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청구권 협정] "근대화를 위한 선택" vs "제2의 을사보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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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청구권 협정] "근대화를 위한 선택" vs "제2의 을사보호조약"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8.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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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본 정치史>1965년 그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눈으로 본 한일관계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조서영 기자]

〈시사오늘〉의 일곱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과정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시사오늘〉의 일곱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과정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사상 최악의 한일관계’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옵니다. 일본의 무역 보복으로 발화된 한일 외교 갈등은 현재 양측 실무자간의 회담으로도 진화(鎭火)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특히 일본 정재계 인사들의 막말이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지금의 상황은, 그들이 마치 이웃국가이기를 포기하고 한국을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인데요. 

아시다시피 여기엔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불만이 얽혀 있습니다. 논리와 행동의 정당성을 차치(且置)하고서, 그들의 입장에서 현 시국을 보자면 이렇겠지요. 

‘우리는 분명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체결했어. 협정 제1조에 따라 어마어마한 돈(무상 자금 3억 달러와 유상 자금 2억 달러)를 지원했고, 협정 제2조에 따르면 청구권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최종적으로 완결돼. 그런데 너희끼리 갑자기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내리더니 65년 협정을 없던 일로 하자고 하네. 이거 먹튀(먹고 튀다) 아니야?’

물론 이 입장엔 오류가 있습니다. 청구권 협정에선 애초부터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나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보상을 인정하진 않았거든요. 한 마디로 한일 역사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하지만 1965년 협정이 어느 정도 일본 측의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인데요. 그렇다면 당시 박정희 정권은 왜 이런 협약을 맺었을까요? 일각의 주장대로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는 매국노’라서 그럴까요? 당시 회고록을 살펴보니, 여기에도 나름의 고심과 국가를 위한 결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안타깝지만 박 전 대통령은 제대로 된 회고록 없이 사자(死者)가 되어버렸으니, 우리는 그의 최측근으로써 한일외교 실무자로 활약했던 JP(김종필 전 총리)와 당시 야권 ‘투탑’이던 YS(김영삼)와 DJ(김대중)의 회고록을 보기 쉽게 옮겨 봤습니다. 우리의 일곱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과정입니다.

 

1951.09.08.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敗亡)한 이후, 일본은 국제 사회에 복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1951년 9월 8일, 일본은 당시 연합국 48개국을 상대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대일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군정 종식과 주권 회복이 골자입니다. △일본이 강제 점령한 지역에 대한 권리 포기 △일본 국민이 미국에 대하여 소송할 수 있는 권리 포기(국가에 대한 개인 청구권 포기) 등을 담고 있으며, 한반도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물론 한국도 연합국 일원으로서 일본을 상대로 한 이 대일강화조약의 서명국이 되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으로 대내외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세력도 미미했습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 당사자면서도 이 조약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양국 모두 한일 관계를 재정립해야할 필요성은 느꼈습니다. 그것을 조약이나 협정으로 규정해야한다는 국제적 요구도 있었고요. 그 일환으로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일반적 해석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다시 국교를 맺어 냉전시대 체제의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대항하기를 원했습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의 단결을 원했기에, 일본에 대한 평화조약 및 한일 친선 관계를 종용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부가 일본이 사과와 배상부터 할 것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지지부진했지요. 1951년 10월 21일 도쿄에서 열린 제1차 한일회담을 시작으로 이승만 정부 하 약 5차례의 회담이 진행됐지만 이렇다 할만 한 결과는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승만 정권은 한일 관계에서 ‘선(先)사과·배상 후(後)협상’을 고집하고 있었고, 박정희 정권부터 이 공식이 깨졌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1961.05.16.~1962.11.11.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 즉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는 국민들의 열망을 환기할 만한 국가적 사업이 절실한 상황이었지요. 그게 바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이었습니다.

역시 모든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전란(戰亂)으로 국고가 바닥나 이를 실행할 자금이 없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포스코 설립을 추진하려 했지만 세계은행이 한국의 기간산업에 채산성이 없다는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같은 고민을 파악한 JP는 박정희보다 먼저 일본 총리와의 물밑 회담을 진행합니다. 

