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필담] 김원봉, 그는 정말 ‘빨갱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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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필담] 김원봉, 그는 정말 ‘빨갱이’인가?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6.09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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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 일대기를 통해 살펴본 김원봉은?
文 현충일 추도사에서 김원봉 언급 논란 셋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6일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가 논란이 됐다.ⓒ뉴시스
6일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가 논란이 됐다.ⓒ뉴시스

한 사람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사람마다, 시기마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평가가 특히 그러했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식에서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다”며 약산 김원봉의 사례를 언급했다. 이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김원봉을 추켜세운 문 대통령의 추념사가 우리 사회를 분열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난했다.

논란은 2019년에 있었던 일이지만, 이는 마치 74년 전 해방 직후 좌우가 극렬하게 다투던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8일 <시사오늘>은 김원봉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그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알아봤다.

그의 일생은 해방 ‘전’과 ‘후’로 나뉜다.

김원봉의 해방 전 일대기를 나타냈다.ⓒ시사오늘 그래픽=박지연 기자
김원봉의 해방 전 일대기를 나타냈다.ⓒ시사오늘 그래픽=박지연 기자

그는 22세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조직화된 광복군을 양성하고자 했으나,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고 판단해 9월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것이 바로 의열단(義烈團)이다.

義烈團, 의로운 바를 맹렬하게 실천하는 조직

그가 1919년 11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곽재기), 이종암 등과 길림성(吉林省)에서 발족시킨 의열단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소규모로는 부족하다 생각한 그는 전략적이고 군사적인 조직을 위해 1926년 광저우의 황포군관학교에 제4기생으로 들어갔다.

졸업 후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해 활동했으며, 1932년에는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의열단원과 참여했다. 1935년에는 9개의 독립운동 단체를 묶어 출현한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로 활동했으며,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이후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었다)를 결성해 대장이 됐다. 해방이 가까워질 무렵 1941년에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에 참가해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았다.

이와 관련 지난 4월 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서울시립대학교 염인호 국사학과 교수는 그가 특별한 이유에 대해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쉼이 없었다”며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은 투쟁과 휴식을 반복했지만, 김원봉은 중국으로 간 후부터 귀국할 때까지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해방 전 김원봉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남북, 보수진보 할 것 없이 그 누구든 그를 독립운동가로서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해방 이후다.

김원봉의 해방 후 일대기를 나타냈다.ⓒ시사오늘 그래픽=박지연 기자
김원봉의 해방 후 일대기를 나타냈다.ⓒ시사오늘 그래픽=박지연 기자

 

해방 이후 김원봉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이 발표될 쯤 귀국했다. 

한국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또 임시정부를 통해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4개국이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하고, 그 후 총선거를 실시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수립한다.
-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

그때 <동아일보>는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 보장보다는 새로운 식민통치가 시작되는 것에만 방점을 찍어 전했다. 이에 더해 소련이 신탁통치를, 미국이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오보를 낸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한반도 신탁통치 30년 안을,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이에 좌익은 합의문의 방점이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고 보고 찬탁(후에 반탁으로 선회했다)을, 우익은 ‘신탁통치’ 그 자체에 본질이 있다고 보고 반탁을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친일파들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에 스며들면서 뒤엉켜버린다. 해방 전의 독립운동가가 해방 후엔 찬탁을 해 반민족주의자가, 해방 전 친일파가 해방 후엔 반탁을 해 민족주의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 사건 이후 친일파 청산에서 좌우 이념갈등으로 프레임 전환이 벌어졌다.

이때 김원봉은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좌우합작을 위해 활동하는 여운형을 도왔다. 이후 1946년 6월에는 김규식과 좌우합작 문제로 회담을 했다.

김원봉을 붙잡아 간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 송남헌의 <해방 3년사> 中

김원봉은 1947년 3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총파업 배후인물로 지목돼 체포됐다. 1987년 월간경향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친일경찰 노덕술은 김원봉을 ‘빨갱이 두목’이라 부르며 모욕을 주고 뺨을 때렸다”고 전해진다. 이에 정치적 노선이 달랐던 임시정부 계열의 정정화도,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도 이렇게 회고했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의열단의 의백이었고 민혁당의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정정화 <장강일기> 中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그의 독백은 울분으로 이어진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中

그러다 1947년 7월 김원봉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일 정부 수립 활동을 하던 여운형이 암살되고, 이후 8월에는 자택이 습격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남북연석회의)에 남측 정치단체 대표로 김구, 김규식, 박헌영, 이극로 등과 함께 협상에 참가한다. 하지만 그 뒤로 그는 북한 지역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남한의 평가가 뒤바뀌게 된다.

