.”

몌별해야했던 통추, 그들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통추는 한국 정치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나.

다음은 통추의 한 가운데 서 있던 그들이 고심 끝에 기자에게 요약해 준 한 문장이다.

김원웅. “지는 싸움이지만, 옳기 때문에 하는 정의로운 싸움. 그게 통추지.”

홍사덕. “정치라는 큰 흐름에서 보면, 그저 하나의 물결일 뿐.”

김부겸. “국민 통합이라는 정치적, 시대적 과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다는 정신”

이철. “힘의 논리가 아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진 정치. 그러나 권력이 없는 정치는 곧 사라지고 만다는 서글픈 끝맺음.”

박석무. “영호남, 지역, 정당, 세대를 뛰어넘어 국민 통합의 가교가 되자는 정신”

원혜영. “반 지역주의, 반 분열주의를 내세운 거의 유일한 정치 집단”

흔히 정치적으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들 말한다. 정치에는 언제나 당적이나 소속을 떠나 이해관계가 깊숙이 작동한다는 의미에서다. 겉으로만 보면 같은 길을 걸어간 동지처럼 보여도, 시각을 바꿔보면 평생을 대립했던 존재로 비춰질 수 있는 곳. 그 복잡한 황무지가 바로 정치권이다.

그 속에서 서로 반목(反目)했으면서도 통합했고, 통합했으면서도 끝내 갈라섰던 통추. 통추는 한국 정치사에서 반지역주의 통합정신의 진면목과 정치적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빠트릴 수 없는 주요 대상이다. 〈시사오늘〉이 통추를 하나의 중심축으로 삼고 서로의 증언을 대비시켜 역사적 사건을 이해해보려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통추는 분명 기존 한국 정치의 정치공학적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97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보스정치’를 찾아 이동했던 것은 그의 한계이며, 이로써 통추의 계몽은 여전히 ‘미완의 기획’이자 ‘영원한 미완’으로 머물러 있다.

서로 싸우거나 해치고자 하는 상대를 뜻하는 ‘적(敵)’과, 병적·당적·학적 등 소속을 비유하는 ‘적(籍)’이 동음이의어라는 점은 이쯤에서 뜻 깊다.

마지막으로, 25년 전의 조각난 기억들을 기워 맞춰준 통추 멤버들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다. 

 

<참고자료>

박석무 전 의원 증언

김원웅 전 의원 증언

홍사덕 전 의원 증언

박계동 전 의원 증언

이철 전 의원 증언

김부겸 의원 증언

원혜영 의원 증언

박계동 전 의원 2011년 본지 인터뷰

김정길 전 의원 2011년 본지 인터뷰

원혜영 의원 2013년 본지 인터뷰

김원웅·김홍신·노무현 8,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

김대중 자서전 <삼인>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 에세이 <여보,나 좀 도와줘>

노무현재단 노무현사료관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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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섭 2019-09-01 14:40:51
상당히 사료적인 가치가 있는 기사이네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당시 참여자들의 증언 .
기사를 넘어 역사의 정리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