1961년 가을, 고민이 깊어갔다. 혁명정부는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나라의 빈곤을 몰아내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해법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때마침 미국의 존 케네디 대통령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11월 14일 정상회담을 갖자고 공식 초청했다. 나는 박 의장의 방미를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협상 타개와 연계하려 했다. 오랜 시간 속에 숙성된 생각이었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밑천이 있어야 한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 청구권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극비리에 중앙정보부 일본 라인을 통해 나와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의 면담을 추진시켰다. 박정희 의장에게는 일이 거의 성사된 단계에서 보고 드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일절 모르게 했다. 내가 이렇게 비밀을 유지한 까닭은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김종필 회고록, 210-211 페이지

당시 JP의 신경은 온통 ‘한국은 얼마나 배상받을 수 있을까’에 쏠려 있는 듯합니다. JP는 이승만 정부 시절 회담 참여자들을 초빙해 일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금액을 추산하고, 그 돈으로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1962년 10월 나는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들르기로 했다. 그 전에 박 의장과 나는 최고회의 의장실로 민주당 시절 5차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던 유진오 박사를 초빙했다. 

“일본이 우리한테 정말 얼마나 줄 수 있다고 보시는가”라는 박 의장의 질문에 유 박사는 “일본 사람들한테 들었지만 3,000만 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답했다. 유 박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액수는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 박사가 돌아간 뒤 박 의장은 “어떤 사람은 일본이 우리를 36년간 지배했으니 1년에 1억씩 36억 달러를 내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최소 10억 달러는 받아내야 한다고 한다. 으음···8억···8억. 김 부장, 8억 달러 어때. 국민들은 불만이겠지만 그걸로 종합제철소도 짓고 종합기계공장도 만들고 해보자고”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놓은 8억 달러는 박 의장이 내게 준 인디케이션(지침)이었다.
-김종필 회고록, 218-219페이지

 

1962.11.12. 김종필-오히라 회담

JP가 고대하던 1962년 11월 12일, 일본 오히라 장관과의 회담일이 밝았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이었던 JP는 도쿄에서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 중 대일 청구권 문제에 대해 타협점에 도달합니다. 이때 둘은 한 장의 메모를 교환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입니다. 

회담 전 JP는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금 명목 불가, 총액 6억 달러 관철’을 요구하라는 박정희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3시간 30분간의 긴 협상 끝에 그 결과를 간략하게 메모 형식으로 작성했는데요. 메모에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하고 이를 양국 수뇌에게 건의한다’는 내용이 최종적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3시간동안의 회담 과정을 좀 더 상세히 알아볼까요. 다음은 김종필 회고록 대략 세 페이지를 기반으로 기자가 재구성해 본 오히라-JP의 대화입니다. JP에 따르면 “처음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고 하니, 그 평행선 같은 분위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1962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JP는 도쿄에서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 중 대일 청구권 문제에 대해 타협점에 도달한다. 이때 둘은 한 장의 메모를 교환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김종필 자서전
1962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JP는 도쿄에서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 중 대일 청구권 문제에 대해 타협점에 도달한다. 이때 둘은 한 장의 메모를 교환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김종필 자서전

“귀국이 청구권 자금으로 우리에게 지불할 금액을 얼마로 생각하고 있으시오?” 
“………3000만 달러 정도요.”
“그 3000만 달러는 어디서 나온 기준이오?”
“외무대신인 내가 직접 생각해낸 내용이올시다.”
“이케다 총리와도 상의한 이야깁니까?”
“아, 총리하고는 얘기했소. 그런데 총리는 3000만 달러도 많다고 하더군.”
“금액의 다과(多寡)가 결국 문제 아니겠소.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당신의 본심을 이야기해 보시오.”
“음……. 5000만 달러.”
(애걔?) “당신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할 때 수탈한 것이 적지 않소. 게다가 우리는 전쟁까지 겪었는데, 그 원인 또한 당신들의 잘못 때문 아니요? 5000만 달러라니. 그 정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건 내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요.”
“…….”
“…….”
“…….”
“흠…. 사실은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안이 하나 있소.”
(옳거니) “그게 무엇입니까?”
“무상 2억 달러, 유상협력기금 형식의 3억 달러, 그래서 전부 5억 달러.”

