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조국(祖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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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조국(祖國)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9.08.22 23:0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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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교수 부모를 둔 의사 딸, 건물주를 꿈꾸는 초등학생
부익부(富益富)를 손가락질하면서도 동경하는 사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문재인 정부의 인사로 불거진 논란이지만, 동시에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으레 그렇듯' 부자 부모만이 자식의 꿈을 이뤄줄 수 있다는 데서 나오는 패배주의의 한숨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문재인 정부의 인사로 불거진 논란이지만, 동시에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으레 그렇듯' 부자 부모만이 자식의 꿈을 이뤄줄 수 있다는 데서 나오는 패배주의의 한숨이다. ⓒ시사오늘 김유종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있는 우리 부모 가지고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돈도 실력이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군림했던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 정유라 씨는 언론에 부정입학 논란이 불거지자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흔히들 돈 많은 부모를 가진 것도 자녀의 실력이 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와 패배주의 타성에 젖은 한심한 말처럼 보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결국 진리가 된 듯하다.

특목고는 설립 이래로 학생들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외부 유명강사를 초빙해 성적순으로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전문직 학부모들과 연계된 곳에서 인턴십 과정을 거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시와 수시 굳이 구분할 것 없이 모든 방면에서 완벽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이 눈앞에 대령되는, 그들만의 ‘캐슬’이다.

어떤 계층에겐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그들은 그만큼 학교에 돈을 낸다. 태어나보니 부모가 교수였고 의사였으며 재력가였다. 내 옆에 앉은 친구도 그렇게 대학에 갔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도리어 어색할 지경이다.

‘조국 블랙홀’이 터지고 목동에서 한 입시 컨설턴트를 만났다. 그는 조국 딸과 관련된 논란을 듣고 ‘운이 나빴다’고 했다. 아빠가 공직에 출마했기 때문에 딸이 과한 비판을 받는다고 안쓰러워했다. 왜냐고? 잘 사는 집 애들은 그렇게 대학에 가곤 하니까. 전문직 학부모들의 ‘품앗이’로 학종(학생부종합전형) 가산점을 얻어 대학에 가는 것이 현행법상 불법이 아니니까. 

그는 서둘러 “물론 조국이 잘 했다는 말은 아니지만”이라고 덧붙이면서도, 그와 비슷한 대학 합격자 사례들을 설명했다. 부모가 학계 최고 권위자이기 때문에 그의 고등학생 아들이 SCI논문에 저자로 등록됐던 일. 로스쿨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학생들 부모의 평균 직업군. 자소서를 대필해주는 데 드는 천문학적 금액. 그는 수차례 이를 ‘관행’이라고 강조했다. 

“걔네들은 다들 그렇게 명문대에 가요. 그 동네는 다들 그러고 살아요. 순진하게 몰랐던 건 아니잖아요. 정시로 서울대 의대 간다고 쳐도, 걔네는 대치동 최고 강사한테 수업 들어서 수능 쳐서 간 거예요.”

관행. 오래전부터 보편적으로 해 오던 일들. 즉, 아무 문제의식 없이 이뤄지는 행동. 비슷한 예로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억울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임명 직후 본인과 아내 명의로 흑석동 부동산 구입하는 과정에서 일명 ‘부동산 투기’를 한 의혹이 드러나 결국 대변인 직을 사퇴했다. 조사 결과 부동산 거래 과정에서 불법 개입은 없었다고 한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돈을 더 벌곤 했다. 이건 자본으로 자본을 버는, 부자들의 관행이었다. 그들만의 관행대로 했을 뿐인데, 그의 입장에선 억울했을지도 모르겠다.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모두 강남 살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는 본인은 송파구에 위치한 수십 억 대의 고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으레 부자들이 그렇듯이.

조국 후보자는 “유명 특목고로 인한 혜택은 대부분 상위 계층에 속하는 학생들만 누리고 있다”며 특목고와 자사고의 존재 가치를 수차례 비난해왔다. 그러는 본인은 딸을 ‘입시 사관학교의 요람’으로 불리는 외고에 보냈다. 으레 부자 학부모들이 그렇듯이.

김의겸 전 대변인은 2011년 신문 칼럼에서 “난 전셋값 대느라 헉헉거리는데 누구는 아파트 값이 몇 배로 뛰며 돈방석에 앉는다. 곤궁이란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말했다. 그러는 본인은 재개발 구역에 있는 뉴타운 상가를 샀다. 

이들은 이 세상 모든 부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관습에 따랐다. 문재인 정부 사람들 이야기지만, 동시에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모두 맞는 말을 할 수 있다. 말은 쉽다. 모두가 명문대 갈 필요 없다. 모두가 강남에 살 필요 없다. 개천에서 용이 되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 듣기만 해도 아름답다. 박수쳐주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여의주를 물 기회만 생기면, 악착같이 용으로 승천하려고 다른 개천 생물들을 짓밟으면서 발버둥치는 존재다. 모두가 용일 필요는 없다고, 우리 함께 개천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말하던 진보 언론인, 진보 법학자도 ‘자기 자식과 자기 안위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관습을 다시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 부자들은 다들 그렇게 살겠지.’ 일견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으로는 사회 공정과 평등을 염불처럼 외던 새 정부와 진보 지식인마저 결국엔 똑같은 사람이기에, 이 사회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아 미친 듯이 입 안이 씁쓸해지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년에 한번 회원국 학생들의 교육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실시한다. 이 PISA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도 있다. ‘서른 살이 됐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싶나요?’

한 대학 교수가 2015년 설문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엮어 수치화해봤더니, 부모 경제력이 최하위 25%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장래희망 점수는 51.7, 최상위 25% 그룹의 점수는 61.2가 나왔다. 소득이 높은 부모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소득이 높은 직업을 꿈꿨다. 직군도 다양했다. 교사, 의사, 외교관, 변호사, 대기업CEO, 로봇공학자…….

반면 부모 소득 하위 25%의 아이들은 ‘회사원(일반 사무직)’을 고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모르겠음’ 응답이 무려 3위를 차지했다. 최상위 25% 그룹의 상위 10개 직업 응답 중에선 ‘모르겠음’은 없었다.
  
부모가 가진 돈에 따라 아이들의 장래희망이 달라지는 현실. 한국에선 어린이의 꿈에도 가격표가 달려있다. 원하는 꿈을 사려면 부모가 값을 지불해야 한다.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말이 있다. 서울대 출신 엘리트의 선민의식이 그득 담긴 유명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조국(祖國)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조국(54세, 법무부장관 후보자)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조 후보자는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다. 있는 집 자식만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 씁쓸해지는 2019년 8월이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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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민 2019-08-24 18:12:25
가슴이 짠하네요 맞는말인거 알면서

전땡라 2019-08-23 13:18:10
좋은 글이네요..
새삼 알게되니 더 씁쓸한 사실들.

신봉철 2019-08-23 10:09:20
잘 읽었습니다.
민주당이 이 글을 보면서 반성을 하기를..
언행일치..
다음 에도 좋은 기사 부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