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김대중(DJ)을 생각한다…“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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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김대중(DJ)을 생각한다…“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1.08.1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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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후광(後光) 김대중 서거 2주기…“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이자 산 증인”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최신형 기자]

18일 후광(後光)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를 맞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DJ의 정치역정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 그 자체였다. 

지난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난 DJ는 하의 초등학교, 목포제일보통학교(현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1945년 목포상선회사를 시작으로, 전남선박 목포조합장, 대양조선 사장 등을 거치면서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사업가로 명성을 날리던 DJ는 1956년 장면 박사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하며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은 평탄치 않았다. 1961년 세 번째 도전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DJ는 제6대 국회의원(1963년) 선거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 6대 국회 당시 본회의 최장인 5시간 19분 발언은 한국 의회 사상 최장시간의 연설로 기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6대 국회 개원 초기 본회의 13차례 발언 기록을 세운 DJ는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1969년 3선 개헌 등으로 본격적인 민주주의 탄압을 시도하자 이듬해 DJ는 김영삼(YS), 이철승 등과 함께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선다. 이때 등장한 것이 ‘40대 기수론’이다. 당시 1차 투표에서 YS에 밀려 2위에 그친 DJ는 결선투표에서 이철승과의 연합을 통해 YS를 누르고 신민당 대통령후보에 지명됐다.

DJ는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폭로하고 ‘미일중소’의 4대국 안전보장 안을 제안하는 등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DJ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40만 표를 얻으며 635만 표를 획득한 박정희에게 석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DJ는 사실상 박정희의 최대 정적(政敵)이 됐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도 날로 더해갔다.

일본 망명 중이던 1973년 DJ는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 요원들에게 납치돼 바다에 수장당할 위기에 처했고, 이후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참여,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등을 주도한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는 등 군사정권 내내 석방과 연금을 되풀이했다.

▲ 지난 16일 이희호 여사가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김대중 연보'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뉴시스

DJ, 민주주의 향한 열정

1979년 10·26 사태 이후 DJ는 연금해제 및 사면복권 조치를 받았지만, 이듬해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DJ에게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미국 등 세계 각국은 DJ의 석방을 요구하며 신군부를 압박했고, 신군부는 국내외 여론에 밀려 DJ에게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또다시 20년형으로 감형을 내렸다.

석방 직후 미국 망명길에 오른 DJ는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2년 뒤인 1987년 DJ 등 민주화 세력은 신군부로부터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YS와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DJ는 4자필승론을 들고 나오며 평화민주당을 창당, 그해 대선에서 노태우-YS에 이어 3위에 그치고 만다. 이는 민주세력의 분열, 지역구도 고착의 원흉이 됐다는 평가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DJ의 평화민주당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제1야당을 부상했고 2년 뒤 YS가 노태우 김종필(JP)등과 함께 3당 합당을 선언, DJ는 야당의 유일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DJ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나선 YS에게 약 190만 표 차이로 패했고, 전격적인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영국 케임브리지로 떠났다.

1995년 정계은퇴 약속을 번복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DJ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며 역사상 첫 수평적 권력교체를 이뤘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DJ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고 임기 내 외환위기 졸업,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펼치면서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실시한 인위적인 경기부양으로 인해 부동산, 카드 등의 거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보스중심의 정당구조, 계파 파벌 중심, 지역주의에 기댄 정치는 그의 한계이자 시대의 한계로 남고 있다.

한편 여야는 DJ 서거 2주기를 맞아 일제히 논평을 내며 추모했다.

김기현 한나라당 대변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소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졌고, 국회 내 성숙한 토론과 소통을 신념처럼 여겼다”며 “선진국회를 지향하는 우리 정치도 여야 간 소통을 가로막는 토론 거부와 폭력을 근절하자”고 말했다.

이용섭 민주당 대변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온몸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한 민주주의의 화신이었으며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였다”며 “후퇴한 민주주의와 파탄난 민생경제, 대립과 반목에서 벗어나 이 땅의 행동하는 양심들과 함께 또다시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쓰기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민주주의-남북관계-서민경제 위기 등 3대 위기를 초래한 이명박 정권을 반드시 심판하라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간절한 유지를 우리는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며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바라는 모든 세력과 연대해 2012년을 완전한 승리의 한 해로 만들겠다”고 전했다.

국민참여당 공보실도 이날 논평을 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먼저 행동하고 실천하며 목숨을 위협하던 이들을 용서하는 등 흩어져 있던 이들을 하나로 모았다”며 “그를 위해 야권은 반드시 통합해야 한다. 우리 모두 각자 야권통합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손을 먼저 내미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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