오히라의 이 말을 들은 JP는 마치 문제 해결에 한 가닥의 광명(光明)이 비추는 듯 했다고 회상합니다. 당초 기획했던 8억 달러엔 미치지 못한 돈인데도 말이지요. 3~5천만 달러에서 5억까지 올렸으니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이에 대해 JP는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총 14억 달러였으니, 그중 3분의 1정도를 얻은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결과라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세 시간 동안 막힌 얘기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오히라의 ‘속내’가 드러낸 금액은 5억 달러. 어느 정도 타결선에 가까워진 셈이었다. 

나는 “무상을 3억 달러로 하고, 유상을 2억 달러로 하자. 민간 베이스에서 1억 달러 플러스 알파를 내게 하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했던 ‘5억 달러’라는 카드를 먼저 꺼내 보인 뒤라 대세를 돌이키기는 힘들었다. 결국 내가 제안한 ‘3억(무상)+2억(유상)+1억 플러스 알파(민간)’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 패전국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 지불금의 명목을 청구권으로 하느냐 경제협력 자금으로 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나중에 협의하기로 했다. 합의 내용을 틀림없이 서로 박정희 의장과 이케다 총리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히라 외상의 전용 메모지에 합의 내용을 각각 쓰고 서로 대조해 보았다. 마지막 쟁점은 돈을 더떤 방식으로 지불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타결했지만 자금 규모의 합의에 비하면 부수적인 일이었다. 그 내용을 적은 게 ‘김종필-오히라 메모’였다. 메모의 내용은 ‘① 무상 3억 달러 ② 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③ 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알파를 제공한다’였다.
-김종필 회고록, 222페이지.

그러나 이에 대해 야당 인사이자 민주화 투사이던 DJ는 ‘비밀 교섭’이라며 반발했습니다.

이미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해 나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의 경제 원조가 필요했다. 박 정권은 군정 시대에 이미 대일 청구권에 대해 일본과 합의를 보았다. 1961년 10월과 11월 두 차례 도쿄에서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대신과 한국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전격 합의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가 그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에 무상 경제 협력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라, 상업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공식 외교 채널이 아니라 비밀 교섭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따라서 야당의 반발은 당연했다.
-김대중 자서전 162페이지

물론 박정희 정부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협상이 국민 정서를 배반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당연히 예상한 것이죠. 이들의 심중(心中)을 헤아려볼까요. 

JP의 회고록을 보니, 오로지 국민을 위한 ‘거국적 결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위한 혁명에 목숨까지 바친 놈인데, 매국노라는 욕이 뭐가 두렵겠느냐”라는 대목은 자못 비장하게 느껴지네요.

국교정상화 협상의 주 테마는 결국 일본한테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식민지 시대 때 한국인에게 진 빚이나 가한 고통에 대한 대가를 한국이 받아오는 문제다. 일본은 더 이상 진전시키면 자기네가 불리하다는 생각이었고 한국 측은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제대로 받아오지 못하면 매국노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일본 문제만 나오면 전부 뒷짐만 지고 주저앉아 있는 형편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경멸감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다.

 그런 정황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하자. 혁명에 목숨까지 바친 놈인데 무슨 비난을 받든 뭐가 두려운가. 욕을 할 테면 해라.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 움직인다. 내가 길을 뚫겠다. 용기도, 배짱도, 발상도 새로 내겠다.’
 이런 결심을 박정희 의장에게 다 말씀드리고 한일 정상회담의 다리를 놓기 위해 도쿄로 날아간 것이다. 이케다 총리와는 1년 뒤인 1962년 10월에 또 만났다. 한일협상은 대일 청구권 문제로 실무 협상이 꽉 막혀 있었다.
-김종필 회고록, 213-214페이지

한일회담에 임하는 내 마음은 1961년 혁명 때 목숨을 걸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게는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내가 할 일이었다. 10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과업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조국근대화의 자금 밑천을 만들어야 했다.

