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희와 함께하는 Bye, 혐오의 시대①] 어느 날 나는 벌레가 됐다

갈등관리 전문가 송문희 교수와의 해법에 앞서 카프카의 ‘변신’과 인간의 벌레화인 요즘에 대해

2019-07-14     윤진석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프롤로그>

어느 날 나는 벌레가 됐다. 내 이름은 그레고리다. 하지만 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비록 모습은 벌레로 변했지만, 동생도 아버지도 내가 그레고리임을 알고 있다. 적어도 나는 가족으로서 인식됐다. 동생에게는 오빠였고, 아버지에게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대우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차츰, 가족들도 나를 진짜 벌레 보듯 했다. 그레고리임을 잊어갔다. 치워 없애고 싶은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그렇게 나는 완전한 벌레가 됐다. 버려졌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줄거리다. 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 카프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인간의 벌레화를 다룬 그의 책 <변신>은 200여 년 전에 쓰였지만 인간의 존엄성 훼손 시대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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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책이 쓰이고 한참 후에 일어난 유태인 대량학살의 비극 앞에서도 카프카의 <변신>은 회자됐다. 책을 통해 던져진 카프카의 물음,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까지 침해받을 수 있는가’지가 상기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저지른 독일의 히틀러는 유태인을 벌레라고 불렀다. 벌레니까 나치에 의해 학살을 당해도 된다는 논리였다. 그 같은 지시에 의해, 살충제로 인해 벌레가 죽어나가듯 가스실에서 죽어나간 시체더미는 처참히 버려졌다.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논한다는 것은 오히려 분노에 가까운, 먼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다.

소설은 ‘혐오’로 들끓는 오늘날도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특정 부류의 사람을 지칭해 벌레 충자를 붙여 부른다. 진지한 사람에게는 진지충, 한국 여성과 남성을 각각 폄훼할 때 쓰는 페미충과 한남충, 엄마들을 비하하는 맘충, 정치에 관심 많으면 정치충, 학교 급식을 먹는 청소년들은 급식충, 노인은 틀니를 끼는 세대라고 해서 틀딱충. 인간 경시 풍조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신조어는 이제 보편 다반사가 됐다. 우스갯소리나마 서로를 벌레로 부르는 현상은 이미 익숙한 일이 된 것이다. 

이런 사회 풍조의 영향 때문인지 인간을 벌레도 그냥 벌레가 아닌 더 큰 혐오적 시선의 기생충에 빗댄 영화도 등장했다. 얼마 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다. 상생과 공생이 아닌 기생이 될 때 양자 모두 파괴될 수 있다는 양극화 시대의 폐단을 혐오적 인식으로 바라보며 기생충의 생존 습성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래도 요즘의 ‘충 시대’를 가장 대표하는 것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성 혐오다.  ‘페미충 vs 한남충’으로 엿볼 수 있는 남녀 간의 갈등, 그 폐단이 낳은 젠더 혐오인 것이다. 수년전 여성 혐오의 일베 사이트가 등장한 이후 이제는 남성 혐오 사이트 워마드가 생겨 사회적 우려가 되고 있다. 성 갈등을 부추기고 사회적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양 극단의 혐오적 사이트인 이 두 곳을 폐쇄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하태경 의원) 마련된 상황이다.

정치


"젠더 감수성 키우기"

나아가 근본적 접근을 통한 성 화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왜 이런 사회구조적 문제가 나왔는지를 살펴보고 남녀 모두 인권 감수성, 젠더 감수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이는 ‘젠더 감수성’을 높이는 교양서적 <펭귄 날다>의 저자 송문희 고려대 정치리더십센터 교수가 얼마 전 <시사오늘>을 만나 한 제언이다.

그는 정치평론가이자 갈등관리 전문가이다. 젠더, 정치, 장애, 사회 문화적 갈등 관리에 대한 전 범위를 다루고 있다.

우선 성 갈등에 대한 진단과 해법.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알아보겠다.

<송 교수와의 본격적인 얘기는 다음에 계속.>