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도 개편] 정당이해·개인선호·시대상황, 삼박자가 만들어낸 선거역사
[선거제도 개편] 정당이해·개인선호·시대상황, 삼박자가 만들어낸 선거역사
  • 조서영 기자
  • 승인 2019.08.06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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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 1988년 그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조서영 기자)

세상 모든 것에는 규칙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역할놀이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고, 6일 기준 100일 남은 2020년 수능을 포함한 각종 시험에도 정해진 방식이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는 4년의 미래가 결정되는 선거 방법이 있다.

각자에게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올 규칙의 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어린 아이들이 놀이 도중 울며 선생님을 찾는 것도, 수험생들이 교육부의 발표에 귀 기울이는 것도, 국회의원들이 불과 몇 달 전에 쇠지렛대를 들고 국회에 나타난 것도, 어쩌면 모두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규칙은 놀이의 우위와 열위, 각종 시험의 합격과 불합격, 선거의 당선과 낙선을 가르는 기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선거 방법을 둘러싼 갈등은 비단 2019년 제20대 국회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우리는 두 차례의 선거제도 변화와 한 차례의 반쪽짜리 변화 역사가 있다. 대한민국은 소선거구제에서 중선거구제로,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그리고 소선거구제에서 반쪽짜리 중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편 역사를 갖고 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여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88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편이다.

이번 여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88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편이다.ⓒ시사오늘 김유종
이번 여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88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편이다.ⓒ시사오늘 김유종

1988.02.08. 김영삼 총재직 사퇴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씁쓸함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야권(野圈)은 대선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한 번 부딪쳤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두 달 앞두고, 야권 통합과 당론 변경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2월 8일 오전,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기자회견을 통해 야권통합을 위한 총재직 사퇴를 선언했다. 이는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전당대회에서 내린 재신임 결과를 내놓으면서까지 내린 강수(強手)였다.

“야권의 신속한 단일화를 위해 나는 오늘 총재직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남아 백의종군하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하루속히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는 모든 민주세력이 대동단결하여 야당이 단일화하는 것입니다.”

한편 반대편에 있던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야권 통합에는 찬성하면서도, 이를 위해 중선거구제 철회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선거구제로 정면 승부를 펼쳐야 원내 제1당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나의 백의종군 선언은 지지부진하던 야권통합 논의에 불을 지폈다. 통합논의의 쟁점은 김대중의 평민당 총재직 사퇴와 소선거구제 도입 여부로 좁혀졌다. 민주당에서는 “김영삼 총재가 대국적인 차원에서 백의종군을 선언했으니, 김대중 총재도 당연히 총재직을 내놔야한다”는 주장을 했고, 평민당은 이에 맞서 통합을 전제로 민주당이 중·대선거구제 당론을 소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41-142

민주당과 김영삼 총재가 말하는 통합이라는 것이 사실은 평민당의 해체였다. 그것은 지난날 후보단일화 협상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중략) 나는 본래부터 소선거구제를 지지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선진국들은 거의가 소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양당제를 정착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고, 당시 여론 조사를 하면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민주당에 중선거구제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김영삼 씨가 조종하는 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민주당은 나를 겨냥해서 퇴진만을 요구했다. 언론, 특히 신문은 나의 퇴진을 부추겼다. 내가 퇴진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처럼 보도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p.538-542

1988.02.23. 양(兩) 김(金) 씨 첫 회동

양 김 씨는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첫 회동을 갖고, 야권 통합 협상을 재개하는 것에 합의 했다. 이날 회동 후 발표한 합의문에는 △민주당과 평민당이 소선거구제를 당론으로 확정해 관철한다 △진행 중인 재야신당 창당을 중지하고 야권대통합에 동참한다 △양당 통합 협상의 재개를 위해 통합추진위원회를 재가동한다는 3개항이 명시됐다.