-위의 책, 248페이지


1962.11.22. 박정희-이케다 국교정상화 합의

1962년 11월 22일, 박정희는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이뤄진 물밑 협약을 기반으로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조속한 한일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습니다. 한국의 ‘자금’, 일본의 ‘명분’, 미국의 ‘세(勢)’라는 국제이해관계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아무튼 이를 총괄했던 JP는 당시 협상 과정이 상당히 원활하게 흘러갔으며, 특히 일본 측이 아주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국민정서상 박정희 의장의 방일을 일본 측이 초청하는 형식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이케다는 소득배증 운동으로 일본 고도성장의 기초를 닦은 정치인이었다. 역사의 진행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말씀을 들어보니 김 부장 같은 분의 보좌를 받고 계신 박정희 의장께서도 좋은 정치를 하실 분으로 보입니다. 특사를 보내겠습니다”고 답변했다. (중략) 이렇게 해서 도쿄에서 박정희-이케다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박 의장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대일 청구권에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 평화선 문제에 신축성을 보이겠다”고 밝혔는데, 한일 회담이 타결해야 할 핵심 쟁점을 조리 있게 정리한 말씀이었다.
-김종필 회고록, 212-213 페이지

 

1964.03.24. 한일회담 반대 시위

방금 전 박정희 정부도 일본과의 협상이 가져올 국민들의 반감을 각오했었다고 말했었지요. 그러나 분노의 불길은 생각보다 거셌습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에 대해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심지어 2019년 현재까지도), 한국은 6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식민 지배의 피해에 대한 모든 배상을 포기하기로 약속했다는 회담 내용이 언론에 실렸습니다. 

전국 각지 대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3월 24일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를 시작으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습니다. 야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 입장을 펼친 정치인은 군사정변 때문에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던 윤보선인데요. 그를 비롯한 장택상, 이범석, 장준하 등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을 ‘대일굴욕외교’로 규정하고 학생들과 손잡고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매일같이 연단에 서서 박정희와 JP를 비판했습니다.

윤보선을 포함한 야권 정치인들의 반일(反日)투쟁에 대해, DJ는 의외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DJ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협약이 한일 양국에 상호 이익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도 말합니다.

1964년 3월 9일 야당과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모여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 위원회’를 결성했다. 3일 후에는 제6차 한일회담 본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윤보선 총재의 ‘한일회담 무조건 반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회담을 하는 당사자들을 무조건 매국노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박순천 민주당 총재도 내 생각과 같았다. 나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상의 수많은 식민지 국가들도 그들을 침략한 국가들과 다시 국교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국제 사회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더구나 일본은 여러 가지 교류를 통해 가까운 이웃이 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은 경제 대국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저력과 잠재력을 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알고 활용해야 마땅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미루면 자칫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결국 우리만 고립될 것을 우려했다.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당연히 추진해야 합니다.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나라들도 결국 그들을 지배했던 나라와 수교했습니다. 그들이라고 국가의 자긍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 국익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협상에서 불이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부안이 나왔으니 야당도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여 싸워야 합니다. 상호 이익이 보장된 협상안이라면 야당도 반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대중 자서전, 163-164페이지

그러자 DJ에게도 박정희 정권과도 비슷한 ‘일제 앞잡이’, ‘사쿠라’, ‘매국노’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일본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소문도 파다했는데요. 과한 반일(反日)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친일(親日) 매국노가 되는 현실, 씁쓸하지만 2019년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네요.

