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직접 관람한 남북 탁구 대결

〈최기영의 山戰酒戰〉 ‘이스턴챔피언스컵 2019’ 스태프 참관기

2019-12-08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남자부

만주의 일부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먼 옛날 고구려와 발해가 지배했던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이후에는 중국의 땅이었다가 19세기 말 러시아가 이 땅을 차지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는 안중근, 최재형, 홍범도 등 수많은 독립투사와 의병이 망명해 민족 교육과 의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북아 국가들이 그렇게 얽히고설킨 대결과 전쟁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러시아, 일본이 모여 처음으로 탁구 친선교류대회인 '이스턴 챔피언스컵 2019'가 열렸다. 특히 북한도 이 대회에 참가했다. 정치적 경색국면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 친선 스포츠 교류 대회에 남북한이 모두 참여한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대회 홍보를 맡은 나도 선수단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대회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북한의 참가는 불투명했다. 그러나 대회 개막 3일 전이었던 지난 11월 22일 북한 선수단이 고려항공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이 확인되며 탁구 남북 대결이 오랜만에 성사됐다. 

'동북아의 화합과 협력'을 모토로 내걸고 올해 처음으로 열린 이번 대회는 동북아 5개국 수도탁구팀이 남녀부로 나뉘어 단체 대항전을 벌인다. 모든 팀이 차례로 한 번씩 맞붙어 가장 많은 승리를 따낸 팀이 우승한다. 우리나라 서울팀은 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북한의 이분희 등과 팀을 이뤄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감동의 우승을 일궜던 현정화 감독이 총감독을 맡고 서울시청, 금천구청, 마사회 소속 선수로 선수단을 구성했다. 북한도 '조선 4.25 체육단' 선수들로 평양팀을 꾸렸다.  

여자부

개막에 앞서 가장 먼저 도착했던 서울팀과 평양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극동연방대학' 체육관에서 함께 연습했다. 그렇지만 평양팀 선수들의 어떠한 장면도 촬영이 금지됐고, 북측 관계자나 선수들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엄격하게 통제됐다. 선수들이 연습하다가 상대측으로 공이 가끔 넘어가면 말없이 공을 주워 돌려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모스크바, 도쿄, 베이징팀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하였고 드디어 대회가 시작됐다. 그리고 평양팀 선수들의 모습도 처음으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방송국에서도 서울과 평양팀이 연습하는 모습을 취재하며 관심을 보이더니 모스크바팀 경기를 중계했고 우리나라 지상파에서도 서울과 평양팀 간의 남북대결을 생중계했다. 

서울팀과

지난 11월 26일 첫날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여자부 서울과 평양의 남북대결이었다. 탁구 경기를 TV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는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경기는 역전에 역전을 거듭했던 그야말로 혈전이었다. 첫 번째 단식 매치를 평양에 내줬지만 2차 단식과 복식을 서울이 가져왔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두 번의 단식경기에서 연거푸 지며 서울팀이 매치스코어 2 대 3의 아쉬운 패배를 당했다.

게임마다 긴 랠리가 이어졌고 아슬아슬한 승부가 계속되자 바로 옆에서 경기를 보던 나의 심장도 쫄깃해졌다. 우리 한인회는 관중석 한쪽에서 선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서울팀을 열심히 응원했다. 그리고 우리 응원석 바로 옆에는 북한의 인공기를 들고 평양팀을 응원하는 북쪽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한반도기는 없었다. 

평양팀과의

다음날 있었던 남자부 평양팀과의 남북대결도 여자부 경기 이상의 명승부였다. 4시간 20여분의 혈전 끝에 매치스코어 3대 2로 역전승을 거두며 전날 여자부 패배를 그대로 되갚았다. 남자부 경기가 끝나고 우리 선수들과 평양팀 선수들은 악수도 없이 그대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리도 뜨거웠던 경기가 끝나자 러시아에서 불고 있던 찬바람만큼이나 경기장에는 다시 냉기가 감돌았다. 서로를 격려하며 환호하고 얼싸안으며 모두에게 감동을 줬던 탁구 남북단일팀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남자부 서울팀과 여자부 평양팀이 각각 4전 전승을 거둬 대회 첫 챔피언에 등극했다. 남남북녀의 동반 우승이었다. 

현정화 서울팀 총감독은 이번 대회를 마치고 "스포츠 교류가 정치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일상적인 교류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언론에 밝혔다. 그리고 우리 스태프들에게는 "남북한의 경기를 보지 않았나? 국가대표 간 경기에서도 그러한 명승부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북한이 탁구를 잘한다. 단일팀이 꼭 아니더라도 국제 경기가 있으면 함께 참가하고 교류하고 북한의 선수들이 우리나라 실업팀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면 서로의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될 텐데 아쉽다"라며 지금의 남북 간 교착상태를 안타까워했다. 

폐막식에서
우승팀

나는 이번 출전 선수 가운데 북한 평양팀 여자부 에이스 리현심 선수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항상 1단식 첫 주자로 나와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모든 매치를 따내며 여자부 평양팀의 전승을 이끌었다. 폐막식이 있던 호텔 뷔페에서는 선수들이 어울려 함께 식사했다. 평양팀 선수들도 여느 선수들처럼 음식을 그릇에 담기 위해 내가 있던 테이블 옆으로 줄을 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리현심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북한 선수단 쪽을 바라보며 "리현심 선수는 어디 갔어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철영 평양팀 감독은 "저쪽 반대편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제가 리현심 선수 팬입니다. 너무 잘 하시더라고요~"라고 했더니 "고맙습니다~"라며 웃었다. 대회 기간 내내 그렇게도 냉랭했던 분위기였지만 여전히 우리는 같은 언어로 서로에게 따뜻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는

폐막식까지 끝이 나자 스태프들도 긴장을 풀고 우리만의 뒤풀이를 했었다. 러시아는 이미 가혹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는 그 찬바람이 그치고 따뜻한 봄이 올 때쯤 다시 또 남북단일팀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소주 대신 러시아산 보드카를 기울이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