합의문에 따르면 서로가 주장하던 야권 통합과 소선거구제 당론, 두 가지 쟁점에 합의한 듯했다. 하지만 각자의 자서전에는 두 사람의 미묘한 입장 차가 보였다.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민주당은 김대중의 통합의지가 불분명하다는 점(김대중이 사퇴를 하지 않았다는 점)과 소선거구제가 도리어 총선에 유리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선통합(先統合) 후당론(後黨論)변경을 주장했다. 

2월 21일 민주당의 야권통합 협상기구 대표들이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나는 나의 총재직 사퇴에도 불구하고 통합협상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통합의 진전을 위해 2월 23일 오전 마포 가든호텔에서 김대중을 만나 그의 주장인 소선거구제를 수용해 주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41-142

반면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평민당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야권 통합이란 평민당 해체라고 보며, 김영삼은 노태우가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만나 민정당이 추진하는 유신 시대의 유물인 중선거구제에 합의했다고 봤다. 따라서 평민당의 입장은 선당론(先黨論)변경 후통합(後統合)이었다.

민주당은 나를 겨냥해서 퇴진만을 요구했다. 언론, 특히 신문은 나의 퇴진을 부추겼다. 내가 퇴진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것처럼 보도했다. 또한 내가 퇴진하지 않으면 평민당은 금방 내분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작문성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p.540-541

1988.03.01. 평민당의 공동대표제 요구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은 또 한 번의 갈등에 부딪쳤다. 이번엔 김영삼은 김대중의 2선 후퇴를, 김대중은 두 김 씨 공동대표제를 내세웠다.

평민당 안동선 대변인은 “통합신당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합의했다”며 “이는 총선에서의 협력뿐 아니라 총선을 치를 때까지 당의 모든 운영에 대해 똑같이 책임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안 대변인은 2.23 첫 회동 직후 김대중에게 직접 들은 얘기라며 두 김 씨 공동대표제를 언급했다.

당시 나의 소선거구제 수용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또다시 총재직 사퇴 대신 통합야당의 양김 공동대표제를 요구, 통합협상은 금방 벽에 부딪혔다. 김대중은 자신의 주장에 나를 끌어들여 총재직에 연연한다는 비판을 나와 나누어 가지려 했다. 나는 평민당과의 통합 협상을 포기했다.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42-143

1988.03.03. 공동대표제 요구 철회

그러다 3월 3일, 김대중은 공동대표제에 대한 당론 철회 의사를 밝혔다.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선 김영삼 씨와 내가 책임을 지고 당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선거구제 실현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통합과 소선거구제 관철을 위해 당론을 변경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민주당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동대표제를 철회했으나 소선거구제는 더 이상 양보할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3월 3일, 공동대표제 요구를 공식으로 철회했다. 

(중략) 하지만 민주당 측에서는 어떤 전제 조건도 배격하며, 나더러 무조건 제2선으로 후퇴하라고 요구했다. 김태룡 민주당 대변인은 한 술 더 떴다.

“통합 신당의 지도 체제는 단일 지도 체제로서 당세가 강한 민주당 측이 대표가 돼야 한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p.539-542

1988.03.08. 소선거구제 선거법 개정안 본회의 통과

앞서 3월 7일 오전 10시경, 민주정의당은 국회 내무위를 소집해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개의 5분 만에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그 과정에서 여야 의원 간에 위원장 석에 있는 의사봉과 마이크를 빼앗는 등의 몸싸움이 있었다. 결국 전병우 내무위원장은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이후 3월 8일 새벽 2시, 여전히 여야 의원들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민정당이 제출한 전면소선거구제 선거법 개정안이 전격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본래 7일 오후 10시경 처리하려 했지만, 야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해 미뤄졌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 없습니다.”

장성만 국회 부의장의 공허한 질문과 여당 의원들만의 답변, 그리고 야당 의원들의 고함 소리가 뒤엉킨 채 소선거구제 가결이 선포됐다.