어느 날 보니, 야당 내에 괴이한 소문이 돌았다.
“김대중은 야당 첩자다. 사쿠라(여당에 매수된 야당 정치인)다. 사쿠라 중에서도 왕사쿠라다.”
야당 의원으로 ‘사쿠라’ 딱지가 붙으면 정치 생명이 끝장나던 시절이었다. 야당의 앞잡이로 돈을 먹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조흥은행 남대문 지점에서 수표로 거금 3000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중략) 국민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야당은 이를 자극하며 다분히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한번은 이화여대에서 학생들과 토론을 했다. 이태영 여사가 주선한 자리였다. 학생들은 잔뜩 벼르고 있는 듯했다. 정치인들을 줏대도 의식도 없이 부유하는 집단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차근차근 그들을 설득했다.


“일본과의 수교를 영원히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해야 합니다. 일본과 다시 손을 잡으려면 그 기회를 봐야 하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봅니다. 문제는 어떤 내용으로 우리 이익을 극대화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뒤를 살피지 않고 무조건 반대만을 하니, 일본 정부와 박 정권이 ‘야당의 얘기는 들어줘 봤자 반대만 계속할 것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며 밀실 야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건을 달고 반대를 해야 실리를 챙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박 정권을 돕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서 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 일본과 수교할 적기라고 하는 지금, 무조건 반대만 할 게 아니라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독도 문제와 일본의 침략에 사과를 받아 내야 하는데 이렇듯 반대만 일삼으면 모든 것이 묻혀 버립니다. 만일 일본 정부와 박 정권의 형편없는 내용의 협약에 서명하고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감정만을 앞세워 국익을 팽개칠 수 없어서 나선 것입니다.”

(중략) 어쨌든 내 정치 인생에 정말 괴로운 시기였다. 사람들은 내 진심을 도대체 알려고도 안 했다. 소문은 다른 소문을 낳았다.
-김대중 자서전, 165-166페이지

한편 DJ의 영원한 맞수, YS는 어땠을까요.

당시 민정당 대변인이던 YS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한일회담과 관련해 강력한 반대 논조를 펼쳤습니다. 일본의 행태를 직접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는데요. 일본의 사죄를 우선한 YS는, 실리를 계산한 DJ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공화당 정권이 추진해 오던 한일회담 문제는 1964년 벽두부터 최대의 정치현안으로 비화되었다. 야당과 재야인사들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서울대·고려대·연세대생들은 3월 24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중략) 야당 대변인으로서 나는 당시의 한일회담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문제에 대해 강력한 반대논조를 폈다. 한일회담과 관련, 일본측의 망언과 정부의 매국적 협상자세를 비판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했다. 
-김영삼 자서전, 166페이지

“40년간의 일본통치는 선정이었으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망발은 과연 무엇을 노린 것인가. 40년간 일제 통치 하에서 유린당한 한국은 6·25 공산침략으로 짓밟히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특수경기’로 전후 일본 부흥에 간접적으로 크게 공헌했다. 부흥에의 공헌만이 아니라 한국은 일본 적화의 방파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참을 수 없을만큼 우리의 감정을 촉발시키고 있다. 과거 십 수 년 지속되어 온 평화라인(이승만 라인)에 대한 공공연한 침범 이외에도, 피의 대가인 청구권문제를 독립 축하금 운운하는가 하면,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구실로 극소액을 주장하면서 고자세를 취하고 있다.”
- 1965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영삼 글 발췌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각지 대학에서는 관을 짜고 한일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김종필에 대한 규탄성명과 함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기까지 했으니, 이때의 뜨거운 반일 열풍은 지금과는 비할 바가 못 되겠네요. 

 

1964.06.03. 6·3 사태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했습니다. 반작용으로 학생운동도 더욱 뜨거워졌고요.

6월 3일, 정오부터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를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무력으로 진정시켰습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집회·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도 취해졌습니다. 서울 중심부인 세종로와 청와대 앞에서 경찰은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무차별하게 쏘았고, 거리엔 최루가스가 흩날렸습니다. 분노한 군중들로 인해 경찰서, 파출소, 소방서도 일부 부서졌습니다. 

