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7)] 송경숙 민추협 사무부총장˝YS, 1987년 광주 유세 직후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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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7)] 송경숙 민추협 사무부총장˝YS, 1987년 광주 유세 직후 눈물˝
  • 윤종희 기자
  • 승인 2011.08.07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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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민산의 산증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민주화 기치를 내세운 민주산악회에는 여성 투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성 회원들처럼 정치사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 마다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민산 여성 회원들의 활약을 송경숙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부총장을 통해 들어봤다. 송경숙 사무부총장 얘기 속에는 피터지는 투쟁이 들어있었다. 특히, 1987년 대선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광주유세장에서 겪은 테러는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인터뷰는 2011년 8월 3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사오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YS 23일간 단식투쟁이 민산 가입 계기"

- YS를 만난 계기는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YS가 가택연금 되어있을 때입니다. 평생 야당 생활을 하셨던 고(故) 함기환 선생님과 함께 YS의 상도동 자택을 방문했습니다. 그 직후 YS는 23일간 단식투쟁에 들어갑니다.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보고 여자이지만 내가 민주화를 위해 할 수 있는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 와중에 민주산악회를 알게 됐고 가입했습니다."

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3주년. 김영삼은 ‘단식에 즈음하여’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YS의 단식투쟁이 일파만파 파급돼 가자 전두환 정권은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시켰다.

단식이 ‘쇼’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전두환 정권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회유에 나섰다.

그러나 회유에 굴하지 않고 YS는 단식을 강행했고, 단식 17일째 김수환 추기경까지 병원을 방문해 생명보존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로부터 단식 23일째 YS는 병실에 누운 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단식을 중단했다. 그 무렵 송 부총장이 민산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 민산에서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제가 가입했을 때는 산에 오르는 민산 회원 수가 5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중 여자는 저 혼자였습니다. 산에 오를 때마다 회원 개개인에게 정보원이 따라 붙었습니다. 유인물 하나도 마음대로 복사하거나 나눠 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함기환 선생님이 우리나라 정치 소식을 다룬 외신 유인물을 한 두장 주면, 저는 잘 아는 문방구에서 20여장 복사하고 또 다른 문방구에서 20여장 복사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돌렸습니다. YS와 민주 인사들이 고통 당하고 있는 현실을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 민산 회원들이 등산을 할 때 특별했던 게 있었나요?

"저희가 산 정상에 오르면 '야호'라고 외치지 않고 '민주회복'이라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면 정상에 오르기까지 걸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내려왔습니다. 이는 정상에 오르면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 민주세력들은 '군정종식'이라는 화두 아래 뭉쳐 싸웠습니다. 가정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분들도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목숨을 건 투쟁에 들어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YS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했는데, 희망을 잃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산, 정상에 오르면 다른 길로 내려와"

- 송 부총장님 외에도 여성 회원들이 있었나요?

"당시, 민산 중앙에는 오사순 선배와 저, 박의숙, 박경옥, 박말년, 유경희, 오옥자 등이 여성으로서 활동했습니다. 이 외에도 전국 지부에서 여러 여성 회원들이 활동했습니다. 남성 회원들에 뒤지지 않게 여성 회원들도 열심히 운동을 했습니다. 어쩌면 여성 회원들이 더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 여성 회원들끼리만 YS를 만나러 상도동에 가신 적이 있었나요?

"어느해 설날이었습니다. 저와 여성 회원 몇몇이 상도동으로 세배를 갔습니다. 그런데, YS 자택에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할 수 없이 저희들은 하얗게 눈이 쌓인 길바닥에서 YS에게 세배를 했습니다. 그 때 2층에서 YS가 내려다 보시면서 손을 흔들어 주시더라구요.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저희에게 YS는 정신적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이런 YS를 만나지도 못한채 길거리에서 세배를 드려야 하는 처지를 생각해보십시요. 정말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사진제공=송경숙

 

- 전두환 정권 당시 힘들었던 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전두환 정권의 시퍼런 칼날이 번득 거리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군정종식과 민주회복이라는 두 화두만 가지고 싸웠습니다. 거리에서 시위를 하다보면 경찰들이 마구 닭장차에 저희들을 밀어 넣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난지도에 가서 저희들을 버리기 일수였습니다. 그 때 난지도에는 차들이 안다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희들이 난지도에서 2시간 정도 터벅터벅 걸어서 나오고는 했습니다."

