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스포츠가 된 반일운동, 심판은 누가 보나요?
[취재일기] 스포츠가 된 반일운동, 심판은 누가 보나요?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8.13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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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가 되어버린 반일운동… 금메달리스트를 소망하는 사람들
한술 더 뜨는 민주당, 왜곡하는 한국당… "경기 심판이 없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의병, 죽창가, 토착왜구. 이런 민족주의적 단어들이 주류로 등장한 2019년 여름. 시민들의 반일(反日)감정은 폭염만큼이나 뜨겁다. 전국은 이미 반일이라는 종목의 거대한 스포츠 경기를 시작한 분위기다. ⓒ시사오늘 김유종
의병, 죽창가, 토착왜구. 이런 민족주의적 단어들이 주류로 등장한 2019년 여름. 시민들의 반일(反日)감정은 폭염만큼이나 뜨겁다. 전국은 이미 반일이라는 종목의 거대한 스포츠 경기를 시작한 분위기다. ⓒ시사오늘 김유종

“저 분 아까부터 저러고 계세요. 한 10분 넘었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지난 5일 오후, 한 중년 남성이 A백화점 식품관 수입맥주 코너 앞을 서성이다 발걸음을 멈췄다. 이 남성은 일본 맥주가 쌓여있는 가판대 앞에서 주변 눈치를 살피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발을 돌렸다. 

지켜보던 판매직원 김 씨는 이는 비단 개인의 일이 아니라고 귀띔했다.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눈치 보는 상황이 늘었다는 것이다.

“일본 맥주는 이제 진열도 안 돼요. 전화로 일제 상품 진열했다고 직원들에게 뭐라고 하는 손님들도 있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매출이 잘 나오는 일본 상품은 눈치껏 후방에 잘 안보이도록 진열해서 팔고 있어요. 사는 사람은 또 조용히 몰래 사가고요.”

지난 1일 SNS에서는 한 영상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강남터미널 유니클로 앞에 서서 매장에 들어가는 고객의 숫자를 세며 총 인원을 감시하는 영상이었다. “자꾸 유니클로만 지나가면 고객 숫자를 카운트 한다”고 말한 이 누리꾼은 스스로를 왜구에 맞선 ‘의병’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유튜브 등 동영상 사이트에서 뷰티 장르의 콘텐츠를 업로드 하는 ‘뷰티 크리에이터’들도 시류를 피할 수 없었다. “일본 화장품은 여러분께 소개하지 않겠다”는 불매 선언으로 칭찬받는 유튜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유튜브 이름에 ‘모찌(찹쌀떡을 뜻하는 일본어)’가 들어가 있어 “시국이 이런데 일본어를 써야겠느냐”는 비판을 받고 이름을 수정한 경우도 있었다. 수정 후 “진정한 애국자”라고 박수 받은 그는 과연 그 칭찬에 만족했을까.

한 연예인은 혐한(嫌韓)을 주도하는 일본 기업의 제품을 광고한다는 이유로 인터넷상에서 테러를 당했고, 한 일본 출신 가수는 한국 데뷔가 미뤄져야만 했다. 

의병, 죽창가, 토착왜구. 이런 민족주의적 단어들이 주류로 등장한 2019년 여름. 시민들의 반일(反日)감정은 폭염만큼이나 뜨겁다. 

지난 9일 만난 신촌에 위치한 일본 생활용품 전문점 무인양품 앞에서 만난 30대 조 씨는 기자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이렇게 답했다. 

“지금 국가대항 한일전 축구시합을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위안부(일본군 성노예)나 역사교과서 일을 생각하면 일본이 밉고, 이번 사건(화이트리스트 배제)은 일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죠. 그래도 일본 물건을 사는 건 그 정도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기 들어온 걸 비판하는 사회 분위기가 때문에, 오히려 불매 운동이 더 유난스럽게 느껴지고 싫어집니다.”