DJ는 이 6·3사태와 관련해 야당 정치인들의 잘못도 있음을 지적합니다. 윤보선을 비롯한 강경대일파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반감만 자극해 이 참사가 벌어졌으며, 야당은 힘도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군부만 자극한 꼴이 됐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DJ는 한일 협정과 관련해선 우호적 입장이었으니, 이 상황이 더욱 못마땅했겠지요.

야권은 민정당 사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향후 대응책을 논의했다. 윤보선 총재가 말했다.
 “학생들과 함께 궐기하겠다. 수십만 명이 시위에 참가할 것이고 그 선두에 내가 서겠다.”
 강경 기류가 걱정되어 내가 말렸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정부는 틀림없이 계엄령을 선포할 것입니다.”
(중략) 이때 미국은 박 정권 편에 서 있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미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정책의 요체이기 때문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박 정권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시위가 격화되자 박 대통령이 한때 사임까지 고려했는데, 이를 알아챈 미국 측에서 강력하게 제지했다고 한다.

(중략) 돌아보면 야당 강경파는 국제적 고립을 스스로 불러왔다. 세계 여론이나 국가 장래의 이익에 눈을 돌렸어야 했다. 국민들도 반일 정서 때문에 수교를 반대했지만,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 영리한 외교를 한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안보와 경제를 생각해서라도 일본은 우방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야권은 힘과 명분을 충분히 비축하지 못한 채 반정부 투쟁을 벌이다 결국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할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 167-168 페이지

반면 YS는 여전히 강경한 ‘선 사죄 후 협상’ 대일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태 이후 6월 24일 부산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합니다.

한일협정 조인 직후에도 나는 박정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야당과 학생, 국민 대다수가 아무리 반대해도 그 소리에는 귀를 막고 무엇엔가 쫓기는 듯이 스케줄에 맞추어 한일국교정상화 조약에 조인하고야 말았다. 야당이나 학생,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도 결코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현 정부가 굴욕적인 내용으로 조인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일본은 과거의 잔학한 한국 수탈행위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호혜평등의 입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출발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나타난 내용은 반대로 일본의 이익에만 역점을 둔 감이 역력하다.
-김영삼 자서전, 167-168페이지

숱한 곡절 끝에 한일 기본 조약은 1965년 2월 20일 서울 중앙청에서 가조인되었고, 6월 22일 도쿄의 수상 관저에서 기본 조약, 청구권, 어업 문제 등에 관한 모든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사진은 서명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김종필 자서전
숱한 곡절 끝에 한일 기본 조약은 1965년 2월 20일 서울 중앙청에서 가조인되었고, 6월 22일 도쿄의 수상 관저에서 기본 조약, 청구권, 어업 문제 등에 관한 모든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사진은 서명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김종필 자서전

1965.02.20.~1965.06.22.

군대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제압하고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했다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라는 뜻이겠지요.

결국 한일 기본 조약은 숱한 곡절 끝에 1965년 2월 20일 서울 중앙청에서 가조인되었고, 6월 22일 도쿄의 수상 관저에서 기본 조약, 청구권, 어업 문제 등에 관한 모든 관련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됩니다.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 한일회담 수석대표 김동조와 일본외상 시이나, 수석대표 다카스키 사이에의 서명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 한일 청구권 협정. 이들은 알았을까요. 이 조약이 한일 갈등의 마침표가 아닌 도돌이표가 되는 미래를요.

아무튼 해방 후 양국 간 최초의 조약이었던 한일 청구권 협정의 5개 조항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조  1. 일본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a) 현재에 있어서 1천8십억 일본 원(108,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가치를 가지는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본 협정의 효력발생일로부터 10년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한다. 매년의 생산물 및 용역의 제공은 현재에 있어서 1백8억 일본 원(10,8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3천만 아메리카합중국 불($ 30,000,000)과 동등한 일본 원의 액수를 한도로 하고 매년의 제공이 본 액수에 미달되었을 때에는 그 잔액은 차년 이후의 제공액에 가산된다. 단, 매년의 제공 한도액은 양 체약국 정부의 합의에 의하여 증액될 수 있다.