민주당은 여전히 중선거구제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낙선이 두려워 동반 당선을 바라는 상당수의 후보자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러자 보다 못한 민정당이 국민의 뜻이라며 소선거구제를 들고 나왔다. 민심을 판독하고 민의를 선점하려는 포석이었다. 3월 8일 소선거구제를 골격으로 국회의원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p.541-542

민주당은 1월6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김영삼 총재를 재신임했고, 평민당은 국회의원 선거구를 소선거구제로 하는 당론을 확정지었다. 여야는 제139회 임시국회를 2월10일 열어 선거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선거구제는 소선거구제로 의견이 모아져 갔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上권 p.405

1988.03.17. 김대중 총재직 사퇴

3월 10일, 이미 한 차례 김대중은 민주당의 2선 후퇴를 정면 거부해 난항이 계속됐다. 이에 민주당은 한겨례민주당과의 2차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김대중은 돌연 총재직 사퇴 의사를 밝힌다. 

“야권 통합을 위해 선(先) 사퇴를 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총재직 사퇴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3자 통합 후 2선 후퇴를 고집한 것은 책임지고 통합을 성사시키기 위함은 물론이고, 공작정치에 의해 본인을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음모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통합 상대측은 선 사퇴 없이는 통합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주장하고 있어 사퇴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틀 뒤인 3월 19일, 3자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갈등이 발생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총재직 사퇴 후 2자 통합에서 평민당을 포함한 3자 통합 협상을 진행하는 장소에 김대중 대신 괴청년들이 왔다고 서술했다. 그는 김대중에게 최종안을 결재 받으러 간 협상 대표 대신 괴청년의 폭력사태가 판을 깼다고 봤다.

민주당은 3월 들어 재야세력이 만든 한겨레민주당과 2차 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민주당과 한겨레민주당의 통합논의는 급진전돼 3월 16일 당명을 ‘우리민주당’으로 정하는 등 통합선언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날 오전 김대중이 돌연 총재직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통합논의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김대중은 민주당과 한겨레민주당 통합을 막기 위해 총재직을 내던졌다. 

이에 민주당·평민당·한겨레민주당 협상대표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막판 3자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3월 19일, 예상외의 폭력 사태로 통합은 완전히 무산됐다. 통합협상에 최종적으로 도장을 찍기로 한 시각, 서교호텔 주변에는 대낮부터 괴청년들이 북적거렸다. 게다가 최종안을 들고 김대중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평민당 협상대표는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장소를 옮기려던 민주당 협상대표들에게 괴청년들이 달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졌다. 

나의 총재직 사퇴로 불을 당신 총선 전 야권통합 논의는 김대중의 총재직 사퇴까지는 이끌어 냈으나, 폭력사태로 결국 판이 깨지고야 말았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42-143

반면 김대중의 입장은 달랐다. 김대중은 협상 대표들이 만나 의견을 조정했음에도 협상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에 당원들과 학생들이 성의 있는 협상을 촉구하기 위해 시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주당이 기다렸다는 듯 협상을 중단했다며, 민주당에 책임이 있다고 봤다.

3월 17일, 나는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이제는 통합 논의를 재개하자고 촉구했다. 그토록 민주당이 원했던 것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민주당이 선 부분 통합, 후 평민당 합류를 주장했다. 양당은 통합 협상 대표들이 만나 의견을 조정했지만 협상은 계속 겉돌았다. 그러다가 학생과 당원들이 협상 장소로 몰려가 민주당의 성의 있는 협상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통합 협상 중단을 선언해 버렸다. 돌이켜보면 민주당은 애당초 진정한 통합에는 뜻이 없었다. 그저 의원들을 빼 가고 당 전체를 흔들어 평민당을 와해시키고 나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 했음이 분명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p.542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제3자의 시각은 어땠을까.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두 김 씨를 가까이에서 보면 ‘찬 기운이 느껴질 만큼 냉랭했다’고 평가했다.

