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사회③] 자리잡는 부의 대물림, 재계 세대교체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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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사회③] 자리잡는 부의 대물림, 재계 세대교체의 민낯
  • 박근홍 기자
  • 승인 2019.06.03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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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경영세습, 기득권 유지 위한 수단에 불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개원한지 갓 70년이 넘은 국회에 2·3세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출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보다 앞서 일제강점기부터 부를 축적해 100년의 역사를 가진 재계는 2·3세를 넘어 4세 시대가 본격 개막한 모양새다. 부의 대물림이 공고화된 것이다.

지난달 공정거래위원회는 총 34개 기업집단을 대기업 규제를 적용하는 자산총액 10조 원 이상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통보했다. 이중 기업집단의 총수인 동일인이 오너일가 2·3·4세인 곳은 24개로 전체의 70%를 넘는다. 이번 발표에서 공정위는 구광모 LG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등 재벌 4세 경영인과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등 3세 경영인을 동일인으로 새로 지정해 재계 3·4세 시대의 개막을 공인했다. 특히 공정위가 4세 경영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한 건 1987년 총수 지정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이번 발표에서 동일인으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이미 총수 역할을 하고 있는 3·4세 경영인들도 여럿 있다. 재벌 3세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연초 그룹 시무식을 부친 정몽구 회장 대신 최초로 직접 주재한 데 이어, 지난 3월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 대표이사로 선임되면서 올해가 자신의 경영체제가 수립된 원년임을 천명했다. 이해욱 대림그룹 회장 역시 지난 1월 회장으로 승진해 3세 경영 축포를 쐈다. 이 회장은 2010년 부회장 취임 이후 사실상 회장 직무를 수행했으나 부친인 이준용 명예회장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간 부회장직을 유지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조석래 명예회장의 자리를 놓고 삼형제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효성그룹은 장남 조현준 회장과 삼남 조현상 총괄사장이 취임하며 3세 형제경영 시대를 연 상황이다. 다만,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이 움직인다면 제2차 형제의 난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다. 코오롱그룹의 경우 이웅렬 전 회장이 현재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인 만큼, 그의 장남인 이규호 전략기획담당 전무가 직급 이상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흐름은 올해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CJ그룹은 오너일가 4세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에 시동을 건 모양새다. 아직 이립(30세)의 나이지만 부친인 이재현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경영참여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회장의 딸인 이경후 CJ ENM 상무의 행보도 관심 대상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삼형제를 대상으로 사업부문별 세습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에 대한 김 회장의 애정이 남다른 만큼, 김 전무를 중심으로 승계구도가 그려질 전망이 높다는 게 중론이다. 또한 GS그룹은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허준홍 GS칼텍스 부사장, 허서홍 GS에너지 전무, 허윤홍 GS건설 부사장 등 4세들이 허창수 회장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 에스케이그룹, 엘지그룹, 롯데그룹, 한화그룹, 지에스그룹, 현대중공업그룹, 신세계그룹, 한진그룹, 씨제이그룹, 두산그룹, 엘에스그룹, 대림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효성그룹, 한국투자금융그룹, 영풍그룹, 교보생명보험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 코오롱, 오씨아이, 에이치디씨, 케이씨씨 등 2019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경영세습 경영인이 총수(동일인)인 대기업 ⓒ 각 사(社) CI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 에스케이그룹, 엘지그룹, 롯데그룹, 한화그룹, 지에스그룹, 현대중공업그룹, 신세계그룹, 한진그룹, 씨제이그룹, 두산그룹, 엘에스그룹, 대림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효성그룹, 한국투자금융그룹, 영풍그룹, 교보생명보험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 코오롱, 오씨아이, 에이치디씨, 케이씨씨 등 2019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중 경영세습 경영인이 총수(동일인)인 대기업 ⓒ 각 사(社) CI

이처럼 재벌 3·4세대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세대교체라는 허상에 가려진 민낯이 드러나야 할 때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부 소수 재벌가들이 구축한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이뤄진 부의 대물림은 진정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자본권력과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정위에 따르면 경제위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최근 5년 간 자산 5조 원 이상 대기업 집단의 부채비율은 2015년 81.4%에서 2016년 79.6%, 2017년 76.0%, 2018년 71.2%, 2019년 67.8% 등으로 꾸준히 감소 중이다. 반면, 자산총액은 2015년 1646조3000억 원에서 올해 2039조7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또한 앞서 거론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34곳은 범삼성가(삼성, 신세계, CJ 등), 범현대가(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 HDC, KCC 등), 범LG가(LG, GS, LS 등) 등 사실상 3+α로 볼 수 있으며, 나머지 α의 대부분(SK, 롯데, 한화, 두산, 효성, 영풍, 금호아시아나, 코오롱 등)도 재벌가끼리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혼맥을 고려하면 3개의 큰 뿌리에서 나온 잔뿌리로 분류된다. 무늬만 세대교체, 무분별한 경영세습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부의 대물림을 위해 법의 허술함을 이용하는 편법승계 문제도 거론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SDS BW 저가 발행 사건,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의 현대글로비스 일감 몰아주기,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SK C&C 지분 헐값 매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같은 편법승계는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경제개혁연대는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이 CJ올리브네트웍스의 인적분할을 통해 CJ 지분을 취득한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으며, 한화그룹은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승계에 해외 계열사를 동원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검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자녀들이 회사를 물려받으면 그것으로 세대교체다, 혁신이다 하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우리나라의 재벌처럼 독특한 지배구조에서 세대교체라고 자랑하려면 최소한 재벌오너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는 정도 수준은 돼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의 경영세습은 부와 특권을 놓지 않기 위한 부자들의 수단에 그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선진국에서는 대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엄격히 분리돼 있다. 자녀들이 회사의 경영권을 물려받는 사례는 굉장히 드물고, 오로지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총수가 결정된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일본의 도요타, 혼다, 파나소닉 등이 대표적인 예다. 설사 경영 세습이 있더라도 이사회와 감사의 독립적인 감시가 이에 대한 부작용을 방지한다. 반면, 이번에 총수가 변경된 LG그룹, 두산그룹, 한진그룹 등은 모두 총수가 지주사 이사회 의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제대로 된 견제는 물론이고, 본질적인 변화가 이뤄질 수 없는 구조라는 평가다.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은 지난 2월 CBS〈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재벌 오너일가가) 절대적인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경영진을 감시, 감독할 사람들마저 다 자기 사람으로 뽑으니까 재벌 총수일가들이 전횡을 하게 되는 것이고 불법 행위를 해도 계속 회사를 경영하는 문제가 있다"며 "경영권은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계속 도전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회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 좋은 경영진들이 나타나면 그 사람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게 맞는데, 지금 재벌에서 일어나는 경영권 세습은 오히려 기업을 더 죽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에 부담을 준다고 하는데 오히려 지금 재벌 총수의 전횡적인 경영이 더 문제다. 불법행위를 했거나 경영 실패를 한 경영진에 대해서는 그만큼 또 책임을 강화해서 더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잘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며 "기업의 경영을 더 올바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여당이 재벌개혁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담당업무 : 건설·부동산을 중심으로 산업계 전반을 담당합니다
좌우명 : 隨緣無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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