(b) 현재에 있어서 7백20억 일본 원(72,000,000,000원)으로 환산되는 2억 아메리카합중국 불($ 200,000,000)과 동등한 일본원의 액수에 달하기까지의 장기 저리의 차관으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하고 또한 3의 규정에 근거하여 체결될 약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업의 실시에 필요한 일본국의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대한민국이 조달하는데 있어 충당될 차관을 본 협정의 효력 발생 일로부터 10년 기간에 걸쳐 행한다. 본 차관은 일본국의 해외경제협력기금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것으로 하고, 일본국 정부는 동 기금이 본 차관을 매년 균등하게 이행할 수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전기 제공 및 차관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2.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권고를 행할 권한을 가지는 양 정부 간의 협의기관으로서 양 정부의 대표자로 구성될 합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한 약정을 체결한다.

제2조  1.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 년 9 월 8 일 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2.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 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 년 8 월 15 일 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 까지 사이에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 년 8 월 15 일 이후에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들어오게 된 것

3. 2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 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제3조 1. 본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양 체약국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하여 해결한다.

2. 1의 규정에 의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분쟁은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타방체약국의 정부로부터 분쟁의 중재를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 날로부터 30일의 기간내에 각 체약국 정부가 임명하는 1인의 중재위원과 이와 같이 선정된 2인의 중재위원이 당해 기간 후의 30일의 기간내에 합의하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당해 기간내에 이들 2인의 중재위원이 합의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과의 3인의 중재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위하여 회부한다.

단, 제3의 중재위원은 양 체약국중의 어느편의 국민이어서는 아니된다.

3. 어느 일방체약국의 정부가 당해 기간내에 중재위원을 임명하지 아니하였을 때, 또는 제3의 중재위원 또는 제3국에 대하여 당해 기간내에 합의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중재위원회는 양 체약국 정부가 각각 30일의 기간내에 선정하는 국가의 정부가 지명하는 각 1인의 중재위원과 이들 정부가 협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제3국의 정부가 지명하는 제3의 중재위원으로 구성한다.

4. 양 체약국 정부는 본조의 규정에 의거한 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복한다.

제4조 본 협정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협정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물론 이 조약은 양국 국회의 비준을 거쳐야만 발효될 수 있었습니다. 국회가 쉽게 비준을 해 줬을까요? 당시 언론을 보면, 야권은 ‘제2의 을사보호조약’, ‘교섭대표는 제2의 이완용’이라는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DJ는 협정 내용을 보고 수치심을 느꼈다고 서술하는데요. DJ가 생각을 바꿔 1965년 결과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받은 돈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는 것. 둘째, 일본군 성노예(위안부)·강제 징용 노동자 등 역사적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 마지막, 무작정 반대했던 야권과 미국 정부와의 관계는 악화됐다는 것.

나는 협정 내용을 보고 분노를 넘어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선 대일 청구권은 3억 달러는 역대 정부가 요구한 액수 가운데 최저였다. 이승만 정권은 20억 달러였고, 장면 정권도 국교 정상화를 위해 28억 5000만원 달러를 요구했다. 이에 비해 3억 달러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35년간 수탈의 역사를 3억 달러로 보상받는다는 것에는 누구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국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차라리 일본으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맙시다. 우리는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바에는 청구권 따위는 일축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대신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는다면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청산한 후에 새롭게 출발합시다. 국민도 그러한 명예로운 태도를 더 바라고 있습니다.”

(중략) 이 협정으로 아무런 유보 조건도 없이 일본과 관련된 모든 과거사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셈이었다. 이는 엄하고도 중대한 문제였다. 히로시마 한국인 피폭 사건, 한국인 노동자 강제 연행 사건, ‘종군위안부’ 문제, 사할린 교포 송환 문제 등 숱한 비극적 사건이 산재해 있는데도 이제 법적으로는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겨레와 역사 앞에 죄를 짓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본조약과 협정이 비준된 후 서울의 대학생과 고등학생 1만여 명이 비준 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인을 동원해서 진압했다. 학생과 시민들의 비준 반대 시위도 야당 강경파들의 명분이 약한 ‘무조건 투쟁’의 여파로 열기를 증폭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야당은 대외적인 국익도 지키지 못했고, 대내적인 입지도 강화시키지 못했다. 야당은 추락을 거듭했다.
 
