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한국교회>함석헌, 교회를 비판하지만 부정한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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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한국교회>함석헌, 교회를 비판하지만 부정한 적 없다
  • 심의석 자유기고가
  • 승인 2011.08.1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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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프롤로그-5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심의석 자유기고가)

그러나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님을 얼마 안 가서 깨달았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어떤 의미로 보면 신학의 역사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기독교사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도 신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 그래야 기독교사상의 변천과정을 숙지하고 그 틀 위에서 함석헌의 사상을 비교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일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집필하는 일을 중단했다. 함석헌과 가까운 신학자나 목사들이 많으니 그들이 조만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의도했고 기대하는 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함석헌의 사후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일별하는 책은 몇 권 나왔다. 김용준 교수가 엮거나 지은 <나의 스승 함석헌>, <내가 본 함석헌>, 노명식 교수가 엮은 <함석헌 다시 읽기>, 김성수 박사가 지은<함석헌 평전> 등이다. 그러나 이들 책은 함석헌의 기독교사상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 아마 그들도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 좌측 아래 함석헌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사)함석헌 기념사업회

그러면 왜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함석헌의 신학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까? 서울신학대학교의 최인식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01년 11·12월호에 쓴 논문 ‘함석헌의 교회관’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특히 그의 교회관은 신학계 내에서 함석헌의 사상을 신학적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하는 큰 원인으로 여겨질 만큼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그의 사상과 생애가 한국 민족과 교회에 적지 아니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함에 어려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을 신학계 내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의 교회관의 문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신학’이 주축이 되어 있는데 반하여 함석헌의 교회관 기조(基調)에는 소위 ‘무교회’ 사상이 뿌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고 산물이므로 교회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사상은 신학 자체의 존재의의를 파괴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되기에 그렇다.”

최 교수는 이 글에서 한국 신학계가 함석헌의 사상을 논의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조심스러운 말투지만 분명하게 밝힌다. 지나가는 말처럼 하지만 신학교수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이긴 해도 진지하게 논의 된 후에 내린 결론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함석헌의 교회관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함석헌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기피하는 한국 신학계의 기류를 알면서도 이 글을 쓴 그의 용단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신학계가 함석헌을 다루지 않는 이유가 그의 진단대로 함석헌의 부정적 교회관에 있다면 그들은 함석헌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함석헌은 교회를 비판은 하지마는 교회를 부정한 일은 없다. 또 그들은 함석헌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그가 ‘무교회’ 신앙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함석헌은 그런 교파적인 좁은 소견으로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교회가 제 자리를 찾기 원하는 충정으로 비판한다. 그는 욕을 먹으면서도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기독교를 사랑하고 기독교에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비판하는 함석헌의 사상은 신학 자체의 존재의의를 파괴할 위험성이 있다고 본다는데 그의 비판은 오히려 신학의 존재의의를 제대로 들어내려는 데 있다. 

 나는 그의 기독교에 대한 애정에 대하여 증거도 댈 수 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1977년 1월호에 발표한 ‘한국기독교의 오늘날 설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로서 이 시기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하여서 기독교가 다시 역사의 무대에 정면으로 나오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매년 연중행사같이 한다’는 비웃음을 듣는 학생데모에 기독교의 이름이 정식으로 오르게 된 것이 민청(학련) 사건에서요, 그로 인해서 생긴 것이 목요기도회요, 그 결과로 뜻밖에 얻어진 곳이 가톨릭·개신교의 연합의 시작이요, 그 연합운동을 하다가 누구도 뜻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터져 나온 것이 3·1민주구국선언인데, 이제 와 보면 놀랍게도 높이 세계의 눈이 모이는 무대 위에서 놀고 있는 우리가 되었다. 거기서는 지금 해방신학에서 한 걸음을 또 나가 기쁨의 신학, 사건의 신학 소리가 나오고 있다. 연극을 하는 자신들이 보다 큰 엄청난 극을 보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제 선 자리를 아는가, 모르는가?”

 함석헌은 1970년 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민중신학과 민권운동에 세계의 눈이 쏠려있는 현상에 감격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제 선 자리를 아는가, 모르는가?”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도 함석헌이 그의 ‘무교회’ 신앙 때문에 교회를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때 함석헌은 “한국교회의 상속권은 소수의 신신학(新神學)파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결론으로는 한국교회가 화(和)를 이룰 수 있기를 다음과 같이 간구한다. 그런데도 그가 교회를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보수하지만 고집으로는 말라!
 싸우지만 미워함으로는 말라!
 인생의 종교지만 역사의 구원 없이는 개인 구원 없다.
 역사의 종교지만 덕 없이는 진보 없다.”

 원래 비판은 대안을 품는 법이다. 함석헌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그 안에 교회가 거듭 나는 대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의 교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인간 중심의 교회에서 성령 중심의 교회로 태어나는 비결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기독교의 대속교리를 비판하는 것은 그 안에 구원은 자속(自贖)의 경지까지 가야 완성되는 이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교회의 외형적 양적 성장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 안에 교회의 내면적 질적 성장정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을 교회는 자성과 신생의 기회로 삼을 일이지 비난과 부정으로 대할 일이 아니다. 이 분명한 이치를 학문에 조예가 깊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을 교회 부정이라고 혹평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저의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함석헌의 말이 틀렸다고 확신하고 그를 무시하는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함석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가는 괜히 평지풍파를 일으켜서 현재 자신이 확보한 신학적 지위마저 잃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로 자는 사람은 깨울 수 있지만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 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

만일 그들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에게 그런 저의가 있다면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함석헌의 사상에 대하여 발언하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이것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가 이 글을 쓰겠다고 다시 용기를 낸 이유다. 이번에는 함석헌의 속죄론을 다루는 <대속이냐 자속이냐(함석헌과 한국교회)>만 먼저 쓴다.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신화의 옷을 벗은 예수>와 <새 시대의 종교>에 대해서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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