"눈쌓인 길바닥에서 YS에게 세배하기도"

- 1987년 대선 당시 광주에서 폭행을 당한 사실이 있다면서요?

"눈물나고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1987년 전라남도 광주 유세 때가 생각납니다. 저는 그 때 'YS의 정직과 진실'이라는 책과 유인물, 현수막 등을 트럭에 싣고 광주로 향했습니다. 광주 신양파크호텔에서 김도 비서관을 만나 이것들을 넘기기로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양파크호텔에 도착했을 때 김도 비서관이 없었습니다. 당시 김도 비서관도 그 곳에서 버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애써 찾아보았지만 그 때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이 안됐습니다. 하는 수 없이 트럭을 경남 마산 백창기 위원장 사무실로 돌렸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그냥 있으면 책과 유인물 등을 빼앗길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산에 간 뒤 차 안에서 밤을 새우고 다시 광주로 넘어와서 김도 비서관을 만나 책과 유인물 등을 전달했습니다."

- 광주에서 YS 유인물을 뿌리는게 가능했나요.

"저희 여성 회원들이 선거 유인물을 뿌렸어요. 그 지역 사람들은 지역 분위기가 워낙 험해서 그 걸 할 수 없었기에 중앙에서 저희들이 내려간 것입니다.

그렇게 저희들이 유인물 팀에 합세 했고, 저는 '안녕하세요. 김대중(DJ) 선생님도 훌륭하지만 YS에 대해서도 읽어보세요'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유인물을 찢어버렸습니다.

제가 그래서 '읽어 보시고 찢으세요'라고 하니까 어디서 건장한 남자 두사람이 오더니 쌓아둔 유인물을 발로 차고 '이 XX년아 꺼져'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못들은 척 하니까 '이 XX년이 겁도 없어. 안꺼져. 야 XX년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라고 하는 거에요. 이게 다가 아니에요.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절반으로 자른 것을 끼어 넣고서는 '이년 그어버려'라고 하는 거에요. 그 때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홍보물은 누가 뿌릴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저는 DJ도 모셨던 사람이에요. 민추협을 했어요'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 남자들은 그대로 있었어요. 저는 정말 숨이 막히고 기가 막혔는데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야 그을래면 그어'라면서 입고 입던 잠바 지퍼를 열고 내팽개쳤어요. 그랬더니 '이 년이 겁대가리가 없어'라고 해요. 제가 다시 '어차피 나는 죽으려고 왔다'면서 입고 있던 남방까지 벗어 던졌어요.

그래서 내복이 드러났는데 주변 남자들이 보고 있는 거에요. 저는 '그을래면 그어. 내가 여기서 죽어 나가면 대통령은 YS가 된다. 김대중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비열하게 하라고 했냐. 내가 죽어서 나가면 영광'이라고 소리쳤어요. 그랬더니 그 남자들이 '이런 독종 같은 년'이라면서 그냥 갔어요."

"1987년 전라도 'YS 쑤셔버린다' 분위기 험악"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 광주 유세 당일날 현장 분위기도 험악했죠?

 

그 이튿날 유세가 시작됐는데 애 엄마들이 YS 얼굴이 그려져 있는 조그만 피켓을 아이들한테 밟으라고 시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주머니, 어린애가 뭘 압니까.

그 애가 커서 한 시대의 인물 사진을 밟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유세장 쪽으로 대형쓰레기차가 들어오는 거에요. 그 때 저가 '흩어지면 안된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된다'며 막고 있는데 누가 제 머리카락을 잡아 쥐고 질질 끌고 가는 거에요.

