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딸아이와 함께 오른 설악산 대청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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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딸아이와 함께 오른 설악산 대청봉
  •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 승인 2019.08.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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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山戰酒戰〉 戊癸合의 아름다움이 만들어준 행복한 추억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대청봉에서 공룡능선 쪽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대청봉에서 공룡능선 쪽으로 바라본 모습 ⓒ 최기영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 파는 색시 같고, 설악산은 깊은 골에 숨어 범접하기 힘든 미녀 같다.'

육당 최남선의 표현이다. 당시 금강산의 명성에 가려져 있던 설악산을 그는 더욱 아름답고 고결하게 평가한 듯하다. 하지만 철조망에 가로막혀 금강산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지금, 설악은 오히려 금강보다 더 큰 길가에 나앉게 됐다. 그만큼 설악산은 북녘의 금강산을 가장 많이 닮아 남쪽의 피 끓는 산악인들과 가객(歌客)들이 가장 즐겨 찾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 중 하나가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나뉘어 있을 때 설악산은 북한의 땅이었다. 금강산을 빼앗기 위해 북진하던 우리 국군은 설악산에 당도하자 여기가 그만 금강산인 줄 알고 북진을 멈춰버렸다. 물론 우스갯소리겠지만 만약 금강산과 설악산이 모두 북녘에 갇힌 채 전쟁이 끝나버렸다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다.  

딸아이는 고교 시절 첫 방학을 맞았지만, 학원이다 뭐다 여전히 바쁘다. 주말에도 학원 수업이 있다길래, 요즘 애들 말로 '학원 째고 함께 설악산에 가자'고 꼬드겼다. 그렇게 우리 부녀는 짐을 챙겨 토요일 새벽 설악산으로 향했다. 

첩첩이 바위로만 쌓여 있는 산세,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성한 숲, 그리고 그것들과 어우러진 운무! 설악산은 너무도 아름답다. 그러나 설악산을 오르기는 결코 만만치 않다. 또한 샘물이 없고 대피소마저 드물어 뜨거운 여름철 설악산 등산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설악산 어느 코스를 선택하든 물과 간식을 충분하게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한계령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너무 오랜만의 등산인 데다, 공부한답시고 운동이 부족했던 딸아이는 설악산의 가파른 바윗길을 힘들어하며 아빠를 몹시도 원망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경치가 끝내준다며 어르고 달래며 아이와 함께 그렇게 험난한 설악의 길을 걸었다.

끝청에 이르자 설악산 서북능선과 운무가 어우러진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과 구름이 합을 이루어 만들어낸 장관이다 ⓒ 최기영
끝청에 이르자 설악산 서북능선과 운무가 어우러진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과 구름이 합을 이루어 만들어낸 장관이다 ⓒ 최기영

귀때기청으로 가는 길과 대청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한계령 삼거리에서 끝청까지가 이날 코스의 하이라이트다. 무덥고 습한 여름날, 땀을 있는 대로 쏟아내며 드디어 끝청에 도착했다. 그리고 설악산 서북능선과 어우러진 운무가 광활하게 펼쳐지자 아이는 "와~~"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거기에서 1시간여를 더 걸어올라 목적지인 설악산 대청봉(1708m)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낮에는 그리도 뜨겁더니 대청봉의 바람은 마냥 시원하기만 했다. 대청봉 저 아래에는 그 유명한 공룡 능선의 봉우리들이 운무에 뒤덮여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 딸아이도 난생처음 그렇게 설악산을 품고 있었다.  

드디어 대청봉에 도착했다. 운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설악산 대청봉의 정상 표지석 ⓒ 최기영
드디어 대청봉에 도착했다. 운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설악산 대청봉의 정상 표지석 ⓒ 최기영

우리는 대청봉을 내려와 중청대피소에서 여정을 풀고 저녁을 먹었다. 즉석밥에 딸아이가 좋아하는 차돌박이를 가방에서 꺼내어 굽기 시작했다. 며칠을 굶은 듯 맛있게 음식을 먹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딸아이와의 즐거운 만찬을 끝내고 밤 9시 대피소의 소등과 함께 잠이 들었다. 

대피소의 새벽은 전장의 막사처럼 늘 긴장감이 가득하다. 해돋이를 보거나 공룡능선을 걷기 위한 산꾼들이 일찌감치 짐을 챙기며 산행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씻지도 못하고 좁은 공간에 사람들과 뒤엉켜 자고 있는 데다, 새벽 일찍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나는 천불동계곡 쪽으로 여유 있게 하산하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아침 6시가 되어서야 아이를 깨웠다. 잠에서 깬 아이는 주위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냐고 물었다. 새벽 그 난리 통에도 세상모르게 잠을 잔 뒤 딸아이는 그렇게 설악산의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라면과 즉석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다시 산길을 걸어 하산을 해야 한다. 중청을 떠나기 전, 포스 넘치는 모습으로 발아래에 보이는 설악의 풍경을 딸아이가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있길래, 다시 저 험한 바윗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심난한 건지, 아니면 설악의 자태에 잠시 취했던 것인지를 묻자 딸아이는 "둘 다~" 라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소청과 희운각을 거쳐 아름다운 천불동계곡을 도란도란 내려왔다. 

산을 다 내려와 딸아이에게 이번 산행 중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산은 너무 힘들었는데 대청봉에서 본 구름이 정말 예뻤다'고 아이는 말했다. 

중청을 떠나기 전, 딸아이가 설악의 풍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다. 제법 산악인의 포스가 느껴진다 ⓒ 최기영
중청을 떠나기 전, 딸아이가 설악의 풍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고 있다. 제법 산악인의 포스가 느껴진다 ⓒ 최기영

사주에 합(合)이 들었다거나 안들었다 라는 식의 풀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주에서 말하는 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같은 오행끼리 모여 세력이 더욱 커지는 합이 있고, 또 하나는 전혀 다른 오행이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는 합이다. 같은 것들끼리 뭉치는 합은 패거리다. 뭔가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합이 사주에 많으면 해석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오행이 합을 이루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합은 아름다움과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토(土)와 수(水)가 만나 화(火)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무계합(戊癸合)이라고 한다. 바로 산과 구름의 합이다. 산과 구름이 어우러지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불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장관이다.

딸아이가 가장 예뻤다고 말하는 구름은 분명 산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만 만들어지는 거대한 화염(火焰)같은 모습일 것이다. 

아이는 피곤했는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하게 잠을 잤다. 휴가철 주말 꽉 막혔던 도로도 그 소란스럽던 대피소의 새벽도 아이의 기억엔 없다. 그렇지만 설악산과 구름이 합을 이루어 만들어냈던 그 아름다움 그리고 아빠와 함께 했던 시간만은 오롯이 딸아이의 행복한 추억으로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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