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은 나의 희생으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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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법은 나의 희생으로 끝내야 한다”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9.2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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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실교회의 구국기도회

#1.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여 그 비준을 막자고 영락교회에서 범기독교적으로 구국기도회를 할 때, 나는 기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개신교 교회로는 처음으로 신길교회에서 비준반대 구국기도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바 있다.

그들은 헌정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하고 불법단체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자의로 만든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면서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고 강압했다.
 
악법도 법.
이 말은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악법에 의해 사형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은 말도 안 된다며 다른 조치를 강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악법도 법이니 조용히 사형을 당하겠다” 고 말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말이다. 그 후 독재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진의도 헤아리지 않고 마치 자기들을 위해 있는 말로 악용해왔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지금부터 2000년 전, 제가 가롯 유다는 은화30에 사랑하는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팔아넘겼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재판을 받았다.
 
판관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확신하면서도 제사장과 장로들의 위세에 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고,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복음 23장 34절) 하고 저들의 무지를 깨우쳐주려 했고, 한마디 항변이나 변명도 없이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를 잡아 제사 지내고 잡아먹어라.
옛날 대만에 식인종이 우글거렸다. 식인종의 추장이 사람을 잡아 제사지내고 잡아먹는 것은 참으로 몹쓸 짓이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모두 옛날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풍습인데 이것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우겼다.
 
그래서 추장은 “오늘 밤에 붉은 모자에 붉은 망토를 입고 이 동네를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잡아먹어라” 하고 단단히 일렀다. 그날 밤, 정말 그 사람이 나타나자 불문곡직하고 그 사람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려고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니 바로 자기들이 존경하던 추장이 아닌가. 깜짝 놀란 식인종들은 그때부터 추장의 말대로 식인 악습을 없앴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님도, 대만 추장도 ‘악법은 나의 희생으로 끝내야 한다’ 는 참교훈을 자신의 죽음으로 가르쳐준 것인데, 자기가 저지르는 죄악을 죄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헛된 욕심을 채우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내려앉는 서글픔을 느낀다.

인도의 간디와 남아공의 만델라는 부당한 악법에 대항해 무저항으로 감옥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도 악법에 굴하지 않았다.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압박만 받던 인도는 간디가 주창한 무저항의 항거가 마침내 성공해서 고도의 민주적인 문화국민으로 거듭났고, 지금은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남아공은 만델라로 인해 흑백 인종이 한 가족처럼 새로운 민주적 문화를 창출해 아프리카 대륙의 선진 민주국가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정치와 경제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2. 사람답게 잘살자고 독립운동도 했고, 자유와 인권의 보장을 향유하면서 잘사는 민주정치를 하자고 민주화투쟁도 했다. 박정희는 소비가 미덕이 되는 풍요한 국가를 만드는 데 민주정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일 청구권 자금과 국가와 국민을 담보로 막대한 차관을 얻어다가 정당한 돈이든 부당한 돈이든 원 없이 한없이 돈을 써가며 18년 동안 정치 없는 통치 속에서 빚잔치로 국민과 자신을 속였다.

독재든 공산독재든 독재 하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고 반드시 망한다는 것을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쇠고기국에 쌀밥을 골고루 먹게 해준다고 속여 폐쇄된 공산독재 하에서 자유와 인권을 말살해 국민을 마치 동물처럼 주무르다가 이제는 굶어죽는 체제에 이르렀는데도 미안해하거나 반성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경제를 살려 잘 먹여준다는 구실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 또는 말살하기는 박정희도 김일성도 오십보백보다.

민주정치와 자유시장경제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한 덩어리로 투명하게 돌아가야 한다. 설사 경제가 생각보다 조금 늦게 성장한다고 해도 투명한 정치, 투명한 경제운영으로 정치경제가 한 덩어리의 문화로 발전해야 굴절 없는 굳건한 선진국가로 발돋움할 것이다.

박정희는 경제제일주의를 부르짖으며 36년 동안 온 국민이 빨린 소혈의 대가인 대일 청구권자금에서부터 겁 없이 국민을 담보로 빚을 내다가 신바람 나게 돈을 쓰며 빚잔치를 해서 국민소득을 87불에서 1644불로 키우고 경제규모를 세계 11위까지 올려놓았다.
 
부분적으로 경제를 살리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이 손에 떡고물을 너무 많이 묻혀 민주화가 되는 순간 줄줄이 묶여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해서 주변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그냥 갈 때까지 가자고 주저앉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미루어오던 중 일본식 유신을 선포하고 더욱 국민의 목을 죄다가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관권·금권·부정·불법 타락선거를 하고도 국민의 총투표수에서 공화당이 신민당보다 1.1%를 덜 얻음으로써 실질적인 불신임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라는 교섭단체까지 만들어 여당이 명목상 3분의 2이상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해놓고도 더욱 불안을 느껴, 오히려 김영삼 총재를 제거하기로 작심하고 총재직 박탈과 국회의원직 제명 사태까지 벌이다가 부마사태를 만났다.

박정희는 “강압만으로는 어렵다”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기왕 내친김에 탱크를 동원해 몇 만 명이라도 쓸어버리면 된다”고 주장하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틈바구니에서 차지철의 편을 들다가 10·26의 비운을 당한 것이다.
 
선거결과로 보나 당시의 국내 정세로 보나 18년 동안 쌓이고 쌓인 부정부패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무고하게 희생시켜 그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니 이쯤에서 정치를 그만두고 싶어도, 정말 자기 손으로 민주화를 해놓고 물러나고 싶어도, 그때는 이미 저질러 놓은 일들이 무성한 잡초로 변해서 내려갈 길을 막아 버렸다. 별도로 부를 119도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전두환의 제2의 쿠데타(12·12사태)
 
#3.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뒤 정치권은 새로운 민주헌법으로 개정해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는 한편, 군부에 빼앗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정상적인 선거절차를 거쳐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합법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바삐 움직였다.
 
그러다가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일파가 하극상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등을 비롯한 상관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실질적인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민당 당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고흥문 계보는 당직도 할애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다시 집을 짓고 있었다. 1980년 여름,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하고 김영삼 총재를 가택연금하는 한편 부정축재 등의 트집을 잡아 신민당 국회의원 대부분을 정치화법에 묶고 정치활동을 규제해 정치를 못하게 했다.

고흥문 의원도 그 가운데 포함되어 정치를 못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계보는 해체되었다. 그것으로 자연스럽게 고흥문 의원과의 정치적 인연은 끝이 났다.

신민당도 없어지고 계보도 없어진 상황에서 극소수의 신민당 의원과 원외정치인들을 규제에서 풀어 정치를 하도록 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규제에서 제외되어 정치를 해도 되는 쪽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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