그 과정에서 7~8분 두들겨 맞아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지요. 그런데 유세가 시작되자 돌을 집어 던지고 조그만 YS피켓에 불을 붙여서 유세단상에 던지는 거에요.

결국 YS가 유세를 그만두고 차를 타고 빠져나갔어요. 차 주변을 비서진들이 감싸면서 천천히 나갔는데 그 때 장사하는 사람들이 큰 솥에 술국을 끓였는데 그 술국을 던져서 비서진들이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 섬진강 휴게소에 도착했어요. YS는 먼저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고 있더라구요.

저는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서 멀리서 서있었어요. 그런데 상도동에 살았던 김복택(여성)이 '총재님, 송경숙 국장이 얼굴을 다쳤어요'라고 말했고 YS가 제게 다가와 한쪽 눈을 가린 제 손을 치우면서 '많이 다쳤다'면서 울먹 거렸어요. 그래서 저도 소리내서 울었어요. 그런 아픔을 겪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송 부총장은 이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한동안 인터뷰가 중단됐다.

- 당시 호남 분위기는 어땠나요?

"전라도에 일이 있을 때는 여자들이 미리 가서 분위기 파악을 했어요. 그런데 그 쪽 사람들 중에는 폭이 아주 좁은 사시미 칼을 정교한 방법으로 청바지 틈새에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직접 제가 봤어요. 그 사람들은 '김영삼 오면 쑤셔버리겠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식당에 가서 밥도 마음놓고 시켜 먹지 못했어요. 밥을 먹다가 더 달라는 소리도 못했어요. 부산과 경남에서는 (DJ쪽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상도동 사람들은 순했어요."

- DJ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6.10 민주항쟁을 거쳐서 1992년에 문민정부가 세워졌는데 피 흘리며 싸운 모든 사람들이 감격했지요. 그리고 YS가 무사히 임기를 마쳤지요.

그런데 YS가 민주계 인사를 후보자로 낙점했으면 정권 재창출을 했을 것입니다. 이회창과 이인제를 저지 못해 DJ가 당선된 것입니다. DJ가 북한에 가고 노벨상도 타고 했는데, YS가 이뤄 놓은 업적을 DJ가 다 가져갔어요. YS 업적을 DJ가 깍아 먹었어요.

두 분은 민추협을 같이 하면서 정말 피나는 고생을 했는데, 사실 민추협 때는 YS가 더 고생을 했어요. YS가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DJ가 북한에 다녀오고 노벨상 타면서 YS의 민주화 운동, 민주정부 탄생은 묻혀버렸어요. 그 이후에 우리는 민주화운동 했다는 말도 못했어요."

그러면서 송 부총장은 87년 단일화 때의 얘기를 털어놨다.

"그리고 저희가 선거 직전에도 DJ에게 계속 단일화에 대해 물어봤어요. 그런데 DJ는 단일화를 한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결국은 안했지요. 이 것도 말씀드려야 겠는데 그 때 선거를 며칠 앞두고 갑자기 YS가 통일교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가 방송을 통해 나왔어요. YS가 돈을 안받은게 확실하지만 그렇게 뉴스에 나오면서 크게 타격을 받았어요."

- 민산 해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산을 해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해체 안했으면 지금 최고 큰 조직이 됐을 것입니다. 민산은 회원들이 생명을 건 조직이었기 때문에 지금 정치인들의 조직과는 크게 다릅니다. 민산은 힘이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DJ 대통령 당선 이후 YS 업적 모두 묻혀"

- YS의 민주화 공로가 별로 인정 못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희들이 대통령(YS)과 머리를 맞대고 아니면 저희들 만이라도 IMF 등으로 왜곡된  YS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민산 회원들이 봉사단체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각 지역에 있는 민산 회원들이 힘을 모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산 회원했던 사람들이 지금 많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봉사는 돈이 많아서 하는게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입니다. 아픔도 같이 나누면서. '구(舊) 민주산악회'라고 피켓 만들고 하면 됩니다. 민산 모르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습니까."