김영삼·김대중 양김 씨의 불신과 앙금은 깊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악수를 하더라도 손을 꼭 쥐는 법이 없었다. 그냥 잡는 둥 마는 둥 손바닥을 살짝 갖다 대는 정도였다. 악수라는 게 꼭 쥐면서 스킨십을 해야 친밀감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두 사람은 그러길 싫어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찬 기운이 느껴질 만큼 냉랭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p.141

1988.04.26. 제13대 총선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 후 치른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이 125석으로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150석) 확보에 실패했다.ⓒ국회보 201405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 후 치른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이 125석으로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150석) 확보에 실패했다.ⓒ국회보 201405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 후 치른 제13대 총선 결과 민주정의당이 125석으로 목표했던 과반수 의석(150석) 확보에 실패했다. 반면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을 획득하며,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다. 이에 대한 평민당과 민주당의 반응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17년 만에 부활된 소선거구제 총선은 예전에 비해서는 부정행위가 많이 줄었다. 4·26 총선에서 우리 평민당은 70석을 얻었다. 지역구에서 54석, 전국구에서는 16석을 차지했다. 나도 당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국민들이 다시 내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중략) 이로써 우리 평민당은 제1야당으로 발돋움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p.543

인구비례를 감안하지 않고 기형적으로 급조된 잘못된 선거구제가 낳은 결과였다. 더욱이 통일민주당은 전국의 각 선거구에서 고루 득표함으로써 고른 지지기반을 가진 정당임을 입증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43-144

정당이해·개인선호·시대상황, 삼박자가 만들어낸 선거역사

대한민국은 소선거구제에서 중선거구제로,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그리고 소선거구제에서 반쪽짜리 중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편 역사를 갖고 있다.ⓒ시사오늘 그래픽=박지연 기자
대한민국은 소선거구제에서 중선거구제로,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그리고 소선거구제에서 반쪽짜리 중선거구제로의 선거제도 개편 역사를 갖고 있다.ⓒ시사오늘 그래픽=박지연 기자

해방 후 국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우리나라는, 1972년 10월 유신을 계기로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1988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지금의 소선거구제에 정착했다. 하지만 2005년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필두로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중선거구제에 대한 목소리가 있었지만,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기초의원 선거에 한해 중선거구제가 도입된 상태다.

선거구를 기준으로 선거제도를 구분하면 크게 소선거구제와 대선거구제로 나뉜다. 소선거구제란 한 선거구에서 1인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제도로, 군소정당의 난립을 방지해 정국안정을 도모할 수 있지만 선거가 과열되고 사표가 많이 발생한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 대선거구제란 한 선거구에서 2인 이상의 당선자를 선출하는 선거제도로, 그 중에서도 2인에서 5인을 선출하는 제도를 중선거구제라고 한다. 중선거구제는 소선거구제에서 문제가 되는 사표문제와 소수대표가 가능해 비합리적 요소에 의한 당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정국이 불안정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처럼 두 제도는 분명한 장·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선거제도의 변화는 그 시대상황, 정당의 이해관계, 그리고 선호하는 의원들의 목소리, 이 모든 삼박자가 맞았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6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선거법 개정에는 정당 차원의 이해관계도 있지만 의원 개인 간의 선호도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며 “동시에 시대적 상황에 좌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강 대표는 “중선거구제는 지역 색을 뺀다는 의미가 크며, 여야를 떠나 지명도가 있는 다선(多選) 의원은 선호하는 제도”라며 “반면 한 선거구에서 2-3명을 뽑기 때문에 선거비용이 많이 들며, 지역구가 넓어져 관리하기에 부담스럽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정당 내에서는 후보를 1명 낼 것인가 여러 명 낼 것인가를 두고 정당 내 계파 갈등이 발생할 수 있으며, 같은 당 후보가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하며 내분을 조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독재 유신 시절에는 안정된 의석 확보가 가능한 중선거구제를 택하는 것이 정권 유지에 도움 됐을 것”이라며 2019년 최근 선거법 개정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소선거구제로 가면서 지역주의 타파의 장점을 가진 중선거구제를 보완하기 위해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대통령제를 도입한 대표 국가인 미국과 의원내각제를 택한 영국은 모두 소선거구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참고할만하다”고 덧붙였다.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행복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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