한일협정을 체결한 후 박 정권과 일본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박 정권은 일본으로부터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원조를 얻었고, 미국으로부터도 절대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미국과 세계는 야당의 거센 저항에도 한일협정을 이끌어 낸 박 정권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반면 시종 반대만 했던 야당의 강경 노선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대중 자서전, 177-178페이지

YS는 협상 결과뿐 아니라 과정부터 마땅치 않아합니다. 돈이 궁한 한국은 전전긍긍, 반면 역사적 죄인인 일본은 협상 내내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일본 측을 압박하는 모습이었다고 회상하는 JP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네요.  

어떤 사람은 강변할 것이다.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우리나라는 가난했고 박정희로서는 당장 돈이 필요하니까 협상을 빨리 추진한 면이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불과 수억 불의 돈과 과거 36년을 맞바꾼 셈이었다. 수십 년 동안 한 나라를 송두리째 집어삼킨 대가가 고작 몇 억 달러로 계산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는 국민의 반대의 소리를 억압한 가운데 협정을 강행했다. 박정희는 협상에 미숙하면서도 지나치게 서두른 반면, 일본은 도도하고 여유가 있었다. 한일관계는 과거의 불행했던 시절을 거울삼아 새로운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평등하고 우호적이어야 하는데, 조약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결국 두고두고 한·일 양국 간에 문제의 불씨가 남게 되었다. 1965년 정국에 ‘태풍의 눈’이었던 한일협정은 그 해 6월 22일 전 국민적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정식으로 조인되고 말았다.
-김영삼 자서전, 168페이지

 

“한일관계 갈등 관리는 국제사회에서 필수… 양국 냉정한 자세 유지해야”

1965년 6월 23일, 한일 수교협정이 조인된 다음날 박정희는 TV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면 과거를 잊고 철천지원수와도 손을 잡겠다는 것. 이에 대해 JP는 그의 회고록에서 “반일(反日)보다 어려운 게 용일(容日)이라는 얘기는 나와 박 대통령이 종종 나눴던 대화 주제”라고 전했습니다.

얼핏 보기엔 박정희 정부가 실리적 외교를 잘 펼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린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얻었고,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도 더욱 끈끈해졌으며, 한일 수교(修交)도 정상화됐으니까요. 그러나 국가는 국민의 행복과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외교적 실리만을 운운하며 국민감정을 외면했고, ‘그들만의 합의’를 도출해냈기 때문에 한일 갈등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요.

한일관계 전문가라고 불리는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올해 초 그의 학술지 논문 <한일관계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에서 한일 협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전략적 필요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일 협력이야말로 중국·미국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한일관계를 관리한다는 것은 한국 외교의 선택지를 높이고 국제사회에서 ‘전략적 동반자’를 확대하는 방안이라는 관점입니다.

다만 진 소장은 “(현재 대한민국은) 1965년 기본조약을 맺을 때부터 일본의 식민지배 불법성을 명백하게 하여 사죄를 확실히 받아내어야 한다는 주장과 현실적인 관점에서 타협을 통해 국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며 “게다가 일본의 보수화 경향은 한국과의 타협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더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일본 내 컨센서스로 정착되었다.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한일협력에는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아 미국에 의한 한일 타협도 어렵게 되었다”고 현실적 한계를 분석합니다.

그렇다면 이 외교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진 소장은 양국 실무자 모두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언론 역시 자극적인 감정 선동을 그쳐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한일 양국은 서로를 냉정히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전략적으로 고려하는 모멘텀이 필요한 시기이다.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처럼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한일정부가 타협을 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여론을 환기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나서서 정부가 전략적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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