- YS가 내년 대선에서 일정 부분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YS는 국가원로로서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괜히 정치에 관여했다가 잘못되면 더 안좋을 수 있습니다. 잘되더라도 관여 안 하시는게 좋다고 봅니다. 그냥 원로로서 누가 조언을 받으려고 오면 조언 해주는 정도여야 합니다. 대접 받는 어른이 되셔야 합니다."

 

ⓒ사진제공=송경숙

- 남편 되시는 분이 6·3 시위로 유명한 김중태 선생님이십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제 남편 김중태는 6·3 시위 주동자이고 당시 전국 대학생 총회장이었어요. 또 김영삼 대통령이 25세 때 신민당 정무위원이었는데 제 남편도 같은 정무위원이었어요.

우리 아저씨 말에 따르면 뭔 사고가 나면 김중태부터 잡아갔다고 해요. 남편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한 시대의 인물이 능력을 발휘 못한게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너무 냉정해요. 국회의원들이 말을 많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김중태를 기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요.

이제는 욕심을 다 버리고 우리는 부부라기 보다는 동지로서 살고 있어요. 최근에 '미륵불과 재림예수'라는 책을 쓰는 등 저작활동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김중태는 YS와 뜻이 안맞았는지 그 쪽으로 가지 않았어요."

- 송 부총장님은 친박(박근혜)계라고 알려져있습니다. 특별히 친박계가 된 이유가 있습니까?

"저는 지금 (서청원의) 청산회 활동을 하고 있는데, 청산회는 민추협과 민산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서청원이 민추협과 민산을 했으니까요. 서청원은 상도동 자식이라고 봐요. 서청원이 친박하니까 저도 친박을 하게 됐습니다. 서청원은 반듯한 인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친박이 됐는데 민산 여성 회원 중 친박은 저 하나일 것입니다."

"김중태, 능력 발휘 못해 너무나 안타까워"

- YS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부친인 고(故)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상도동 각하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더 이상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탄압 받은 1호가 제 남편 김중태입니다.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사형집행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면담을 했는데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했다고 해요.

또 김형욱이 '너도 경상도 놈인데 왜 각하와 함께 못하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김형욱이 여권도 없이 미국으로 보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또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6·3 시위 관계자들이 '니 마누라가 미쳤다. 남편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데를 왜 지지하냐'고 말했데요.

우리 아저씨는 '지가 좋아서 하는 걸 뭘 말리냐'고 말했다고 해요. 저 보고 사람들이 '미쳤다'고도 했어요. 그러면 '나는 모른다. 우리 동지(서청원)가 하니까 나도 한다'고 말했어요."

- 개인적 소신 없이 서청원 씨 때문에 친박계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는게 아닙니까?

"제가 박근혜 씨를 만나 보니 이 양반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퍼스트레이디로서 대통령 수업을 마쳤고 누구에게도 빚이 없기에 부담없이 깨끗하게 정치를 할 것 같아요. 박근혜 참 깨끗하고 원칙을 좋아해요. 아버지 짐이 딸에게 계속 딸려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박근혜가 시대의 빨래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 YS는 세종시 원안에 반대하셨습니다. 반면 박근혜 전 대표는 찬성했는데 송 부총장님은 어떤 입장입니까?

"저는 세종시 원안에 찬성합니다."     

-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언제입니까?

"YH 여공들이 신민당 마포 당사에 와서 농성을 할 때 입니다. 제가 그 걸 보고 너무 안됐다 생각해서 사과 한짝을 사갔는데 경찰이 그 걸 막고해서 난리가 났어요. 그 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고 종로 중구 여성 부장, 여성 위원장, 영등포 여성 위원장, 통일민주당 여성 부국장 등을 했어요. 지금 바람은 모든 것이 편하게 정치가 잘 됐으면 하는 겁니다."

담당업무 :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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