들끓는 개인의 감정은 개인의 것이다. 누구도 인간의 마음을 절대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다만 불관용(不寬容)에 대한 관용을 허용할 수 없듯, 한 집단의 반일 운동이 누군가의 행위를 통제하려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앞선 시민의 말처럼, 전국은 이미 반일이라는 종목의 거대한 스포츠 경기를 시작한 분위기다. 

너도나도 금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해 더 높은 난이도의 액션을 취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일본 관련 제품을 구매하는 시민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도 일상이 됐다. 얼마 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일식당에서 사케를 마셨다는 이유로 과도한 비판을 받은 사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반일 스포츠에서 심판을 자처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분위기다.ⓒ뉴시스
반일 스포츠에서 심판을 자처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분위기다.ⓒ뉴시스

스포츠가 된 반일운동… 문제는 심판이 없다

스포츠는 ‘민족주의 표출의 장’으로 쉽게 변모한다. 스포츠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스포츠학에서는 스포츠를 “전쟁 다음으로 강렬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촉매제”라고 분석한다. 승패 결과에 국민들이 지나치게 일희일비하고, 이를 중계하고 보도하는 미디어 역시 호전적이고 자극적인 문구를 사용하여 민족주의를 통한 자신들의 민족성의 우월감과 국가정체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한다는 측면에서다.

다만 스포츠 경기에는 지나친 승부에 대한 집착 및 열기를 ‘쿨 다운(Cool down)’시키는 심판이 있다. 심판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승부가 가려질 수 있도록, 경기를 안전하고 원활하게 진행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반일 스포츠에서 심판을 자처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한술 더 뜨는 분위기다.

민주당 최재성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위원장은 지난 5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본 여행금지구역을 사실상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같은 당 서양호 서울 중구청장은 명동 일대에 일본 반대 현수막을 무더기로 내걸었다가 국민의 빈축을 샀다.

문재인 정부도 다르지 않다. 산업부는 지난주 공식 SNS에 “우리는 IMF 외환위기 때 결혼반지, 돌반지 팔아 단시간 내에 외채를 갚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국민”이라고 애국심을 잔뜩 고취시키면서 “일본 조치, 이겨낼 수 있다”는 문구를 덧붙였다. 이는 누리꾼들에게 “금모으기 운동처럼 국민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거냐”는 ‘몰매’를 맞고 금방 삭제됐지만, 정부의 기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그렇다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한국당 정미경 최고위원은 13일 오전 “한일갈등은 문재인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발언으로 다시 ‘막말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당 지도부는 일본에 대해 수위 높은 비판을 하는 조국 전 수석이나 몇몇 여권 정치인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은 있지만, 국민들의 ‘반일 운동’에 대해선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바른미래당의 한 관계자는 13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한국당도 잘한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지금 생산적인 논의가 진행이 안 된다고요. 정치가 계속 감정적으로,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 부흥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친일당 될까봐 총선에서 표 잃을까봐 국민들을 향해 자제하라는 말을 하질 않아요. 그저 국면 바꿔보겠다고 '조국 색깔론'이나 내세우고 있고, 왜곡된 정보(자작극)로 민주당 폄훼나 하고 있잖아요.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가 친일, 반일로 국민들을 반으로 가른다고 비판하는데, 그런 본인들은 떳떳한지 되돌아보길 바랍니다.”

한쪽에선 ‘노 제팬’ 현수막과 함께 일본제 볼펜을 한데 모아 깨뜨리는 퍼포먼스가 박수받고, 또 다른 한쪽에선 식민 사관이 담긴 책이 찬양받으며 "아베 수상님 사죄드립니다"가 호응받는 2019년 여름. 마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돌아간 듯하다.

한국 국가대표팀이 이기는 것은 곧 한국이 이기는 것이라는 사고 메커니즘은, 늘상 스포츠의 ‘과잉 열기’ 폐해로 지적된다. 한일전에서 한국 선수들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과 책임으로 짓눌린다. 나아가 경기장 안에선 나라를 등에 업은 민족투사가 된다.

이같은 과도한 심리적 압박이 국민들에게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현실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경제적 극일(克日)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우선 순위로 극복해야 할 것은 반일의 스포츠화(化)와 심판의 부재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더불어민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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