지난 4월 10일 국회에서 김원봉 독립유공자 서훈 가능성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뉴시스
지난 4월 10일 국회에서 김원봉 독립유공자 서훈 가능성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뉴시스

지난 4월 10일 김원봉의 서훈 수여 문제가 불거졌을 때 문제가 된 시점도 바로 이 시점이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중 포상 대상자가 되기 위한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그 기준은 △적극적인 독립운동 공적 △공적이 원전에서 확인 가능 △사망 시까지 행적에 문제가 없음 등이다.

하지만 그가 서훈 대상에서 제외된 까닭은 세 가지 기준 중 마지막 기준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까지 훈장을 주려면 국민적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한편 그의 남아있는 유일한 형제인 막내 여동생 김학봉은 2015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원봉의 서훈과 관련해 “북한에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닌데 보훈처가 잘 결정해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는 8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김원봉이 남북협상에 참여 후 북한에 주저앉게 된 것은 충격 때문”이라며 “남쪽은 독립운동가 후손이 껌팔이 하고, 미군정 하에 친일파가 득세하는 걸 보다가, 북한의 친일청산과 무상교육 등 다른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혁신계 정치인 정화암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서 “김원봉은 남한에서 정치적으로 큰 무엇이 없겠고, 지난날 관계 했던 대부분은 이북(연안파)에 있고 하니 갔을 것”이라며 평가가 엇갈렸다.

#논란1. 그는 북한의 핵심 권력자였다?

북한의 권력 구조 특성상 노동당 당원이 아니고서는 핵심 권력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조차 없다고 전해진다. 당시 북에 김원봉(金元鳳)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노동당원인 김원봉은 조선노동당 강원도 위원장까지 지낸 인물로, 이는 약산 김원봉과는 다르다는 게 정설이다.

북한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약산 김원봉’은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9월에는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그리고 1957년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이에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지난 4월 1일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재적 검토’ 학술토론회에서 “노동당원이 아니기 때문에, 김원봉이 맡은 직책은 권력의 핵심이 아니다”며 “1948년 무렵에는 북한 사회가 변화하면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평가했다.

또한 같은 날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그가 군소정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기에, 국가검열상 직책을 맡아도 큰 영향력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직책이 바뀌며 덜 중요한 자리를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전문가들은 김원봉이 ‘한국전쟁 발발’의 핵심 권력자는 아니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김원봉이 인공 초대 내각에서 장관급 자리를 맡거나 북한 헌법 제정 시에도 위원으로 참여한 점을 들며, ‘북 정권 수립에 기여’한 핵심 권력자로 봐야한다는 입장도 있어 평가가 엇갈린다.

#논란2. 그는 국군을 많이 죽인 대가로 훈장을 받았다?

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은 7일 논평을 통해 문 대통령의 추도사와 관련 “북한정권 수립의 공훈자,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을 많이 죽인 대가로 김일성 최고 훈장을 받은 김원봉을 두고 ‘국군의 뿌리’라고 했다”고 비난했다.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1952년 3월과 1958년 두 번의 로력(노력)훈장을 받았다. 이는 최고등급인 국기훈장보다 낮은 훈장으로, 한국당의 논평처럼 ‘김일성 최고 훈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두 번의 노력 훈장 중 첫 번째 훈장을 왜 받았는가가 문제된다. 특히 전쟁 중에 받았던 훈장은 민 대변인 논평처럼 ‘6·25 전쟁 중 국군을 많이 죽인 대가’로 받은 것인지, 아니면 지난 4월 학술토론회에서 나온 의견처럼 ‘군사적 공로라기보다는 후방에서 군량미 생산하는 등의 기여’로 받은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논란3. 그는 왜 현충일 추도사에 등장했나?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이 7일 “3.1절이나 광복절에 등장했다면 일견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현충일에 등장할 인물은 아닌 것”이라 논평했다.

좌우를 막론하고 김원봉에 대해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은 동의한다. 일제가 백범 김구보다도 높은 최고 현상금을 걸었던 김원봉의 현상금은 무려 100만원으로 현재 가치로는 320억 원에 해당했던 그가 광복절에 등장했다면 이해하겠지만, 왜 하필 현충일이냐는 것이 바른미래당의 입장이다.

이에 청와대는 7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든 것”이라고, 더불어민주당도 논평을 통해 “이념으로 편을 갈라치던 때 역사마저 편을 갈라 약산의 활동 등을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완전히 배제하던 때의 온전치 못한 애국을 통합적인 애국으로 만들어가자는 말”이라고 해명했다.

이와 관련 김인수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대표는 8일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높이 평가한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발언은 적절치 않다”고 전했다. 

이어 김 대표는 “발언은 장소와 때가 있는데 괜히 분란을 일으킨 것”이라며 “의도적인 발언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 청와대가 임시정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KBS에서 김원봉 드라마가 곧 20부작으로 반영될텐데, 이 드라마로 그에 대한 논란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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